〈 113화 〉 2 9 / 베어링턴에서 가장 긴 하루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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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하늘 높은 곳에서 쏟아지는 불덩어리들이 마치 조약돌처럼 보였다.
불의 유성우 하나하나가 마치 자의가 깃든 듯이 정확하게 용의 피 골렘을 후려갈겼다.
검붉은 몸뚱이를 고통스럽게 일그러뜨리며 비통하게 입을 벌렸다가, 그대로 잿더미로 타들어가 흩어지는 골렘을 바라보면서, 이 자리에 누가 왔는지 겨우 깨달았다.
“헤카이트 당주님!”
헤카이트 당주는 하늘 높은 곳, 큰까마귀호의 갑판에서 붉은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주문을 갈무리하고는 아무 디딜 곳이 없는 허공에 발을 내디뎠다.
자연스럽게 그 몸이 하늘에서부터 떨어진다. 길게 자라난 머리카락 한올한올에서 다홍색의 불티가 흩어졌다. 손에 쥔 지팡이를, 두려움 없이 올려다보는 드래곤의 콧등에 겨누었다.
그녀의 주위를 춤추듯이 떠돌던 불꽃이 지팡이의 마력핵에 다투어 모여들었다.
마치 작은 항성처럼 구를 이루어, 마력을 잡아먹으며 점점 더 비대하게 부풀어 오른다.
주먹만 했던 크기가 애드벌룬처럼 팽창해 헤카이트 당주의 얼굴을 환하게 물들였다.
“…「태양왕의 진노(오르기 토우 바실리아 일리오)」!”
이글거리는 태양의 마력을 두른 채 헤카이트 당주의 입이 영창을 끝맺었다.
홍염이 표면에서 들끓어서 이글거리고, 태양풍이 휘몰아칠 것처럼 마력을 집어삼킨 화염구가 쏘아졌다. 마치 해가 두 개 뜬 것 같은 광량과 열기가 일대를 뒤덮었다.
[가소롭, 구… 나!]
코앞에까지 닥쳐온 파괴 주문을 받아내는 용의 포효가 찢기듯이 울려퍼졌다.
거침없이 나아가던 불덩어리의 기세마저 잠시 주춤거릴 정도로.
말로는 ‘가소롭다’고 말했지만, 정말로 무슈마헤트가 헤카이트의 주문을 가소롭게 여겼을 턱이 없다. 숨통이 찌릿찌릿하게 떨릴 정도의 포효에 자기도 모르게 오금이 저릴 정도였으니.
여기저기가 찢겨 다소 볼품없게 되어버린 날개를 넓게 펼진 사이로 마력이 일렁였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셀 수 없이 늘어나는 파문이 녹색과 보라색의 나선으로 물든 순간, 공기에 스며드는 매캐한 탁기에 자기도 모르게 본능적으로 입과 코를 막았다.
그 사이 숨통에 독이 파고들었는지 콜록 내뱉은 숨에서 미세하게 피냄새가 났다.
페리링이 서둘러 지팡이를 세웠다. 나지막히 주문을 읊은 순간 푸르스름한 막이 반구형으로 주변을 덧씌우자 겨우 숨이 편해진 듯한 느낌이 들었다.
“제 근처에서… 절대 떨어지지 마세요!”
저 사이와 여기는 제법 떨어져 있는데도 이렇게 숨이 턱 막힐 정도였다니.
마치 거대한 독사처럼 꿈틀거리는 다섯 갈래의 독기가 번들거리는 녹보랏빛의 회오리로 갈라져 화염구를 들이받았다. 헤카이트 당주의 얼굴이 당혹감으로 흔들리는 게 보였다.
마치 불타는 과일에 달라붙은 뱀떼처럼 화염구의 표면에 휘감긴 독기의 기세에 점점 밀려나는 헤카이트 당주의 주문은, 잠시 길항 상태를 이룬 것처럼 보였다. 낭패감이 짙었다. 기습적으로 드래곤에게 큰 타격을 가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기대했는데.
“역시 만만치가… 않네요.”
결국 주문은 불발되었다.
한덩어리로 휘몰아치고, 뒤엉키고, 꼬인 끝에 두 개의 주문이 동시에 폭발하듯이 사라져버렸다. 굉음과 폭풍, 그리고 연기와 잔해를 흩날리면서.
“다들… 괜찮아요?”
“당주님이야말로. 그런 대주문을 두 개나 연달아서….”
가볍게 착지한 헤카이트 당주의 다리가 살짝 휘청였다.
키르케가 다가가서 부축하지 않았으면 정말로 넘어졌을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직계 제자들 앞에서는… 멋진 모습을 보여줘야 하는 법이니까요.”
“농담할 여유가 있는 건 다행이네. 당주님.”
휴우, 하고 숨을 한 번 내쉴 사이에 흐트러진 마나를 갈무리한 헤카이트 당주는 다시 걸음을 똑바로 세우고는 지팡이를 움켜쥐었다.
드래곤이라고 해도, 헤카이트 당주의 주문에 맞대응한 뒤에는 약간의 휴식이 필요했던 모양이다. 숨을 옅게 쉭쉭거리면서, 바닥을 앞발로 짚고는 내려다보는 입가에서 연기가 피어올랐다.
“지금 세상에 남은 드래곤들은 사악한 본성을 지닌 이들이 아닐 텐데… 왜 저렇게 되어버린 걸까요.”
헤카이트 당주가 탄식하듯이 말했지만, 네, 그거 반쯤은 저 때문입니다. 하고 말하기는 좀 어렵다. 나중에 말을 하더라도 지금은… 일단 이 사태를 해결하고 봐야지.
“알 게 뭐에요. 미친 용이 비늘에다가 왜 미쳤는지 써놓고 다니는 것도 아닌데.”
“키르케. 말.”
“지금… 바쁘니까, 나중에!”
키르케가 학, 가쁜 숨을 한번 내뱉었다. 파리한 안색에 손끝이 잿빛이 된 채로 바들거렸다.
이 녀석이 지금 루드라가 이 땅에 현현할 수 있게 고정하는 쐐기 역할을 하는 이상, 루드라의 화신이 받고 있는 대미지를 같이 받고 있을 것이다.
아우우우우우우!
날카롭게 뿌리치듯한 울음소리가 피어오른 먼지구름 사이로 울려퍼지고, 다시 그 사이에서 돌풍을 끌며 늑대의 형상이 사납게 뛰쳐나왔다. 위협하듯이 커다랗게 부풀었던 등의 털 여기저기가 파이고, 뒷다리 한쪽이 크게 꺾였음에도.
[기껏해야… 루드라의 잔바람 주제에 끈질기구나!]
세 개의 다리로도 부자유스러움이 느껴지지 않는 속도로, 드래곤을 향해 내달리는 늑대의 모습은 적어도 잠시 주춤거리던 모험가들의 사기를 다소나마 끌어올릴 수 있었다.
“정령왕에… ‘매의 기사’, 거기에 대마법사까지….”
“아니, 이거 진짜… 잡을 수 있는 거 아냐?”
수군거리는 목소리에 열이 실리고, 다시금 무기를 고쳐쥔 모험가들이 식어가던 전의를 불살랐다. 할 수 있는 모든 패를 다 모았던만, 아직도 승기는 쉽사리 보이지 않는다.
“어이, 로제. 네가 저 녀석을 묶겠다고 했잖아. 그건 아직이야?”
카르티가 초조한 듯이 들고 있던 창으로 땅을 긁으면서 채근했다. 지금… 가능할까? 이대로라면 막무가내로 뛰쳐드는 모험가들이… 모조리 당해버려서, 더 이상 가망이 없을지도 모른다. 지금이 아니라면… 가망이 없다.
“…좋아, 이제 작전 시작이야. 카르티, 페리링, 도와줘.”
“뭘 하면 될까요?”
“살짝 미친짓을 할까 하고.”
씨익 이를 드러내 웃으면서 손에 쥔 용의 심장에 제 마력을 다시 한 번 돌렸다.
아까는 강도가 부족했다. 적어도 용의 일격을 받고도 움직일 수 있는 강인한 골렘이 필요해. 최대한… 최대한 용에게 접근해야 했다.
[네, 년…!]
무슈마헤트의 눈이 이쪽을 향했다.
정확하게는 내가 쥐고 있는… 심장에.
순간 드래곤의 눈에 초조함이 어리는 것이 보였다.
[내 아이의 것은… 네년의 장난감이, 아니다!]
“어딜!”
휘둘러지는 앞발을 루드라의 화신이 막아섰다.
물고 늘어지면서 턱의 힘으로 흔들려고 하는 시도가 무색하게, 일격을 당한 화신은 이미 한계에 달해있었다. 성긴 이빨이 비늘조차 뚫지 못하는 것에, 키르케가 큭 하고 분한 듯이 이를 악물었다.
[사라져…라!]
“아아아악!”
이번엔 드래곤의 턱이 루드라의 뒷덜미를 물어뜯었다.
캬아악, 하고 고통스러운 소리를 지르며 바둥거리는 거대한 늑대의 몸뚱이를 그대로 턱힘만으로 들어올려, 바닥에 내팽개친 순간, 키르케의 팔에서 피가 튀었다. 루드라의 화신과의 연결이 강제로 끊겨 반동이 돌아왔다.
“키르케 씨!”
“페리링, 키르케를 치유해 줘!”
하지만 그 덕에 시간은 벌었다.
용의 심장에 깃든 힘을 제어가 가능한 선에서 아슬아슬하게 끌어내어, 가브롤의 지팡이에 불어넣고, 그 지팡이에 새겨진 주문식대로 골렘을 짜올렸다.
“Emeth(되살아나라)!”
내가 딛고 있는 땅이 그대로 흔들려서 천천히 위로 솟구치는 손바닥이 되고, 카르티가 잽싸게 내 옆에 옮겨탔다. 쿠르릉, 쿠르릉… 흔들리는 지면에서 혹여 떨어지지 않도록 단단히 붙잡은 팔에서 열기가 느껴졌다.
[같은 수가 또… 통할 것이라 생각했느냐?]
드래곤이 비웃듯이 모멸감 짙은 한 마디를 뱉고는 독기 짙은 마력포를 연거푸 내쏘았다.
한껏 좁힌 골렘의 손가락 너머, 그리고 머리와 다리, 어깨에 폭발이 연이어 일었다. 골렘이 한 대 얻어맞을 때마다 그 골렘을 제어하는 마나맥이 찢어질 듯한 비명을 질렀다.
“로제이아!”
“아직, 괜찮…!”
하지만 아직 괜찮다.
눈앞이 조금 어질어질하고, 시야가 살짝 붉고, 속이 뒤집힐 것 같은 게 전부다.
입으로 역류한 것이 토악질인가 해서 뱉어봤더니 피도 섞여있는 정도, 각오하지 않고서 드래곤과 싸울 수 있겠냐고.
“앞… 으로!”
쿵, 쿵, 쿵.
내 명령에 아무 의문 없이 골렘은 무겁게 전진했다.
어차피 발아래에 멀쩡한 건물 따위는 없어, 거대한 발이 무너진 폐허를 짓이기면서 나아간다. 드래곤의 눈이 분노로 일그러졌다.
[뭘… 노리는 거냐! 무너지란, 말이다!]
드래곤의 몸이 한바퀴를 빙글 돌았다.
거대한 꼬리가 철퇴처럼 휘둘러져오는 것이 묘하게 느리게 보였다. 순간적으로 머릿속이 빠르게 돌아갔다. 핏발선 드래곤의 눈, 그리고 꼬리에서 목으로 이어지는 그 등이, 골렘의 앞에 무방비하게 노출되었다.
“카르티!”
“좋아, 죽으면 네 책임이야!”
“책임져 줄게!”
“그럼 죽으러 가야지…!”
카르티의 양팔이 내 몸을 안아들었다. 이를 악물고, 그대로 골렘의 손바닥에서 뛰쳐내려 몸을 날렸다.
콰아, 아아, 아앙.
꼬리질 단 한 번에, 심혈을 기울여 구축한 골렘의 몸뚱이가 산산히 흩어지는 것이 보였다.
다만 몇 걸음, 그리고 이 높이. 오로지 이 지점을 확보하기 위해 저 골렘은 태어났었다.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
기합이라기보단 비명에 흡사한 소리를 지르며 공중에 높이 솟구쳤던 카르티의 몸이, 두 발이 점점 드래곤의 등에 가까워졌다.
착지한 순간, 거의 구르듯이 착지의 충격을 죽여야 했다. 그녀의 팔에 안겨 있던 나도 마찬가지로, 데굴데굴 드래곤의 등 위를 굴렀다.
“악, 학… 살아있, 지…!”
“아직 안 죽었… 로제, 위!”
순간 뒷목에서 스치는 섬뜩한 감각. 온몸이 굳어지며 저리듯한 느낌이 체온을 훅 떨어뜨렸다. 어깨를 무겁게 짓누르는 느낌을, 나는 알고 있다.
태양을 등진 검은 그림자가 용의 머리에서부터 뛰쳐들어서, 칼을 내리꽂았다.
정확하게, 아직 엎드려있는 나를 향해서.
“로제!”
일단 몸을 다시 굴려 칼날을 피해냈다.
뒤쫓아오는 횡베기는 겨우, 방어 주문을 잽싸게 짜내어 막아낼 수 있었다.
“…하아, 하아, 하아….”
어디에 갔나 했더니.
줄리아 다리에서… 전사장 돌프를 순식간에 베어버린 검은 갑옷의 검사. 그가 여기에 나타났다. 이번에는 드래곤의 편이 되어서.
칼끝이 내 머리 위로 휘둘러진 순간, 그 검은 갑옷의 검사가 누구인지 싫어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이 일련의 상황이 어떻게 일어났는지도, 겨우 조금씩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목소리는 뒤틀렸다. 불길에 탄 것처럼.
목소리는 얼룩졌다. 핏물에 물든 것처럼.
목소리는 들끓었다. 분노에 몸을 맡긴 것처럼.
목소리는 음산했다. 심해에 가라앉았던 것처럼.
“…정말로… 손이 많이 가는 계집이군, 너는”
얼굴을 전부 덮은 투구를, 검사는 벗었다. 내동댕이쳤다.
한쪽 얼굴을 끔찍하게 덮은 그 화상의 이유를, 나는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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