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2화 〉 2 9 / 베어링턴에서 가장 긴 하루 (3)
* * *
(3)
그 한순간, 베어링턴의 모든 소리가 멎은 듯이 사라졌었다.
골렘의 주먹이 드래곤의 아래턱을 후려쳤다. 크게 꺾이는 목 안에서 한껏 부풀었던 숨결이 두서없이 유폭하는 소리가 뒤이어 사방에 울렸다.
잡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해버릴 만큼 거대한 소리가.
“드래곤이…”
“떨어진다!”
공중을 지배하던 드래곤의 거체가 휘청거렸다. 폭군의 날개가 당혹한 듯 퍼덕이고, 왕관처럼 뻗친 뿔이 젖혀진 머리 탓에 바닥을 향했다.
캬아아아악!
날카롭게 째지는 소리와 함께 드래곤의 몸이 균형을 잃고 바닥에 쓰러졌다.
그와 동시에 겨우겨우 버티던 골렘이 허물어지면서 쿨럭, 다시 한번 입 안에서 피가 불거져손을 적셨다.
‘얕았어…!’
그러나 얕았다.
분명 아래턱을 제대로 노려 후려쳤다. 하지만 드래곤은 아직 완전히 포화하지 않은 브레스를 뿜는 것으로 골렘에게 반격했었고, 몸을 뒤로 던지는 것으로 피해를 크게 줄였다.
제대로 때린 것처럼 보였던 골렘의 주먹은 위력이 크게 깎여, 그저 드래곤을 땅에 떨어뜨리는 정도로 그쳤을 뿐이다.
“떨어졌다! 전부… 달려들어라! 드래곤을 죽여!”
하지만 사기를 진작시키는 데에는 충분한 효과가 있었다.
숨결에 그을렸던 시가지의 건물 몇 채를 무너뜨리며 추락한 드래곤이 잔해 위에서 비슬거리자, 이제껏 주춤거렸던 모험가들이 용기를 얻어 일제히 드래곤에게로 몰려들었다.
그 선두에 프레드릭 바츠 경. 그리고 한 발자국 못 미쳐서 늑대원숭이가 깨진 잔해를 밟고 뛰어들었다.
“날개를 노려라! 놈이 다시 날기 시작하면 그 뒤는… 걷잡을 수 없다!”
프레드릭 바츠 경의 목소리가 높게 울려퍼져 흥분에 휩싸인 모험가들의 머릿속에 강하게 파고들었다. 이쪽은 거대한 골렘을 조종했던 반동으로 지팡이를 쥔 손에 힘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은 채로 바들바들 떨릴 지경이다.
“페리링… 치유, 치유 좀 부탁… 해….”
제 코로 맡을 수 있을 정도로 내뱉는 말과 숨에 피냄새가 잔뜩 끼었다.
눈앞이 흐려졌다가, 다시 조금 분명해졌다가 흐려지기를 반복했고, 동시에 마나맥이 과열하여 타는 듯이 뜨거웠다.
지금 뱃속에서 우글거리는 욕지기를 뱉어내면 먹은 게 아니라 죽은 피가 나올 것 같아 무서울 정도로.
“로즈 씨… 조금만 쉬세요.”
“그럴 시간이 없… 잖아. 얼른 치유부터 해 줘.”
드래곤을 땅에 떨어뜨리긴 했지만 그걸로 내 역할이 끝난 건 아니다.
아직 해야 할 일이 있는 이상 주저앉아서 쉴 수가 없었다. 지금 주저앉아버리면 일어나지도 못할 것처럼 맥이 탁 풀릴 것만 같다.
“야, 너….”
페리링의 치유 주문이 몸에 스며들어 아주 조금 호흡이 편해졌지만 여전히 숨을 들이마시고 내쉴 때마다 숨통에 가시가 박힌 것처럼 따끔거렸다. 카르티가 안절부절못하는 것이 흐릿하게 보였다.
“난… 괜찮, 아.”
이 말이 허풍이라는 걸 나도 알고, 카르티와 키르케, 페리링도 알겠지.
하지만 조금이나마 움직일 수 있을 것 같았다. 달달 떨리던 팔에 천천히 힘이 돌아왔다. 언뜻언뜻 붉었던 시야도 차츰 제 색을 되찾았다.
[이… 버러지, 같, 은 것, 들이…!]
분노한 드래곤의 포효가 울려 퍼진 순간, 앓는 소리만 하고 있을 수만은 없다고 생각한 탓이 컸다. 억지로 몸을 일으켜세우고 머리를 들어 벌어지고 있는 상황을 보았다.
“죽… 엇! 죽으란… 말이다!”
드래곤의 콧잔등으로 달려든 용감하되 운은 없는 검사가, 드래곤의 턱에 물려 마구 휘둘러지는 모습이 보였다.
만용의 대가는 컸다. 사람의 상반신만한 이빨 사이에 붙들린 검사는, 고통보다도 공포에 휩싸여 마구잡이로 칼을 휘둘렀다.
그러나 그 칼마저 이빨을 부수지 못하고 부러진 순간, 그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비명을 지르는 것 뿐이다.
“으아아아악…! 사, 살려, 살려, 살…!”
끔찍한 광경이었다.
끊어진 상반신이 허공에 피보라를 흩뿌리면서 털퍼덕하고 떨어졌고, 아직도 숨이 끊기지 않았던 몇 초를 고통에 몸부림치던 몸뚱이에서 겨우 목숨이 멎었다.
“빈란도! 빌…어먹을! 씨바알!”
묵직한 전투도끼를 쥔 거구의 남자가, 방금 죽은 검사의 것인 듯한 이름을 부르며 드래곤의 흉근을 전투도끼로 후려쳤다. 되튕겨나오는 도끼날을 몇 번이고 후려쳐도, 단단한 비늘을 뚫지 못하는 사이 드래곤이 천천히 비슬거렸던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어어어, 하고 개미처럼, 모험가들이 드래곤의 몸에서 굴러떨어지기 시작했다.
“…비켜나시오!”
늑대원숭이의 몸이 마치 허공을 밟는 것처럼 도약했다. 스르릉, 하고 맑은 소리를 내며 이제껏 한 번도 뽑지 않았던 태도(太?)의 날이 칼집에서부터 드러났다. 노리는 것은 한껏 펼쳐진 드래곤의 왼쪽 날개죽지.
“풍월운룡류(風月雲??) 6형…”
공중에서 화살처럼 쏘아지면서, 칼끝은 오른쪽 하단에 두고,
칼날이 왼쪽으로 비스듬이 허공을 그어올렸다.
“작(?), 열풍(?風)!”
[캬아오오오!]
칼끝이 닿지도 않았건만, 사방에 핏방울이 난자했다.
굵은 핏덩어리가 마구 튀어 바닥에 흩어졌다. 크게 찢긴 드래곤의 날개에서부터 비어져나온 핏물이었다. 코가 썩어버릴 듯한 지독한 냄새와 독기가 사방에 흥건했다.
“로제…!”
이쪽으로 날아오는 핏덩어리는, 말 그대로 살아있는 맹독 슬라임과도 같았다. 아직 움직일 수가 없는데…!
카르티가 몸을 날려 왼팔에 끼운 방패로 핏덩어리를 받아내고 튕겨냈다. 치이익… 금속이 타들어 가는 역한 냄새가 머리를 지끈거리게 했다. 이쪽으로 날아오던 핏덩어리가 몇 걸음 옆의 바닥에 떨어진 뒤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꿈틀거렸다. 토악질이 나올 정도로, 징그러웠다.
“‘고든하누달’이….”
늑대원숭이가 바닥에 착지하면서 제 칼을 내려다보았다.
직접 닿지도 않은 칼날이 크게 상했다. 드래곤의 날개를 크게 베어내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그 대가는 전혀 가볍지 않았던 모양이다.
[나를, 나를… 얕보지, 마, 라!]
포효를 내지른다.
그저 소리를 지른 것뿐인데 사방에 들이친 충격파가 땅을 뒤흔들고, 건물을 수수깡처럼 와르르 무너뜨렸다. 귀가 먹먹해지기보다는, 심장이 경련하는 것처럼 쓰라려온다.
“젠, 장… 저거 정말로… 죽일 수는 있는 거야?”
독룡 무슈마헤트… 비록 한쪽 날개가 크게 상했지만 이젠 네 다리로 땅을 짚은 그 입에서 열기가 부들거렸다. 지상에 끌어내리고, 날개 하나를 베어내긴 했지만… 앞서 스쳤던 처음 생각이 무색하게, 잡을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아….
[전부, 전부! 깡그리 타 버려라!]
광기와 분노에 미친 드래곤의 입에서 고함과 함께 증오가 들끓었다.
공기가 급격하게 덥혀지는 느낌. 목이 부풀어오르면서 벌어진 턱 안쪽에서 이글거리는 파괴가 보였다. 브레스가, 온다!
이 이상 우물쭈물하고 있을 틈이 없다.
“키르케!”
“벌써 이걸 쓰면 나중에 어떻게 하려고!”
“살고 봐야 할 거 아냐!”
으득 하고 이를 깨물고는 키르케가 로브 안쪽에서 큼지막하고 거뭇거뭇한 발톱 조각을 꺼냈다. 바람의 정령왕, 늑대 루드라에게서 받아온 발톱 조각이다. 머리 위로 들어올리고, 늑대의 소리를 높이 울린 순간, 베어링턴에 때아닌 폭풍이 몰아쳤다.
처음에는 몰려드는 구름, 그리고 그 구름이 내달리는 네 개의 굵직한 다리로 변했다. 마지막으로, 거대한 늑대의 희끄무레한 형상이 이를 드러냈다.
[폭풍사냥꾼… 루드라!]
완충시킨 브레스를 쏘아내면서, 벽력처럼 무슈마헤트가 그 이름을 불렀다.
루드라의 화신, 이라고 해야겠지. 구름으로 된 늑대 정령이 캬악, 하고 날카로운 위협음을 내면서 브레스를 몸으로 받아냈다.
[정령왕인 네놈이… 왜, 여기에… 있느냐!]
발톱이 땅을 강하게 붙들고, 부풀린 구름 모피가 마구 깎여나가면서도 늑대는 결국 쏘아지는 불길을 버텨냈다. 시커멓게 그을린 반투명한 몸뚱이가 고통스러운 듯이 비틀거렸다.
뜻이 담겨있는지는 알 수 없는 울음소리로 비통한 무슈마헤트의 질문에 답한 늑대가 턱을 벌리고 달려들었다. 한달음에 거리를 좁히고 물어뜯은 용의 목에서, 잘게 찢긴 파편과 핏덩어리, 비명이 연달아 새었다.
[네, 노, 오오옴!]
앞발이 휘둘러졌다. 그 많은 모험가가 집중해서 공격했어도 상처다운 상처를 내지 못했던 드래곤의 몸뚱이가 피를 흘리고 있었다. 분노에 찬 앞발이 늑대를 직격한 순간, 물고 있던 목에서부터 늑대의 몸뚱이가 고통스러운 발버둥과 함께 뒤로 튕겨나갔다.
[사, 라져…라!]
드래곤의 주변에 빛이 무늬를 그렸다. 빙빙 돌아가는 원을 중심으로 허공에 짜여진 마법진에 마력이 과포화된 순간, 그 마력은 시전조차 필요없는 마법으로 화했다.
맹독을 머금은 마력포가 거푸 늑대를 노려 땅을 후려쳤다.
바닥에 커다랗게 크레이터가 벌어진 채로 녹은 땅이 죽은 듯이 시커멓게 물들어 부글거렸다. 저런 것에 맞았다간… 그야말로 시체조차 남기지 못할 게 분명하다.
[내 피의 종복들이여… 일어나라!]
사방에 튀겨진 무슈마헤트의 피가 일렁였다.
마치 꼬마가 어설프게 갖고놀다 버린 찰흙 인형처럼 눈코입도 없이, 그저 머리와 사지만 붙은 인간형의 핏덩어리가 스멀거리면서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블러드 골렘이다! 응전하라!”
길드마스터 핸슨의 구령이 울려퍼졌다. 블러드 골렘… 피의 괴물들이, 드래곤을 공격하다가 땅에 떨어진 모험가들과 그들을 치유하는 이들을 둘러싸면서 포위망을 좁혀오고 있었다. 수적 우위로 밀어붙인다는 길드의 작전마저 반쯤 무용지물이 된 순간이었다.
그르르륵, 하고 루드라의 화신이 땅에 착지한 채 몸을 겨우 버티어 섰다.
구름으로 된 몸의 여기저기가 독 마법에 물들어 흩어지는 가운데, 가쁜 숨을 힘겹게 몰아쉬는 그 모습은 불러냈을 때의 기세가 이미 한껏 꺾여있었다.
[짐승… 이방의 검을 든 자… 그리고 창을 쓰는 자….]
무슈마헤트가 낮게 읊조렸다. 드래곤의 눈이 루드라의 화신과, 늑대원숭이와… 그리고 다른 쪽을 바라보았다. 저쪽은…
‘…키에리가 있는 쪽인데…?’
[그때와… 그때와 같구나, 암습으로 내 몸을 쓰러뜨리고… 내 아이를 훔친 놈들과 같아…! 그때처럼, 내가 허무하게 당할 성싶으냐!]
캬아오오오.
비통과 한탄, 분노와 증오. 그 모든 것이 뒤엉켜 광기.
미쳐버린 드래곤이 울부짖었다.
[내 독으로, 내 피로, 내 이빨과 발톱으로 전부… 전부 죽여주겠다! 이 땅을 시작으로, 내 아이를 해친 이들이 단 하나도 남지 않을 때까지… 전부 죽이겠다!]
“그건 아무래도 좀 곤란하네요, 가엾은 무슈마헤트.”
어?
머리 위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순간 나와 키르케의 얼굴이 하늘을 향했다.
그리고 지금의 상황도 잊고 멍해졌다.
급하게 하늘을 가로질러 날아오고 있는 저건… 비행선?
큰까마귀 호… 라고? 아니, 그보다도 더 놀라운 광경이 하늘에 펼쳐졌다.
하늘을 뒤덮을 듯이 거대한 마법진이 펼쳐졌다.
가운데의 원을 중심으로, 주문을 짜넣고, 조건을 넣고, 마력 회로를 증설하고, 다시 영창을 얽어넣어 촘촘하게 자아낸 마치 태양처럼 빛나는 마법진. 저런 게 가능한 사람이, 이 나라에 몇이나 될까.
[네, 년, 은!]
그 목소리에 무슈마헤트조차 움찔거리며 동요했다.
비행선, 큰까마귀 호의 갑판에 서서, 그녀는 지팡이를 하늘 높이 겨눈 채로 지상을 내려다보았다. 일대의 마나와 에이트(Eitr)가, 그녀의 마법에 반응하여 웅웅거리는 소리가 폭풍처럼 휘몰아쳤다.
“「불꽃은(이그니스)…”
주문, 해방.
“…유성과 같이(미티우룸)」!”
쏟아져 내린다. 유성우가.
지상을 뒤덮은 피의 괴물을 정확하게 타격하는, 말도 안 될 정도로 정확한 마법 포격이다.
하늘을 덮은 거대한 마법진으로부터, 불덩어리가 거푸 쏟아졌다.
불덩어리에 직격당한 용의 피로 짜여진 골렘이, 그대로 탄화되어 쓰러져 흩어졌다.
“헤카이트…”
“당주님!”
‘횃불의 마녀’, 그녀가 와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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