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1화 〉 2 9 / 베어링턴에서 가장 긴 하루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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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숨이 턱에 닿을 정도로 뛰어온 전령의 보고는 그 자리에 있던 모두를 아연하게 만들 정도의 파괴력을 갖고 있었다.
봉화대가 있었던 감시탑에서 피어오르는 연기가 사실은 봉화가 아니었다. 감시탑 그 자체가 드래곤의 꼬릿짓에 무너져 불타오른 흔적이라고.
“각자 위치로!”
길드마스터 핸슨의 구령이 높게 울려퍼졌다. 막상 드래곤이 나타났다는 소식을 접한 모험가들의 머릿속에 구령보다 빠르게 공황이 번져가지는 않을지가 염려되는 순간이었다.
“각 조의 조장은 인원을 통솔하라!”
“도망쳐봐야 죽는다고, 이 새끼들아!”
여기저기서 소란이 일었다. 악으로 공포를 이겨내려는 사람, 서 있는 것이 고작인 사람, 아무 생각도 하지 못하고 결국 도망치려다 붙들린 사람… 주변은 마치 혼돈이 꽉꽉 들어찬 가마솥과도 같았다.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하늘이 어두워졌다.
‘구름…?’
아니, 구름이 아니었다.
터무니없이 거대한, 거대한, 거대한… 날개였다.
하늘을 가리고, 태양을 가릴 듯 펼쳐진 날개였다.
“…여신이시여….”
옆에서 루시탄이 멍하니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그 파란 눈동자가 바들거리는 것을 본 순간, 그 뺨에 손을 휘둘렀다. 짜악, 마른 소리가 울리고, 손바닥이 화끈거렸다.
“정신 차려!”
네가 정신줄 놓으려고 하면 어쩌자는 거야!
물론 나도 정신줄 놓을 뻔한 일 많았지만… 너만큼은 그러면 안 된다, 그런 생각이 손을 움직이게 만들었다.
다행히 손찌검 한 번에 가성비 좋게도 루시탄의 눈이 공황에서 원래대로 돌아왔다.
“…미안. 술라… 가 변신한 것을 몇 번 본 적이 있어서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렇지만도 않았어.”
“정신줄 똑바로 잡아. 안 그러면 진짜 여신이 어떻게 생겼는지 보게 될 테니까.”
변명처럼 주섬주섬 주워섬겼지만, 지금은 그러고 있을 때가 아니다.
술라가 변신한 드래곤은 분명 압도적이지만 지혜롭고 현명하면서도… 뭣보다 늘 우리 편이었다. 하지만 하늘에 떠 있는 저 드래곤은 다르다.
저것은 분노에 미쳐버린 드래곤이고, 저걸 막지 못하면 여기 있는 모두가 전부 죽는다.
지금은 오로지 그것만 생각하자. 오로지… 지금 여기에서 살아남을 방법만을.
[죽인… 죽일 테다… 전부, 죽여줄, 테다…!]
목소리?
아니, 귀가 아니라 스멀거리며 머릿속에 파고드는 목소리는 자기도 모르게 귀를 막아도 생생하게 두개골 안을 메아리치는 것만 같았다.
오로지 소리와 분노만이 가득한 드래곤의 포효에, 베어링턴의 모두가 잠시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아가, 내… 아가, 내 아가… 죽게 한 것들, 전부… 여기에 있다! 전부, 전부 내 불로… 태워버리고, 내, 독으로… 썩어문드러게… 해 줄 것이란 말이다!]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그녀는 망가져 있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로서는 그 분노에 공감할 수가 없었다.
제 배로 낳은 자식을 버리는 어미가 있는가 하면, 제 배로 낳지도 않은 자식의 죽음에 저렇게까지 분노해서 미쳐버릴 수도 있다는 것을… 나는 이해하기 이전에, 인정할 수가 없다.
인정할 수가… 없다고!
으드득, 이를 깨물었다. 아득히 높은 곳에 있는 드래곤을 올려다보았다. 무슈마헤트. 그저 그런 기분이 들었던 것에 불과했지만… 드래곤 또한 나를 보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야, 로제이아.”
그때 어깨를 거세게 붙들고 흔드는 손이 있었다. 퍼뜩 정신을 차렸다.
조금 거칠어진 숨과 뺨에 번진 땀. 지팡이를 쥔 손이 바르르 떨고 있음을 겨우 의식할 수 있었다.
“저거… 진짜로 잡을 수 있을까?”
“잡아야지. 뭔 소리를 하고 있어.”
평소에는 자신감 넘치는 카르티라도 이 상황에서는 기가 질릴 수밖에 없었던 모양이다. 이해한다. 이유 모를 열이 뻗치고 화가 치솟는 상황에서도, 동시에 바닥에 쓰러져버릴 것 같은 공포가 다리를 붙들고 있었으니까.
“…온다!”
아득히 높은 곳에서 펄럭이고 있던 용의 날개가 확 접혔다. 마치 하늘에서 쏘아져 오는 화살처럼 지상을 향해 곧게 내리꽂혀오는 용의 머리, 이글이글 타오르는 두 눈이 확 가까워졌다.
“브레스가 온다, 피해!”
다리가 움직인 것은 생존본능의 발로였다.
프레드릭 바츠 경의, 울림이 실린 목소리가 겨우 몸을 움직이게 했고, 용의 정면에서부터 몸을 피해 건물 사이로 날렸다.
골렘이 몸을 일으켰다. 길바닥의 포석으로 만들어진 골렘이 양 팔을 넓게 펼치고 머리 부분의 돌을 흔들면서 쿵, 쿵 다가오다가…
“머리 숙여!”
조금 높은 곳에서 독기 서린 불길이 쏟아져, 순식간에 잿더미로 변해버리고 말았다.
등골이 오싹해지는 순간이었다. 불에 조금이라도 견뎌주길 기대했던 바위 골렘이 브레스에 스친 것만으로 저렇게… 무력하게 바스라질 줄이야.
발리스타로 드래곤을 맞춰 떨어뜨린다고?
저걸 노리고 맞춰야 한다니, 애초에 작전이 매우 글러먹었다!
“발사!”
한차례 불을 뿜고 지나간 드래곤이 다시 날개를 퍼덕여 도약한 순간, 그 펼쳐진 날개를 향해 굵직한 발리스타의 화살이 날아들었다. 드래곤의 목이 커다랗게 부풀어오르고, 피부 아래에서 불덩어리가 이글거리는 것이 보일 정도로 빛이 퍼졌다.
캬아악!
괴성과 함께 쏘아낸 불길이 발리스타의 화살을 깡그리 태워버리고, 그 경로상에 있던 발리스타가 불타올랐다. 거기에 있었던… 운 없는 병사와 함께.
“으아아아아아악!”
불에 휩싸인 병사의 단말마가 아주 짧게 울려퍼졌다가, 채 1초도 지속되지 못하고 그대로 쓰러졌다. 시체조차 남지 못한 참혹한 죽음이었다. 모골이 송연해지는 광경에 할 말을 잃었다.
“세상, 에….”
일전에 술라가 드래곤으로 변해 배를 불태우는 것을 본 적이 있다.
그때의 기억을 되살려보면… 그가 당시 얼마나 자신의 힘을 억제했었는지를 새삼 깨닫게 된다. 마음만 먹었으면 그깟 배쯤 불살라버리는 건 일도 아니었을텐데.
“발리스타는 이미 틀린 것 아냐…?”
옆에서 카르티가 멍하게 중얼거렸다. 건너편 건물에서는 루시탄과 프레드릭 바츠 경이 드래곤을 노려보고 있었다. 3대 중 1대의 발리스타는… 이제 두 번 다시 쓸 수 없는 꼴이 되어버렸다. 남은 두 대마저 당해버린다면, 정말로 그때는 손쓸 도리가 없을 것이다.
“…작전을 좀 바꿔야겠어. 놈이 노리는 건 일단 나니까….”
“야, 너 대체 지금 무슨 생각하는 거….”
조금 조용히 해 봐. 생각을 짜 맞추고 있으니까.
침을 꼴깍 삼키고 머릿속으로 될지 어떨지 이론을 짜 맞췄다. 일단 생각하는 건… 이전에도 했었던 적이 있다.
물론 그때는 단 3초도 버티지 못했지만, 지금은… 어떻게든 될지도 모르겠다. 허리춤에 매달린 드래곤의 심장을 잘 활용하면.
“키르케! 페리링!”
하지만 역시 혼자서는 무리일 것 같다.
마법사의 도움이 필요해서 두 사람을 소리쳐 불렀다. 드래곤이 불을 뿜고 지나간 불길 너머에서 대답이 들려왔다.
“이쪽으로 올 수 있겠어?!”
“말이 되는 소릴… 윽, 해! 지금 움직였다간… 바로 마법사 통구이야!”
키르케의 앙칼진 대답이 돌아왔다.
그 말 그대로, 아직도 드래곤이 활공하고 있는 동안 함부로 불길을 가로지를 수가 없을 것 같다. 어떻게 하면 좋을지, 정말로…
“시선을 끌 테니까, 곧바로 와서 도와줘!”
“뭔 수로?!”
일단 저질러놓고 알아서 와주길 기대할 수밖에 없다.
한 손에는 드래곤의 심장을, 다른 손에는 가브롤의 지팡이를 쥐었다.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언젠가 마법사 시험에서의 감각을 돌이켰다. 마나맥을 쥐어짜내고, 모자란 부분은 드래곤의 심장에서 조달해낸다. 들썩거리는 낯선 마력이 몸을 경유해 지팡이에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일어… 나… 라!”
부글부글, 속이 들끓는 기분이 확 퍼지면서, 동시에 드래곤의 불길에 그을린 땅이 흔들렸다. 불타 무너진 건물과 도로가 뒤엉키고, 뭉치고, 일그러지면서… 거대한 발이 바닥을 딛었다. 뒤이어 다리가 이어지고, 뭉툭한 몸과 팔이, 그리고 눈코입이 없는 머리가 부풀어올랐다.
그때는 헤카이트 당주가 소환해낸 고대 미궁을 재료로 써먹었고, 지금은… 드래곤의 불에 타버린 거리를 재료로 골렘을 일으켜세운다. 설마, 나중에 변상하라고 하진 않겠지!
“윽… 학, 장난, 아니… 야, 도와줘…!”
몸을 일으킨 거대 골렘은 약 8m쯤. 굵직하고 뭉툭한 손을 내뻗으면서 금방이라도 무너지려는 몸을 위태롭게 바로 세웠다.
조금이라도 정신을 놔버리면 그대로 골렘이 무너질 것 같아서 바들거리는 가운데, 독기 짙은 날숨을 내쉬고는 골렘에게 명령을 내렸다.
“움직… 여!”
쿠우웅.
거대 골렘이 발을 크게 굴러 바닥을 딛었다. 둔하고 무거운 몸이 비틀거리면서 걸음조차 힘겨웠다. 피가 타버리는 것 같았다.
[이… 하찮은… 것이!]
하지만 적어도 드래곤의 시선을 끄는 데는 성공했다.
푸화아아악, 벌어진 아가리에서 유독한 불길이 쏟아진 순간, 골렘이 양팔을 들어 불길을 받아냈다. 검은 연기가 치솟았다.
[이… 놈… 이!]
탄화된 양 팔이 재가 되어 흩어졌지만, 골렘은 양팔을 잃은 그대로 쿠웅, 쿠웅, 쿠웅… 걸음을 옮겼다. 동시에 바닥에 이어진 포석에서부터 돌을 끌어모아 제 팔을 복원시켰다.
“컥…!”
물론 그런 자기회복이 공짜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내장이 찢기듯한 복통이 한순간, 그리고 배 안쪽에서 뭔가가 역류하듯이 솟구쳐왔다.
웩 하고 뱉어내고 나니 시커멓게 죽은 핏덩어리가 슬라임처럼 꿈틀거렸다.
“야, 너….”
“로즈 씨!”
골렘이 드래곤의 불길을 받아내는 사이 이쪽으로 달려온 키르케와 페리링이 양쪽에서 어깨를 붙잡았다. 학, 학… 숨에서부터, 스스로도 알 수 있을 정도로 피냄새가 번져있었다. 어질어질한 머릿속 탓에 눈앞이 노래졌다.
“정신 똑바로 차려! 뭐라도 해 봐, 하프엘프!”
“잠깐만… 기다리세요!”
페리링의 치유가 몸에 스며들었다. 비지땀이 조금 멎고, 호흡이 편해졌다.
겨우 얼굴을 들어올리니, 골렘이 무방비하게 드래곤의 공격에 휘둘리고 있는 게 보였다.
“조금… 만, 더…”
충분히… 거리가 가깝지 않다.
브레스로 농락하는 것보다는 육탄전을 벌이도록 유도해야 한다. 혀끝을 꾹 깨물었다. 아릿하게 배어나는 통각과 피맛이 정신을 불러깨웠다.
무슈마헤트가 숨결을 뿜어내기 위해, 한번 더 목을 부풀리는 것이 보였다.
“지금이다…!”
숨결을 내뿜기 위해 깊게 숨을 들이마시는 한순간의 준비동작.
골렘이 아주 조금 다리를 웅크려 몸을 숙였다가, 그대로… 수백 톤을 가볍게 헤아릴 바윗덩어리가 바닥을 딛고 솟구쳤다. 드래곤의 눈이 확 커지는 것이 보였다.
[크, 아아, 악!]
뭉툭한 팔이 그대로,
드래곤의 아래턱을 후려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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