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커스텀 로즈-110화 (110/157)

〈 110화 〉 2 ­ 9 / 베어링턴에서 가장 긴 하루 (1)

* * *

(1)

이 나라에서 가장 강한 검사와 이 나라의 왕자.

그 존재만으로도… 모여든 모험가들의 사기는 어느 정도 끌어올릴 수 있었다.

“…연설은 그다지 익숙하지 않아.”

“수고했어.”

설혹 드래곤의 모습을 보자마자 모래성처럼 무너져내릴 뿐인 사기라도 할지라도, 지금 당장 이 자리에 묶어놓는 데에는 나름대로 도움이 되겠지.

연단에서 내려온 루시탄은 투구를 써서 얼굴을 감추곤 길드 뒤편으로 빠져나갔었다.

뒤를 쫓아서 가보니 루시탄은 혼자 있었고, 투구 틈새 사이로 볼멘소리를 내는 게 퍽 녀석답다고 해야 할지.

근처에 놓여있는 벤치에 나란히 앉아선 아직 아무 징후도 보이지 않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조금 흐리긴 하지만 드래곤이 나타날 조짐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사실 아직도 실감이 나질 않고, 그냥 누군가의 기우이길 하는 마음이 있다.

“너, 자신은 있는 거야?”

“작전이라면 어제 말해줬잖아.”

“그게 네 생각대로 흘러갈지를 물어보는 거라고.”

루시탄이 턱짓으로 내 허리께를 가리켰다.

페리링이 왕도에서부터 가져와 내게 전해준… 이 사태를 풀 수도 있는 비장의 카드.

헝겊으로 감싸인 채 은은한 붉은빛을 흘리는 그 물건에 루시탄의 시선이 모였다.

“…모르겠어. 제대로 먹힌다면 작전대로 될 것이고 아니면 나는…”

죽겠지.

그 마지막 말 한마디는 목에 걸려서 나오질 못했다.

루시탄이 손을 뻗어 내 어깨에 얹고 토닥였다.

“잘 될 거야. 너, 엄청 질기니까 드래곤이라도 잡아먹지 못할걸.”

“그거 퍽 안심이 되네요, 왕자님.”

그것도 응원이라도 하는 건지. 피식 웃고는 허리띠에 매달린 물건을 헝겊에서 풀어내었다.

반질반질한 표면에서 뿜어진 붉은빛이 말갛게 시야를 채우고 구석구석까지 빛이 뻗쳤다.

유리처럼 단단한 질감의 안쪽에서 맥동하는 열기 같은 것이 느껴졌다.

“드래곤의 심장…이란 말이지, 이거.”

“덜 자란 거지만. 만지진 마, 잘못 만지면 저주받아.”

루시탄이 홀린 듯이 중얼거리면서 손을 뻗다가, 내 말에 놀라 손을 내렸다.

그럴 수밖에 없다. 결정화된 드래곤의 심장은 마법사는 말할 것도 없고, 그 누구라도 참기 힘든 유혹일 것이다.

손으로 감싸 만지고 있는 나도, 무심코 이 심장 안에 도사린 강대한 힘에 자칫하다가는 의식을 빼앗길 것 같은 모호한 마력을 느끼고 있었다.

“덜 자란 드래곤의 것이라도 한 방에 훅 갈 수 있으니까 조심해.”

나도 일단 손에 저주를 막아주는 효과의 장갑을 꼈고, 마력을 돌려서 보호하고 있음에도 찌릿찌릿한 독기가 느껴질 정도다. 무방비하게 만졌다간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알 수 없지.

“무서운 물건이네. 괜찮겠어?”

“그래도 쓰기에 따라선 아주 큰 도움이 될 거야. 쓰기에 따라선….”

입술을 깨물고는 다시 헝겊을 둘러서 붉은빛을 감추었다. 장갑의 손바닥 부분이 마치 그을린 것처럼 시커멓게 물들어 있어서, 조금 오싹한 기분이었다.

“…아무튼 지금은 여기에 걸어볼 수밖에.”

생각만큼 잘 되기만 해 준다면…

불안한 마음에 입술을 꾹 깨물면서 초조하게 시선을 돌렸다. 멀리에서부터 보이는 광장의 마법 시계는… 아침 9시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장미 씨!”

약간 높게 울리는 목소리와 더불어 저벅거리며 다가오는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순간 흠칫 놀라는 마음에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조금 얼굴에서 딱딱하게 굳히던 긴장이 아주 조금… 풀리는 것 같다.

“웬즈데이, 그리고….”

웬즈데이의 뒤로 다가오는 이들의 낯은 무척 익었다.

아니, 낯이 익다고만 표현하기에는 조금 실례일 정도의 연이 있다고 해야겠지.

“카르티, 센 씨, 늑대 씨.”

카르티와 센, 늑대원숭이가 왔다.

뭘 하느라 이렇게까지 늦었나 싶었는데 어쩐지 늦게 온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두 사람이 본 적이 없었던… 새로운 장비를 착용하고 있었던 탓이다.

늑대원숭이는 죽 사용했었던, 허리에 차고 있던 검이 아니라 줄곧 등에 지고 있었던 커다란 칼을 칼집째로 손에 쥐고 있었다. 지금까지는 몰랐었는데 얇은 사슬로 칭칭 감겨서 뽑을 수도 없도록 잠가놓았다. 무언가… 비장의 무기쯤 되나? 그리고…

“어때? 로제. 나, 좀 강해보이냐?”

“음… 어, 새 장비가 잘 어울리네, 카르티.”

늑대원숭이보다는 훨씬 극적인 변화를 보인 카르티의 장비.

탄탄하게 단련된 온몸을 단단하게, 빈틈없이 조이는 새 갑옷은 카르티에게 썩 잘 어울렸다.

호사스러우면서도 막눈으로 봐도 카르티에게 완벽하게 맞춘 실용미를 느낄 수 있다. 미늘갑옷처럼 보이는데, 내 눈에는 재질을 모르겠더라.

거기에 왼팔에는 팔의 움직임에 거슬리지 않을 정도의 크기의 버클러와 오른손에 쥔 긴 창이 한 자루. 카르티도 꽤 마음에 들었는지, 드래곤과의 일전을 앞두고 있음에도 더할 나위 없이 흥분해 있었다… 이 녀석도 결국 케라우노스 씨가 기른 아이란 말이지.

“갑옷이고 창이고 방패고, 몸에 기분 좋게 딱 맞아. 가볍고 튼튼하고… 이야, 스승은 역시 한가락 한다니까. 단 며칠 만에 이렇게… 나한테 맞춤 장비를 만들어주다니.”

“원래 내가 갖고 있던 것을 네게 맞게끔 조정을 한 것뿐이야. 뭐 그것만으로도 시간이 좀 필요했지. 늦지 않은 게 다행일 정도로.”

의외로 죽이 잘 맞는 제자와 스승이 서로 공치사를 주고받는 것을 보니, 조금 나도… 어쩌면 오늘을 무사히 넘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이런 녀석들과 함께라면… 드래곤이든 뭐든 이겨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아니, 긴장하지 않으면 안 된다.

어흠 하고 숨을 내쉬어 주의를 내 쪽으로 모으고는 살짝 떨리는 목소리를 냈다.

“아무튼…. 작전은 말해준 그대로야. 용이 하늘을 날고 있는 한은 싸울 수조차 없어.”

모든 작전의 전제는 용을 지상으로 끌어내린다는 데에 있다.

베어링턴의 상공에서 드래곤, 무슈마헤트가 독과 불을 쏟아붓는 것을 반복한다면 속절없이 당할 수밖에 없다. 어떻게 해서든… 용을 지상으로 끌어내리는 것. 그것이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할 일이다.

“일단 성벽에 배치된 대형 발리스타가 3개 있어. 다른 나라의 이야기지만… 컬브랜드의 시조, 레굴루스 폴드라곤이 이끌던 용 사냥단도 이 대형 발리스타를 애용했다고 하더라고.”

루시탄의 말이었다.

이른바… ‘탐욕의 전쟁’ 당시, 두 패로 갈라진 용들의 싸움에서 인간 중 일부는 하늘을 날 수 있는 용들의 편에서 함께 싸웠고, 단단하고 완강한 갑각을 가진 지룡들을 상대할 때 그런 발리스타를 사용했다는 게, 루시탄의 설명이었다.

“다행히도 날 수 있는 용은 그 옛날의 지룡보다는 몸이 가볍고 비늘도 가죽도 억세지 않아. 발리스타를 맞히기만 하면 일단 하늘에서 떨어뜨릴 수는 있을 거야.”

“맞힐 수가 있다면… 말이지만.”

카르티가 허망하게 중얼거렸다. 드래곤의 브레스에 맞대응하기 위해 사용된 발리스타이니, 아마 브레스를 쏠 수 있는 사정거리까지 내려오면 발리스타의 사정거리도 확보될 거랜다. 문제는… 드래곤을 향해 침착하게 발리스타를 조준하고 쏠 수 있을지려나.

“발리스타를 맞혔다고 가정해도 문제야. 드래곤은 그 정도로 죽지 않는다는 거, 로제 너도 경험해봐서 알지?”

알고말고.

우루 늪지에서 싸웠던… 그 미성숙한 드래곤도, 케라우노스 씨의 최강 전격 마법을 맞고도 버틸 정도로 질겼다. 이제 상대해야 하는 고룡급이라면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을 터.

발리스타를 맞춘 다음의 작전도 필요하다.

“그 일은 미리 이야기한 대로 내가 맡으리다.”

칼집을 꽈악 힘주어 움켜쥔 채 늑대원숭이가 진중하게 입을 열었다.

그 일. 지상에 떨어진 드래곤이 다시 날아오르지 못하도록… 날개에 타격을 가하는 위험한 일이다. 그 역할을 맡겠다고 늑대원숭이가 나섰을 때는 다행스럽다는 생각과 불안한 생각이 동시에 들었었다.

“늑대원숭이라고 했던가. 바츠 경이 그대와 함께 드래곤의 날개를 공격하기로 했다.”

“그분의 위명은 들은 적이 있소. 공투할 수 있음을 영광스럽게 여기오.”

칼 프레드릭 바츠 경과 늑대원숭이.

두 사람의 호흡이 잘 맞을지는 알 수 없지만, 이 나라 최강의 검사라는 노기사와 용병 업계에서 전설적인 칼잡이로 알려진 늑대원숭이… 두 사람의 공격력에 기대를 걸 수밖에 없다.

“즈왈트 형씨가 빠진 게 좀 뼈아픈데 말야.”

“…어쩔 수가 없었어.”

나와 마찬가지로 즈왈트에게… 꽤 신뢰감을 보이던 카르티가 아쉽다는 듯이 투덜거렸고, 즈왈트가 여기에 참가할 수 없는 이유를 말해줄 수밖에 없었다.

“즈왈트는 지금 키에리와… 꼬맹이 토마스를 지키고 있어. 무슨 일이 생기면 둘을 들처업고 뛰어서라도 자리를 피해야 하는데 그러자면 즈왈트 말고는 선택지가 없더라고.”

즈왈트의 몸은 골렘이다. 여차하는 상황에서는 몸을 던져서라도 둘을 보호할 수 있겠지… 조금 미안하다는 생각은 하지만. 나중에 고쳐주면 된다는 건 좀 심한 처사인가.

“…그 꼬맹이가 험한 꼴을 당했다는 얘기는 얼핏 들었어.”

“제가 말씀드렸어요.”

설명할 필요가 없다는 건 좋네. 웬즈데이를 쓰다듬어주곤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이 한층 눅눅하게 무거워지면서 가라앉는 기분이었다. 안 돼, 이러면 안 되는데.

“그래서. 그 다음은…”

모두의 눈이 내게 향했다.

드래곤에게 발리스타를 맞춰 떨어뜨리고, 두 검사가 날개를 공격한다. 그 날개를 회복해 다시 날 수 있게 되기 전, 어떻게든 놈의 숨을 끊어야 한다.

하지만 아무리 지상에 떨어뜨렸다고 해도, 드래곤의 전투력이란 가볍게 상상을 초월한다.

이빨과 발톱은 수백 자루의 창칼에 맞먹고, 꼬리는 파성추처럼 억센데다 그런 괴물이 거대한 몸집을 육탄전으로 활용하기 시작한다면… 그야말로 재앙이 될 것이다.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서 드래곤이 날뛰지 못하게 억눌러 놓는 역할.

전에도 말했었지만…

“…그건 내가 맡겠어. 성공한다면 드래곤이 크게 빈틈을 보일 테니까… 그때 처리하면 될 거야.”

“…실패한다면?”

루시탄이 팔짱을 끼곤 아무렇지도 않은 척 툭, 말을 내뱉었다. 아무도 그 말에 먼저 대답을 재촉하지도, 채근하지도 않았다. 나도… 대답하지 않고 그저 옅게 웃었다. 도저히 입 밖으로 죽겠지, 라는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너…”

“루시탄.”

루시탄이 뭔가 말을 하려고 입술을 떼었을 때였다.

바츠 경이 평소답지 않은 몹시도 서두르는 걸음걸이로 다가왔다. 사뭇 혼란스러운 그의 표정이 모든 것을 말해주었기에, 또한 그에게 무슨 일이냐고 먼저 묻는 사람은 없었다.

“무슨 일입니까? 바츠 경.”

루시탄이 하려던 말을 마저 뱉지 못하고, 대신 바츠 경에게 물음을 옮겼다.

바츠 경은 회색 눈동자로 이 자리에 모인 이들을 모두… 한 번씩, 얼굴을 기억하겠다는 듯 찬찬히 바라보았다.

“방금 전, 성 외곽 북서쪽 감시탑에서 봉화가 올라왔습니다.”

한 호흡 쉬었다가, 다시 입을 여는 노기사.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모두가 긴장하며 기다렸던 말이자, 또 결코 듣고 싶지 않았던 말이기도 했다.

“드래곤이… 도착했습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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