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9화 〉 2 8 / 미쳐버린 드래곤, 무슈마헤트에게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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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아침이 밝았다.
점쟁이가 예고했던 드래곤이 오는 날. 어쩌면 내 두 번째 인생에서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아침이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꽤 심란했다.
“으… 속이 안 좋아. 머리 아파….”
미련 같은 건 없…을 리가 없지. 엄청나게 잔뜩, 있다.
여기에서의 두 번째 인생, 굴곡도 많고 험한 꼴도 잔뜩 겪었지만 그래도 즐거운 일, 좋은 일도 잔뜩 있었으니까.
손을 뻗어, 지금은 빈 침대 옆자리를 만져보았다. 녀석의 체온이 남아있는 것 같다.
이 침대에도, 그리고… 조금 머릿속이 뜨거워졌다. 이 안에도, 그 녀석이 남기고 간 흔적과 체온이 심장을 두근거리게 만들었다.
“…아무튼,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날이 밝았으니 이제 무서워하고 있을 시간도 없다. 조마조마해하는 시간마저도 아깝다.
아무리 발버둥쳐봤자 소용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발버둥이라도 치지 않으면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을 게 뻔해서, 벗어두었던 옷을 입고, 로브를 몸에 감았다.
“그럼 가볼까.”
자신에게 그렇게 다짐하듯이 되뇌인 뒤, 지팡이를 쥐고 방을 나섰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았던 베어링턴에서의 일상. 이제 여관을 나와 눈에 들어오는 길거리도 친숙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만약 오늘 살아남으면….”
그때는… 그래. 그 가게에 가서 라면을 한 번 더 먹도록 하자.
실없는 웃음을 띠면서 거리를 걸었다. 신발 아래 밟히는 포석이 무척이나 허무하게 느껴지는 아침이었다.
집결지는 모험가 길드.
나로서는 그다지 달갑지 않은 곳이었지만, 이번 베어링턴 방어를 위해… 모든 길드 소속원들에게 소집령이 내려졌다고 하더라. 큰길에는 바쁘게 내달리는 영병들이 무리를 이뤄 지나갔다.
“세기말 분위기 물씬이네….”
그러고보면 아무도 없이 혼자 길을 걷는 건… 얼마 만이지?
이 세계에 온 이래 좋든 싫든 주변에 사람이 한 명도 없었던 적은 없었던 것 같다. 하다못해 머릿속에서 재잘거리던 웬즈데이라도 있었고. 홀가분하면서도… 쓸쓸한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도 잠시.
집결 장소인 모험가 길드 근처에 다다르자, 꽤 많은 인파가 몰려있었다.
하나같이 얼굴을 긴장에 물들였다. 용과 맞선다는 사실은 누군가에게는 흥분으로, 누군가에게는 우려로, 또 누군가에게는 공포로 다가간 모양이다.
“좋은 아침.”
하지만 ‘아무래도 좋다’는 듯이 구는 건 이 녀석밖에 없지 않을까.
눈을 비비면서 졸린 얼굴로 키르케가 내 옆으로 합류했다.
“안녕하세요. 좀 주무셨어요, 로즈 씨?”
그리고 내게 언제나 기운을 북돋워주는 우리 귀여운 천사 페리링의 목소리. 살짝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이자, 키르케가 대번에 이죽거렸다.
“잤겠어? 왕자랑 같은 방에 들어가던데, 보나마나 뜨밤 좀 쳤겠지.”
“키르케 씨.”
으, 하고 볼을 발그레 붉힌 페리링이 눈짓했고 키르케는 코웃음을 쳤다. 뭐 그 말 그대로라… 나로서는 그다지 할 말이 없긴 하지만.
“그게 뭐… 어때서. 아무튼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잖아.”
어흠, 하고 겸연쩍은 기분을 헛기침으로 뱉어내고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직까지는… 아는 얼굴이 보이지 않은 가운데… 로브 자락을 꾹꾹 당기는 손짓에 내려다보았다. 내 시야보다 조금 낮은 곳에 웬즈데이가 있었다.
“장미 씨.”
“웬즈데이…”
웬즈데이를 대하는 게 아직은 조금 껄끄럽지만 그렇다고 내 사역마를 내가 언제까지 피하고 다닐 수만은 없는 노릇이지. 휴, 하고는 웬즈데이의 머리카락을 북북 쓰다듬었다. 내가 만들었지만… 촉감 좋다.
“에, 으. 장미 씨, 갑자기… 뭐에요. 으, 으.”
“조용히 하고 잠시 이러고 있게 해. 이래저래 골치가 아프단 말야.”
웬즈데이의 머리카락을 한바탕 흐트러놓고 나자 조금 마음이 가라앉는다. …키르케와 페리링이 묘한 눈으로 날 보고 있는 건 모르는 척하기로 했다.
“너뿐이야? 즈왈트는 키에리를 지키고 있으라고 시켰는데… 그 유적단이라는 사람들은?”
“그게 말이죠. 잭 단장이 말을 전해달라고 해서요.”
“잭 단장이? 무슨 일로?”
웬즈데이의 표정이 조금 흐려졌다.
뭔가 몹시 말하기 어렵다는 얼굴인데.
“…토마스 군이 쓰러졌나봐요.”
…잠깐. 너무 얘기가 지나치게 본론으로 치달아서 뭔 소린지 모르겠다.
자초지종을 좀 구체적으로 설명해줬으면 좋겠는데. 토마스… 꼬마 도령이 왜 쓰러져? 드디어 키에리를 걱정하느라 탈진이라도 한 건가?
“잭 씨와 유적단 사람들이 뭔가 돈… 음, 아니면 도움이 될 게 있을까 싶어 저번에 갔었던 라오후의 가게를 뒤진 모양인데요.”
“그런데?”
“거기에서… 토마스 군이 정신을 잃고 쓰러진 채로 발견되었다봐요. 어제 오후쯤에.”
어제 오후라면… 나와 키르케, 페리링이 르누레르 숲에 있었을 때인데.
솔직히 말하자면 토마스가 전력에 보탬이 될 녀석은 아니었긴 하지만… 또 내가 모르는 어떠한 일이 변수로 작용할지 모른다는 건 두렵다.
“하아… 꼬마 도령의 상태는 어떤데?”
“특별히 다친 곳이나 외상은 없어보이는데요. 하지만 정신을 잃은 채 깨어나질 못하고 있어요. 그… 저번에 왕자님이 장미 씨를 데려오셨다던 그 지하실 같았는데.”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거기라면 분명… 그 징그러운 식물인간 내지는 인간식물, 센 씨가 말하길 ‘불로초’라던 게 있었던 곳일 텐데. 그 동충하초 자식은 죽었다고. 내 눈앞에서 루시탄이 목을 베어버렸단 말야. 살아있을 리가 없어.
“…일단 지금의 일이 더 급해요. 만약 오늘 일이 무사히 끝난다면… 제가 용태를 볼게요.”
“그래줘, 페리링. 그래서… 꼬마 도령은 어디에 있는데?”
“키에리 씨가 계신 곳에 있어요. 즈왈트 씨가 지키고 있고요.”
…즈왈트가 지키고 있다면 일단 무슨 일이 일어나도 알아서 대처하겠지. 아, 무척이나 찜찜하지만 지금 꼬마 도령에 대해서 신경 쓰고 있을 겨를이 없다. 이쪽 일도 충분히 골치가 아프다고.
“알았어. 그쪽은 나중에 처리하기로 하고. 그럼 잭 씨는?”
“잭 씨는 이른 아침에… 베어링턴을 떠난 모양이에요. 성문 경비병이 베어링턴 상공을 날아서 왕도 쪽으로 가는 비행선을 봤다고.”
“떠났다고?! 튀었어?!”
아니, 그 아저씨 뭐 하는 거야?!
키에리도, 꼬마 도령도 여기에서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데 저 살자고 도망을 가?!
댄디즘이 울겠다! 그런 사람으로 보지 않았었는데!
“상대가 드래곤이라면 그럴 만도 하다고 생각하는데, 난.”
“아, 기운 빠지는 소식이네… 그럴 줄 알았어, 그럴 줄 알았어. 도적단이라는 게 그럴 수 있다고 진작에 생각했어야 하는 건데….”
얼굴을 감싸고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만약 키에리와 꼬마 도령을 데리고 사라졌더라면 차라리 그럴 수도 있겠다고 납득했을텐데, 자기 선원들까지 버리고 혼자 살자고 도망치다니, 이렇게 실망스러울 수가 없다, 정말로.
“로즈 씨….”
“…미안, 페리링. 잠깐 어이가 없어서. 그래, 없는 사람은 없는 사람이고. 있는 사람들끼리… 어떻게든 최선을 다해야지.”
그래도 주변에 모험가 길드 소속의 길드원들이 불안한 얼굴이라도 자리를 지키고 있다는 게 위안이라면 위안이다. 대충 50명 정도 될까.
“잠깐. 센 씨네는 다 어디 있어? 아직 안 왔어? 늑대원숭이 아저씨랑, 카르티는?”
“네? 어… 그건 저도 모르겠는데요. 그쪽에 들렀다가 올걸 그랬나봐요.”
…설마 센이나 늑대원숭이… 그리고, 그리고… 정말로, 진짜로. 카르티가 도망쳤다는 생각은 하기조차 싫다. 조금 지팡이를 쥔 손이 바들거리려고 한다.
진짜, 카르티 너까지 그러지 마. 제발.
입술을 꾹 깨물고 있는 내 얼굴을 물끄러미 보고 있던 웬즈데이가 조금 고개를 떨구곤 어깨를 늘어뜨렸다.
“센 씨의 대장간에 한번 다녀올까요?”
“그래줘. 혹시 무슨 일이 있으면 곧장 알려주고.”
“네. 그럼 다녀올게요, 장미 씨.”
자그마한 몸뚱이를 십분 이용해 인파를 헤치고 시야에서 사라져가는 웬즈데이의 뒷모습을 보면서, 나는 역시 불안해하고 있었다. 내가 여기에서 쌓은 인연, 신뢰라는 게 이렇게 흔들리기 쉬울 정도로 얄팍했던가. 그 셋을 믿고 싶은데. 믿어야 하는데.
“로제이아, 뭔가 시작한다.”
윽, 하고 몸이 잠시 휘청거렸다.
무슨 짓이냐고 투덜거릴 정신적인 여유도 없이, 키르케가 턱짓으로 가리킨 연단을 올려다보았다. 갈색 수염이 짙은 중년의 남자와, 그 옆에 매의 기사 갑옷을 빈틈없이 갖춘 초로의 남자… 칼 프레드릭 바츠 경이 있었다.
둘은 시선을 주고받더니, 갈색 수염의 남자가 먼저 나섰다. 마법이 걸려있는지 그의 목소리가 청중의 귀에 똑바로 꽂혔다.
“길드마스터 핸슨이다. 갑작스러운 소집에 응해주어서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다. 어제 지부에 방문한 모든 단원들에게 소식이 전달되었을 것이다. 베어링턴을 향해 드래곤, ‘무슈마헤트’가 날아오고 있고, 성 외곽에서는 이미 영병들과 몬스터의 전투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주변이 술렁거렸다.
아직 이 상황을 미처 받아들이지 못한 사람, 공황에 점점 빠져드는 사람, 그리고 전의에 불타는 사람. 각자가 이 상황을 맞이하는 방법은 달랐지만, 모두가 긴장하고 있었다.
술렁임이 가라앉길 기다린 뒤… 길드마스터 핸슨이 다시 목소리를 냈다.
“단적으로 말하겠다. 드래곤은 베어링턴에 내려앉을 것이고, 이미 이 베어링턴에서 빠져나갈 길은 없다. 드래곤이 출몰한 여파로, 주변의 몬스터들이 더 사납게 준동하고 있음은 제군들이 잘 알 것이다. 여기서 살아남을 방법은 단 하나. 우리를 대신해 드래곤을 죽게 하는 것뿐이다.”
“그건 말도 안 돼…. 아, 여신이시여….”
술렁거림 속에서 전의를 상실한 젊은 사제가 절망감에 차서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미 틀렸다, 저건. 싸울 수 있는 상태가 아니야.
“베어링턴의 치안의 한 축을 담당하는 모험가 길드의 길드마스터로서, 나는 제군들에게 드래곤과 맞서 싸울 것을 요청하겠다. 내가 할 수 있는 약속은 그 자리에 나도 함께 싸우리라는 것뿐이다. 이 요청을 거부한다고 하여… 그것을 책하진 않겠다. 최후의 시간을 각자가 원하는 방식대로 보내는 것도 좋겠지.”
길드마스터 핸슨은 잠시 옆을 바라보았다. 침묵을 지키는 노기사와 눈이 마주쳐서, 핸슨은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 계신 이분을 아는 이도 있을 것이고, 그렇지 않은 이도 있을 것이다. 이분은 국왕 폐하를 보위하는 알트슈타인 제일의 검사, 칼 프레드릭 바츠 경이시다. 오늘의 싸움에 이분도 함께하신다. 각자 생각해보길 바란다. 쥐새끼처럼 구석에 엎드려 무력하게 죽을지. 아니면 이 나라 제일의 검사와 함께 용과 맞서는 노래의 한 구절이 될지. 각자 선택하길 바란다.”
길드마스터 핸슨이 물러섰다. 순간 말하는 법을 잊은 듯 모두의 시선이 바츠 경에게 향했지만, 지금 이들을 고무시켜야만 할 바츠 경은 앞으로 나서지 않았다. 대신… 연단으로 오르는 발자국 소리가, 청중들의 귀를 강하게 붙들었다.
‘어…?’
지난번 보았던 투구와 갑주를 알아보지 못할 리가 없다.
양쪽 흉갑에… 율령교회의 문양과 알트슈타인의 문양이 각각 새겨져 있었다.
“저 녀석….”
이런 판국인데, 조금 웃음이 나고 만다.
연단에 오른 기사는 투구를 벗었다. 소년의 태를 벗고 점점 완연하게 남자가 되어가는, 그럼에도 아직 어린 얼굴이, 금발이, 햇볕 아래에서 반짝였다.
내가… 나와, 체온을 나눴던 소년의 얼굴.
그 어떤 때보다도 각오와 결의를 억지로 굳힌 그 얼굴.
그가 숨을 들이마시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는 알트슈타인 제 2 왕자, 루시타니아 알브레히트 알트슈타인 팔케다.”
조금 가슴 언저리가… 욱신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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