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6화 〉 2 8 / 미쳐버린 드래곤, 무슈마헤트에게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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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사방을 짙게 감싼 흰 안개가 폐부로 스며드는 느낌이 서늘하다.
도무지 몇 마리인지 알 수 없는 늑대 떼가 주위를 에워싼 채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만,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을 따름이다.
“그래서… 그리고는 뭐라는데?”
그중에서도 한 마리가 유독 강렬한 존재감을 뽐냈다. 머리를 들어 한참을 올려다봐야 겨우 시선을 마주할 수 있는 곳에 위치한 두 개의 달 같은 눈이 내려다보면, 자기도 모르게 몸이 얼어붙는 것만 같았다. 심리적으로든, 물리적으로든.
그도 그럴 것이다.
상대는 바람의 정령왕이라고 불리는 루드라, 위명이 드높은 늑대이니.
“…잠깐… 기다려 봐.”
우리가 온 이유를 알고 있다니 따로 설명할 필요가 없다는 건 좋지만… 그 다음에는 어떻게 하냐고. 뒷말을 채근하자 키르케는 몹시도 내키지 않는 얼굴을 했다. 그녀 또한 이 상황이 몹시도 긴장되는 게 분명했다.
또다시 키르케가 내 귀에 닿지 않는 높은 소리를 목에서 뽑아내었다. 어떤 소리인지 전혀 들리지 않지만, 목이 잔뜩 부어올라 핏대까지 선 것을 보면… 아무래도 쉬운 일만은 아닌 것 같다.
꼴깍 하고 침을 삼킨 뒤 그들의 대화를 지켜보았다. 대화를 하긴 하고 있는… 거지?
“…네에. 저도 무슨 얘기인지는 전혀 모르겠지만… 키르케 씨가 뭔가 열심히 말을 걸고 있다는 것만은 알겠어요.”
엘프라서 귀가 밝은 것인지 페리링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되면 결국 키르케가 하기 나름이라는 얘기인데. 잘 될라나 모르겠다. 쟤도 성질이 보통이 아니라놔서 저러다가 정령왕의 진노 같은 걸 사는 게 아닐까.
“…도움을 얻길 바란다면 조건이 있대.”
불쌍한 키르케는 한참 만에 개소리… 아니, 실례. 늑대소리를 멈추고 목을 괴로운 듯이 어루만지며 인간의 소리를 냈다. 빨갛게 달아오른 그 목을 치유해줄 생각이었는지 페리링이 다가갔지만 키르케는 손을 내저었다. 흑마법사는 치유가 잘 듣질 않는다고.
“무슨 조건인데?”
그래도 낭보다. 이 정도면 나름대로 이야기가 잘 풀리고 있잖아.
하지만 정령왕 정도 되는 늑대가 직접 내거는 조건이니만큼 쉽지 않을 거라는 예감인데. 이런 예감은 잘 들어맞는단 말이지.
“그건… 아, 일단 움직이자.”
안개 너머에서 천천히 거대한 늑대가 몸을 돌리는 것이 어렴풋이 보였다. 크흠, 하고 목을 가다듬은 키르케가 잰걸음으로 뒤따랐다. 주변의 늑대 무리가 낮게 목울음을 울리면서 안개 너머에서 바스락바스락 나아가고 있었다. 이쯤 되면… 연행이나 마찬가지잖아.
“대체 어디로 가는 거야….”
“보여줄 게 있대. 조금 더 들어가야 한다고.”
“그러니까 그게 대체 어디냐고.”
르누레르 숲 깊숙한 곳으로 걸어들어가고 있는 것이 잘 하고 있는 것인지 슬슬 걱정이 앞설 즈음, 앞서가던 키르케가 걸음을 멈췄다.
“도착했어.”
사방은 온통 웃자란 나무와 허리까지 오는 풀이 버스럭거리는 깊은 삼림이었고, 서로 떨어지지 않기 위해 페리링의 손을 잡아줘야 했다.
“아니, 이런 숲 한가운데 대체 뭐가 있다고 이런 데까지….”
정령왕의 거대한 윤곽이 내려다보는 가운데, 무엇인가를 지키고 있던 몇 마리의 늑대가 작게 으르릉거렸다. 녀석들도 늑대치고는 꽤 커다란 사이즈였지만… 정령왕과 비교해보면 역시 강아지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는 게 묘하다.
나를 향해 이를 드러내고 으르릉대는 게 뭔가 마음에 들지 않은 눈친데.
“아아! 알았어, 알았다고. 미안해. 잘못했으니까!”
내 투덜거리는 소리에 짜증이 났다면 미안하다고 사과할 수밖에.
페리링이 머리카락에 가려진 귀를 쫑긋거리고는 내 손을 놓고는 자기가 먼저 웃자란 풀을 젖히면서 나아갔다. 늑대들은 페리링을 제지하지 않고, 조용히 길을 비켜주었다.
“…정령왕의 부탁이라는 게 혹시 이건가요? 키르케 씨.”
“어, 아무래도 맞는 것 같아.”
니들끼리만 알아듣는 소리 하지 말라구.
늑대들을 으스스한 기분으로 지나쳐 페리링의 머리 뒤에서 빼꼼히 얼굴을 내밀었다. 바위 틈바구니, 푹신한 풀이 깔린 곳에 꾸물거리는 몇 마리의 조그마한 그림자가 보였다.
“…새끼 늑대잖아.”
“네. 새끼 늑대에요, 로즈 씨.”
새끼 늑대치곤 조금 크긴 하지만, 새하얀 털뭉치들이 꾸물거리면서 바둥대고 있었다. 조그마한 꼬랑지가 꼬물거리는 게 퍽 사랑스러웠다. 아직 조금 짧은 주둥이를 벌리면 채 발달하지 않은 이빨들이 작게 줄지은 게 보였다.
“그런데 이 녀석들… 뭔가 좀 이상한데.”
문외한인 내가 봐도 알 수 있을 정도로 털에는 생기가 부족하고 코는 말라 있다. 장난스럽게 휘젓는 것처럼 보이는 손발도 털에 뒤덮여있는 것을 감안해도… 앙상해 보인다.
키르케가 한숨을 내쉬었다.
“이 녀석들은 지난 번에 도바츄에게 잡혀갔다가 늑대들이 되찾아온 새끼들이라는데… 그 이후로 지금까지 계속 골골거리고 있다나 봐. 여기 늑대 우두머리의 새끼라서 부쩍 경계하는 모양이고.”
그게 며칠 전 이 숲을 찾아왔을 때 이 녀석들이 우리를 도와준 이유인가?
도바츄의 습격에서 토마스와 키에리를 보호해주고, 찾으러 왔던 날 안내해줬던 게, 자기 새끼들의 안위를 염려해서… 였단 말이지.
그렇게 생각하면 결국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이 녀석들에게 빚을 진 셈이잖아.
조금 마음에 들지 않는다. 이 녀석들까지도 설마 내가 오지랖 넓다고 생각한 거냐고.
“도바츄들의 적이고, 동료를 구하러 숲에 들어온 너라면 믿을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네.”
친절한 통역 감사합니다.
찝찝한 기분이 남았지만, 아무튼… 우리에게는 이 늑대들의 조력이 절실하다. 서로의 도움이 필요하다면 협력할 수도 있을 것이다.
“새끼들의 상태는 어떤데? 낫게 할 수 있을 것 같아?”
“별로 좋지는… 않아요.”
페리링이 조심스럽게 새끼 한 마리를 안아들고는 빛이 드리운 손가락으로 털을 꾹꾹 짚어가면서 상태를 보고 있었다.
배 쪽을 짚어내자 새끼가 미약하게 꿈틀거리는 게 보였다. 한숨을 내쉬고는, 안아올렸을 때처럼 조심스럽게, 페리링은 다시 늑대를 둥지로 내려놓았다.
“…아무래도 루드라의 힘으로 지금은 억누른 것 같지만… 독이에요. 이 새끼들도 키에리 씨와 똑같은 독에 중독되어 기력을 잃어가고 있어요. 오히려 작은 만큼 더 빨리 독이 퍼져서… 손을 빨리 쓰지 못하면 아무래도 위험할 것 같아요.”
페리링이 힘없는 목소리로 밝힌 소견이 어깨를 무겁게 짓눌렀다.
지난번 이 숲을 지나는 도중 받았던 습격에서 도바츄 한 마리의 기억을 빨아들인 일이 있다. 녀석들은 우루 늪지에서 무엇인가의 압박을 받아 서식지를 떠나야 했고, 그러다가 르누레르 숲에까지 도착했을 테지.
녀석들은 아마도… 그 키메라를 피해 늪지를 떠났을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 그 키메라를 만들어낸 이들이, 이 사달의 원인이라는 얘기가 된다.
‘복음회….’
문득 이가 갈렸다.
니이나. 노엘…. 그리고 누군지조차 모르는 이들. 대체 그들이 원하는 게 뭐냐고.
발스턴을 꼬드겨 로젤라이를, 카테르네를 죽이고, 키메라를 풀어 이 사태를 촉발시켜 온 나라를 공포로 몰아넣고, 거기에 대도시에 수상한 걸리버 마약을 풀고… 하나같이 세상을 혼란스럽게 하고자 하는 의도가 보일 정도다.
“로즈….”
“야, 너… 괜찮아?”
아니, 침착하자.
부글거리려는 격정을 한숨으로 내뱉은 뒤 사납게 일그러졌던 표정을 겨우 되돌렸다.
지금은 당면한 상황에 대처하는 게 먼저다. 뭐든 내일 살아남고 볼 일이 아닌가.
“…괜찮아. 어쨌든 결국 이 녀석들한테도 드래곤을 사냥할 이유가 생긴 거네.”
이 새끼 늑대들을 괴롭히는 독을 치유하려면 결국 무슈마헤트의 혈청이 필요하다.
드래곤의 독주머니에 담긴 혈청이라면 키에리와 이 녀석들을 치료하는 데 부족하지는 않겠지. 낙관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어쨌든 상대가 아무리 강대한 이름을 가진 드래곤이라고 해도, 이쪽도 바람의 정령왕을 아군으로 끌어들인다면… 이제는 해볼 만한 전력을 갖췄단 말야.
“그게 일이 그렇게 잘 풀릴지는 모르겠지만.”
키르케는 늘 그렇듯이 비관론을 펼쳤다. 뭐, 가끔은 좀 낙관적으로 세상을 보라고.
그렇게 늘 인상을 팍 찌푸리고 사니까 썸타는 남자 하나도 없잖아.
“냅둬. 너나 잘하시지. 가는 데마다 뻥뻥 사고가 터지는 폭탄 같은 여자가 시집이나 제대로 가겠냐고.”
“내가 사고를 치고 다니는 것만은 아니거든.”
키르케는 이상한 표정으로, 이죽거리듯이 웃었고 페리링은 걱정스럽다는 듯이 한숨을 쉬었다. 나름 상반된 반응이라면 그렇다고 할 수도 있긴 하지만… 대체 이 녀석들은 나를 어떻게 생각하길래, 저런 반응이야?
“아무튼 더 생각할 것도 없어. 이 이야기를 받아들여야지. 반대 없지?”
두 사람을 둘러봐도 반대 의사를 표명할 생각은 없다.
만장일치로 이 안건은 본회의에 상정합니다. 선택의 여지 같은 건 없긴 했지만.
“그럼 이 아이들은 우리가 일단 데려갈게. 그래도 되지?”
고개를 돌려 주위의 늑대들을 바라보았다.
말을 걸어도 알아듣는지 의문이긴 했지만 이 녀석들도… 평범한 늑대가 아니라 나름대로 몬스터 취급을 받는 녀석들. 그 나름의 지능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한다.
역시, 늑대들은 조금 으르릉거리면서도 길을 비켜주었다. 솔직히 이 상황에서 덤벼들면 어떻게 할지 조금 쫄아있었건만.
새끼 늑대들의 보금자리를 감싸고 있던 풀더미와 바위, 흙을 향해 가브롤의 지팡이를 가볍게 흔들었다. 지면이 흔들리는 가벼운 진동에 녀석들이 몸을 움츠리는 게 얼핏 보였다. 너무 겁을 주면 안 되는데.
“Emeth.”
골렘의 구동어를 입에 담자, 한 기의 골렘이 풀더미를 요람처럼 안아들고 몸을 일으켰다.
걱정스러움이 스치는 늑대들의 시선을 받으며 숲을 빠져나가, 베어링턴으로 돌아가는 길을 서둘렀다.
미쳐버린 드래곤, 무슈마헤트와의 결전까지…
이제 한 번의 밤밖에는 남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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