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커스텀 로즈-105화 (105/157)

〈 105화 〉 2 ­ 8 / 미쳐버린 드래곤, 무슈마헤트에게 (9)

* * *

(9)

“어째 별로 내키지 않네.”

르누레르 숲 어귀는 변함없이 짙은 녹음이 눅눅하고, 또한 어둑했다.

키르케는 조금 코를 킁킁거리고는 나쁜 냄새라도 맡았는지 그 코를 손으로 감싸 막고는 미간을 찌푸렸다. ‘발톱의 마녀’라는 이명에 어울리게, 동물적인 반응이었다.

“내키지 않다니?”

“뭔가 썩은 것처럼… 나쁜 냄새가 나.”

“키르케 씨는 코가 엄청 좋으시네요. 전 아무것도 모르겠는데… 썩은 냄새가 난다면 이 숲에 나타났다는 도바츄가 원인이지 않을까요?”

르누레르 조사대, 임시 결성. 멤버는 나와 페리링, 키르케. 마법사만 셋.

즈왈트는 여전히 키에리를 지키고 있다. 이 와중에 키에리에게 굳이 해코지를 할 사람은 없겠지만, 만사 불여튼튼이라고 하는 법이니까.

웬즈데이는… 저번 일 이후로 조금 얼굴을 보기가 껄끄러워서, 근신 겸해서 마을 정보 수집이나 시키고 있고.

센과 카르티, 그리고 늑대원숭이는 그 대장간에서 뭔가를 준비하던 모양이던데… 뭘 준비하고 있든 드래곤을 상대하는 데 도움이 될지 의구심이 들었다.

직접 대면한 드래곤은 결코 사람이 상대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 위용을 자랑했으니까. 아무리 철저하게 준비를 해도 불안함을 떨칠 수가 없었다.

“도바츄, 도바츄라… 별로 양순한 몬스터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썩은 냄새가 나는 녀석들이었던가?”

“우루 늪지에서 왔으니까. 거긴 정말… 냄새 장난 아니라고 왜 말 안 했어?”

정말, 우루 늪지에서 맡았던 냄새를 생각하면 식욕까지 싹 가실 정도다.

꽤 시간이 지난 지금까지도 떠올리면 이맛살이 찌푸려질 만큼 강렬한 기억이었다.

“뭐 아무튼. 로즈 너… 그… 점쟁이 말을 꽤 신경쓰고 있는 모양이던데. 대체 어떻게 알게 된 거야? 그 사람.”

“말해도 믿으려나 모르겠는데.”

…키르케의 눈치가 이상했다. 생각해보니 저번에 그 점쟁이와 처음 대면했을 때 키르케와 루시탄의 반응이 이상했던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믿을 테니까. 빨리 말해 봐.”

키르케의 채근에 볼을 긁적였다.

어디에서부터 말하면 좋지? 일단… 그 죽음의 여신과 마주했던 기억을 가장 먼저 떠올렸다. 그 을씨년스러운 장소를 떠올리면 지금도 찬바람에 몸이 조금 떨리는 것만 같다.

“…죽음의 여신, ‘발 헬’을 알고 있지?”

“그야 모를 리가 없지. 죽음과 전사를 관장하는 기분 나쁜 여신이잖아.”

“그 기분 나쁜 여신이 해준 말이 있어서, 거기 모험가 길드에 가서 만나게 되었어. 지금까지는 예언이 어느 정도 들어맞았으니까 마냥 무시할 수 없단 말이지.”

사나운 도바츄들이 우글거리는 숲에 무방비하게 들어갈 수는 없지.

저번의 교훈을 기억해 불에 타지 않는 바위 골렘을 불러내어 앞세우고 숲으로 들어섰다. 조금 호기심이 생긴 듯한 페리링과 내키지 않는다는 얼굴의 키르케가 뒤를 따랐다.

“근데 왜? 너랑 루시탄. 어쩐지 조금 눈치가 이상하던데. 아는 사람이야?”

“으음… 설마 아니겠지. 나중에 얘기하자고. 지금은 그런 말을 할 때가 아닌 것 같아.”

얼버무리는 키르케의 태도가 몹시 수상쩍다. 분명히 뭔가를 숨기고 있는 게 틀림없다.

물론 굳이 캐물을 시기가 아니라는 말에도 일리가 있으니 지금은 그냥 넘어가지만, 나중에는 키르케나 루시탄, 어느 한쪽을 꼭 족쳐서 알아내야겠다고, 단단히 머릿속에 기억해뒀다.

“치사해요. 두 사람만 아는 얘기만 하고 있고. 꼭 제가 들러리가 된 것 같잖아요?”

“그런 거 아냐, 페리링. 이럴 때 대부분은 키르케가 나쁜 거니까.”

“한 대 때려도 되지? 하프엘프랑 걸리버, 늬들 짜증나.”

투덜거림과 칭얼거림, 짜증내는 소리를 내며 숲을 헤치고 나아간다.

느릿하게 쿵쿵거리며 나아가는 골렘이 발을 뗄 때마다 바삐 새들이 날아올랐다. 그것을 제외하면… 기분 나쁠 정도로 조용한 숲이다.

“뭔가 있네.”

그리고 경험으로 알게 된 건데, 숲에 들어섰을 때 주변이 쥐죽은 듯 조용할 때는 대개 이유는 한 가지다. 주변에서 뭔가가 지켜보고 있고… 대개 다른 숲 짐승들이 두려워하는 것일 때. 키르케는 코를 한번 킁 하고 울리더니 주변에 울창하게 솟아오른 나무를 휘 둘러보고는 소리를 한껏 낮춰 중얼거렸다. 각자 지팡이를 고쳐잡고 단단히 긴장했다.

“도바츄야?”

“아니, 그 냄새는 아냐. 이건….”

“정령, 바람의 정령…의 기척이네요.”

페리링이 하프 엘프라는 건 비교적 최근에 알았지만, 조금 멍하게 숲을 올려다보면서 두건에 가려진 귀가 쫑긋거리는 걸 보면… 하프 엘프가 맞는 것 같기도 하다. 언제 한번 맨 귀를 좀 봐야겠어.

“…아주 강대한 정령이 있어요.”

페리링이 몹시 긴장한 기색을 얼굴에 내비친 순간, 사방에 갑자기 짙은 안개가 어른거리기 시작했다. 키르케와 페리링이 각자 지팡이를 앞으로 겨누며 경계했지만, 나만큼은 조금 침착하게 이 상황을 대처할 수 있었다. 이미 한 번 겪어본 일이니까.

그 늑대 정령이… 온 것 같다.

이제는 나도 알 수 있을 것 같다. 주변에서 나지막하게 짓누르는 듯한 수많은 시선은 르누레르 숲에 살고 있던 늑대 무리의 것이라고.

“왔어.”

키르케가 소리를 한껏 낮춰 중얼거린 순간, 안개 너머에서 검푸른 윤곽이 비춰보였다.

거대한 앞발로 지탱한 거대한 몸통. 그로부터 쭉 뻗쳐올라간 머리에서 황황히 타오르는 빛이 두 갈래로 일렁였다.

숨이 턱 막히는 것 같았다.

바로 몇 시간 전 대면했던 그 드래곤, 무슈마헤트와 비교해도 전혀 밀리지 않는 강대한 존재감과 위압감.

“숨… 막, 혀… 대체….”

“조용히, 해… 로즈. 저건… 그냥 늑대가 아냐….”

형체를 지니지 않는 무게가 어깨를 꽉 내리눌러, 정신을 차렸을 때는 나도 모르게 한쪽 무릎을 꿇고 주저앉아있었다. 골렘은 허무하게 허물어졌고 양옆에서 페리링과 키르케도 주저앉아있었다.

낯익은 기척도 느껴졌다. 지난번에 나와 대면했었던 그 유령늑대도 훨씬 거대한 늑대 옆에 서 있었다. 그 때 보았던 늑대도 어마어마하게 커다랗다고 느꼈는데, 지금 그 옆에 서 있는 처음 보는 늑대와 비교해보면 마치 표범과 호랑이 정도의 차이는 나는 것 같다. 도바츄들이 잠잠해진 것도 이해가 갔다. 저런 늑대가 나섰다면 제아무리 난폭한 몬스터라도 몸을 사릴 수밖에 없겠지!

“너… 설마.”

키르케는 이제야 내가 왜 자신을 데려왔는지를 이해한 모양이었다.

물론 저런 괴물 늑대와 대화하게 될줄은 몰랐다. 좀 덜 괴물인 쪽과 얘기를 하게 될 줄 알았다고.

“아니, 나도 몰랐단 말야. 저렇게… 엄청난 게 있을 줄은.”

“넌 왜 늘 이렇게 골치 아픈 일에만 엮이는 거야?”

“…정말이에요.”

나도 좀 알고 싶어.

여신에게 물어보면 답을 해 주려나.

어이없다는 듯이 나를 한번 째려본 키르케가 입술을 꾹 깨물고, 지팡이를 짚은 채 겨우 몸을 일으켜세웠다. 어차피 상황이 이렇게 된 이상 그냥 돌아갈 수도 없을 것 같으니.

“뭐해, 통역. 뭐라도 좀 얘기해 봐.”

“누가 통역이야, 누가….”

키르케가 한층 더 어이없다는 듯이 제 지팡이를 하늘에서 내려온 동앗줄인 것처럼 꽉 붙잡았다. 그게 썩은 동앗줄이 아니어야 할 텐데.

긴장한 표정 그대로 키르케의 입이 벌어졌다. 덧니가 돋보이는 입에서 내 귀에 들리지 않는 높은 음역의 소리가 새어나왔을 때 페리링이 자기도 모르게 귀를 막는 것이 보였다.

키르케가 먼저 무엇이라 말을 했고, 안개 너머 늑대의 윤곽에서 울림 같은 게 돌풍처럼 한번 몰아쳐왔다. 키르케는 놀라서, 발을 두어 걸음 뒤로 물렸다.

“뭐야? 뭔가 얘기가 된 거야?”

페리링도 뭔가 들은 눈치이다. 유독 둘의 얼굴이 백지장처럼 하얗게 질렸다가 새파랗게 되었으니까. 나만 못 알아듣는다는 건… 이런 기분이구나. 착하고 순한 페리링은 그렇다치고, 천하에 무서울 게 없이 앙칼진 키르케까지 저런 표정인 건… 꽤 드문 일인데.

“…정령왕이야. 왜 정령왕이 이런 곳에 있는 건데….”

“바람의… 정령왕이에요, 로즈.”

바람의 정령왕… 이라고? 늑대 모습이라는 데에서 눈치를 챘어야 했었나?

아니, 아니. 일반적으로 정령왕이라는 게 이렇게… 쉽게 만날 수 있으면 안 되는 거 아니었어?! 그 말을 들은 순간 점쟁이를 떠올렸다. 이런 녀석에게… 조력을 구하라고 참 쉽게도 말했네, 그 여자!

“‘폭풍사냥꾼’… 루드라 말이지…?”

후우욱, 하고 뜨뜻미지근한 바람이 몰아쳐왔다.

마치 내 중얼거림에 긍정하는 듯한 기척에도, 도저히 기뻐할 수가 없다. 뱀을 피해 늑대 굴에 들어온 격이잖아!

마법을 다루는 이라면 모를 리가 없다.

나와 키르케같이… 정령을 다루는 유파가 아니더라도 기본적으로 알고 들어가는 지식이니까. 페리링과 같은 치유 학파는 더 말할 것도 없고.

율령교회가 주관하는 열(?)신교의 신들이 세계의 질서를 관장하는 이들이라면, 눈앞의 정령왕 루드라를 비롯한 다섯 명의 정령왕은 자연계의 원소, 그 혼돈을 대행하는 자들이다. 이들은 각각…

빛의 정령왕, 형체 없는 미트라.

불과 탄생의 정령왕, 태양불사조 수리야.

물과 해일의 정령왕, 고래 바루나.

대지와 뿌리의 정령왕, 암사슴 샤프리티비.

그리고 마지막으로… 바람과 혹한의 정령왕, 늑대 루드라.

키르케가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지팡이를 꾹 붙든 채 나를 바라보았다. 달달달 입술을 떠는 품이 조금 우습지만, 키르케의 눈이 비치고 있는 나도 알 수 있을 정도로 떨고 있어서야 남을 보고 도저히… 웃을 수가 없다.

“여기에… 왜 왔는지 알고 있대.”

그러시겠지.

정령왕쯤 되어서… 당연히 알고 계시겠지! 지금 내 머릿속에 떠오른 건 단 한 가지뿐이었다. 주변의 셀 수 없이 많은 굶주린 늑대들과 상식을 벗어난 거대한 늑대 몇 마리.

이 순간만큼은 시시각각 날아오고 있는 드래곤은 문제가 아니다.

우리, 여기에서 살아서 나갈 수는 있을까?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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