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4화 〉 2 8 / 미쳐버린 드래곤, 무슈마헤트에게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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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아침에 시작한 회의가 점심을 넘기고 저녁에 가까워지도록 이어졌어도, 별다른 진전을 보이지 못했다.
처음에는 왕자가 주재하는 회의라 하여 바짝 긴장하던 베어링턴의 유지들도 길어지는 회의와 진전이 없는 논의에 지쳐가는 기색이 역력했다.
타는 속을 냉수로 달래는 것도 몇 번째인지.
루시탄은 하녀가 내미는 물을 한 모금 더 삼켰다. 여전히 답답한 속은 풀리지 않았다.
“왕자 전하께서 하시고자 하는 말씀은 충분히 이해합니다만…”
외눈안경을 까딱거리며 동항로 회사의 대표로 참석한 ‘로드리게스 웩슬턴’ 지부장이 느긋하게 말했다. 위기의식이라고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투였지만, 상황의 심각성을 모르지는 않을 터였다. 그래서는 한 도시의 지부장 자리까지 올라올 수도 없었겠지.
“결국 당장 할 수 있는 일에는 한계가 있다는 것만 확실해진 게 아닌가 싶습니다. 병사를 소집하고 발리스타를 준비하고… 그 외에 달리 방법이 있겠습니까? 그나마 도움이 될지도 의문이지요. 만에 하나 드래곤이 정말로… 이 도시에 내려앉는다면 말입니다.”
다른 이들은 말을 아꼈다. 웩슬턴의 말에 대놓고 반박하기도, 또 그렇다고 하여 동조할 수도 없었던 탓이다. 그래도 일단 회의장의 분위기는 웩슬턴의 낙관론에 무게가 기울어지는 듯했다.
루시탄은 여전히 답답했지만, 그래도 이들의 의견을 완전히 묵살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드래곤이 반드시 여기에 내려앉을 것이라는 말을 하면, 이들이 보일 반응이야 뻔했다.
확언하는 근거를 캐물을 것이고, 그것이 점쟁이의 예언이라고 답하면 순식간에 자신의 권위는 곤두박질칠 게 뻔하지. 루시탄은 입술을 꾹 깨물곤 프레드릭을 건너보았다. 그 또한 지금의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음이 분명했다.
“너무 그렇게… 왕자 전하의 말씀을 좀 더 경청하도록 합시다, 여러분.”
그나마 이 도시… 베어링턴을 책임지고 있는 시장 ‘제레미아 큄튼’은 자신을 이 도시에 파견한 영주와, 나아가 그 영주에게 왕자로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루시탄의 말을 완전히 묵살할 수만도 없는 난처한 위치였던지라 회의석상에서 곤혹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을 뿐이었다.
“글쎄요. 전하의 우려는 잘 알겠고, 또 우리도 지금이 아주 위험한 상황이라는 건 잘 압니다만… 그렇다고 안 되는 일을 억지로 되게 할 수도 없지요. 안 그렇습니까?”
큄튼의 중재에도 불구하고 회의 분위기는 그다지 달아오르지를 못했다.
무능한 남자라고 속으로 낙인을 찍어놓으면서 루시탄은 탁자에 깔린 지도를 내려다보았다.
왕도를 지나쳐 북쪽에서부터 내려오고 있는 드래곤. 그리고 분노한 드래곤이 지나간 자리에는 몬스터들이 미쳐 날뛴다. 그 날뛰는 몬스터 무리를 막아낼 병력도 필요했다.
“최소한 200명은 몬스터의 습격에 대비해서 외곽에 부대를 할당해야 합니다. 기병을 포함해서 말이죠.”
“왕도나 다른 영지에도 지원병을 요청해야 합니다!”
오히려 영주와 도시의 유지들을 자극하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성 외곽에 존재하는 수많은 농장, 목장이 얽힌 장원에 대한 위협은 이미 구체화되기 시작했으니. 드래곤이 지나간 자리에 출몰하는 몬스터야말로, 그들의 이익에 직결되는 사안이었다.
“이미 다른 영지에 지원병을 요청했으나… 반응은 미온적이오. 뭐라 말씀을 드릴 수가 없소. 양해를… 좀 해 주시오. 영병을 편성하여 배치하겠으니…”
“그걸 어떻게든 해야 하는 게 시장의 역할이지 않소!”
“만약 우리 장원에서 소출이 안 나오면, 시장이 지금 그 자리를 지킬 수 있을 것 같소?!”
큄튼이 수건으로 이마에 맺힌 땀을 닦으며 망설이다가 말하자, 부글거리면서 비난이 들끓었다. 큄튼의 무능함은 일단 둘째치더라도… 참, 골계적인 광경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왜 왕도에서 왔다는 마법사는 이 자리에 오지 않은 겁니까? 두 사람이 파견되었다고 들었는데.”
마법사 두 사람… 좌중의 술렁임이 잠시 가라앉았다.
그 고요함이 기대가 아니라 실망에서부터 기인했다는 것을 루시탄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자신에게 설명을 요구하는 눈이었기에, 타는 목을 다시 한번 물을 삼켜 적셨다.
“왕도에서 온 마법사는 지금 이 일에 대처할 방법을 논의하고 있소. 나름의 시간이 필요하다 하여 여기에 참석하지 않게 했소이다.”
칼 프레드릭 폰 바츠, 매의 기사가 대신 답을 했지만, 그 대답만으로는 참석자들을 진정시키기엔 부족했다. 그들을 대신한 자는… 동항로 회사를 대표해 나온 로드리게스 웩슬턴이었다. 날렵하게 기른 콧수염이 꿈틀거릴 정도로, 이제는 그도 초조해하고 있었다.
“바츠 경, 그런 말씀을 쉬이 받아들일 수 없군요. 여기에 왔을 때는 이미 어떠한 대책을 가지고 왔었어야 했던 것이 아닙니까? 듣자하니, 대마법사분들께서 오신 것도 아니라고 하던데. 국왕께서… 지나치게 사태를 경시하는 게 아니시냐는 말씀입니다.”
동항로 회사는 내륙 곳곳에 가도를 정비하는 사업에 투자해왔다. 그로부터 얻는 이권이 상당할진대, 몬스터 무리의 창궐에 예민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불경하다고 비쳐질 수도 있는 언사를 앞두고 프레드릭이 얼굴에 노기를 띠었지만, 루시탄의 제지에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럴 리가 있겠소. 그 두 사람은 두 분의 대마법사, 헤카이트 경과 술라 경께서 특별히 추천하여 보낸 이들이오. 조금 기다려 보시오.”
루시탄의 대답이 성에 차지 않는 모양들이었으나, 그렇다고 왕자의 말에 대놓고 반론하는 이도 없었다.
문제는… 다른 것이다.
드래곤과 몬스터 창궐. 동시에 대처하기에는 베어링턴의 병력은 지나치게 부족했다.
베어링턴의 영병은 고작 오백 남짓에, 중무장한 기병이 쉰 기 정도이다. 모험가 길드에서 인원을 긁어모아도 많아야 백 명을 넘지 않을 것이다.
시시각각, 한 치의 유예도 두지 않고 가까이 다가오는 두 가지의 중대한 위협을 동시에 대처할 수는 없으니, 기병을 포함한 부대를 밖에 돌리고 나면 남은 영병은 삼백오십.
전쟁이 없었던 세월이 길어 마냥 해이해진 병사들이 드래곤의 압도적인 공포를 버텨낼 수나 있을지조차도, 지금은 확신할 수가 없었다.
성벽을 따라 배치된 발리스타 중, 드래곤의 단단한 비늘을 뚫고 타격을 줄 만한 대형 발리스타는 고작 세 개뿐이고. 상황은 최악이었고, 사기는 바닥을 칠 정도다.
뭔가, 뭔가… 확실하게 사기를 진작시킬만한 계기가 필요하다.
하지만… 그런 계기가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질 리가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알트슈타인에서 부와 권세를 누리는 이들도, 하늘을 날아다니는 공포 앞에서는 손을 놓고 있을 수밖에 없다니.
바로 자신의 옆자리에 앉은 프레드릭조차도 크게 다르지 않을 터이다.
칼 프레드릭 폰 바츠. 그는 국왕을 모시는 세 명의 매의 기사 중 가장 지위가 높지만, 아무리 오랜 세월 알트슈타인 최강의 검사라고 이름을 떨친 그라도 드래곤을 상대로는 싸울 수 있을 리가 없다고, 루시탄은 그렇게 생각했다.
아무튼 할 수 있는 일부터 해야 할 것이다.
“긴급한 상황이니만큼 국왕 폐하를 대리하여 왕자로서 명령서를 보내겠소. 하루거리에 있는 영지는 즉각 베어링턴에 원병을 파병하시오. 이는 국왕 폐하의 어명을 전달하는 것이자, 알브레히트 지방의 작위를 가진 자로서 명하는 것이니… 즉시 독수리를 다시 보내어 원병을 재촉하도록 하시오. 내일 중으로 원병을 보내지 않는 영지는, 명령에 항거한 죄를 엄히 물으라고 알리시오.”
힘을 모아야 한다.
왕자인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이렇게 윽박지르는 것밖에 없다니.
루시탄은 입 안에 쓴맛이 몹시도 빠르게 번지는 것을 느끼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로즈, 너는 지금 어떻게 하고 있냐.’
자신이 실효 없는 회의석상에 거듭하여 얼굴을 내미는 동안, 그 여자는 동분서주하면서 방책을 짜내려고 애쓰고 있겠지. 그것을 생각하고보면 몹시도… 지금의 자신의 처지가 초라해지는 것을 느끼면서, 루시탄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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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래핑 크로우 유적단’은 자신들의 모토와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 작업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물론 그들 사이에 우울함이 깔려있었던 건 텅 빈 남의 가게를 뒤지고 있었던 탓만은 아니다.
잭 단장과 소년 토마스. 그리고 몇 명의 단원이 합류하여… 영병들이 한번 쓸고 지나간 라오후의 거점 중 한 곳, ‘이주’를 뒤지고 있었다.
얼마 전, 베어링턴에서 방귀 좀 뀐다고 했던 이들이 모여서 보이지 않는 면도날 같은 설전을 주고받았던 탁자도 볼썽사납게 넘어져 뒹굴었고, 고풍스러운 장식이며, 징그러운 표본이며… 폭풍이 한번 휩쓸고 지나간 것처럼 엉망이 되어 있었다.
“단장.”
소년 토마스가 한껏 우울함이 낀 목소리를 답답하다는 듯이 냈다.
왜? 하고 맥아리 없는 대답이 돌아왔다. 잭 단장은 한창 서랍장의 서랍을 한칸한칸 열어보면서 뭔가 도움이나, 혹은 돈이 될 만한 것을 찾고 있었다.
“어쩌다가 우리가 이 판에 끼게 되었을까요?”
“그건 내가 묻고 싶은 말이야. 운도 참 없지. 이번에 쓴 돈은 꼭 경비로 청구해야 하니까 장부나 잘 써둬.”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고는 잭 단장은 다시 서랍장을 뒤지는 일을 골몰하기 시작했다. 키에리가 걱정되지도 않는가, 그 모습이 야속했지만, 소년 토마스는 원망스레 그 뒷모습을 바라보고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복도로 나가보니, 엉망진창인 것은 마찬가지다. 연못과 흐드러지게 핀 붉은 꽃. 저것이… 그 마녀의 말로는 아주 수상한 꽃이랬던가. 답답한 마음에 바닥의 깨진 파편을 툭, 발끝으로 걷어찼다.
툭, 툭, 툭, 툭, 툭… 돌멩이가 여기저기를 튕기다가, 난간에 맞고 뒹구르르 굴러 깨진 바닥 틈바구니로 쏙 하고 들어갔다. 그 깨진 바닥 틈바구니에, 숨겨진 태엽장치가 보였다.
소년 토마스는 어릴지언정, 지금보다 훨씬 어렸을 때부터 도적단에서 뒹굴고 자라며 보고 들은 것은 충분하다. 심장이 두근거리는 것을 깨닫고, 천천히 바닥을 발끝으로 짚었다. 위화감이 슬슬 발끝을 간질였다.
“…비밀 통로?”
주변에는 보는 눈이 없었고, 들리는 것은 오직 긴장감에 두방망이치는 심장소리 뿐이다.
천천히 벽을 짚어보았다. 만약 비밀 통로라면 어딘가에 드나들 수 있는… 장치가 있을 텐데. 복도의 벽을 쓸어나가던 손끝에 짚이는 것이 있었다.
화려한 황금색… 뿔 달린 뱀이 그려진 붉은 깃발. 그 깃대를 붙잡았다. 미세하게… 움직일 수 있는 장치가 깃대로 위장해 숨겨져 있다.
덜컥, 덜컥, 덜컥.
깃대를 움직이자마자, 덜그럭거리면서 돌이 갈리는 소리가 났다.
깨진 바닥을 포함한, 두 개의 발판이 움직이면서… 아래로 통하는 비밀 통로가 나타났다. 토마스는 떨리는 눈으로 그 아래 입을 벌린 계단과 검은 공간을 내려다보았다.
단장에게 알릴 것인가, 일단 가장 먼저 들어가볼 것인가.
아주 잠시 고민하던 토마스의 발이 천천히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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