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3화 〉 2 8 / 미쳐버린 드래곤, 무슈마헤트에게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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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이번에야말로… 발끝이 진짜 바닥을 딛고 있었다.
단단하게 몸을 지탱해주는 땅바닥의 생생한 감촉이 이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거칠게 숨을 내쉬는 입가로 짭잘한 소금기 짙은 땀이 스며들었다. 바로 몇 초 전의 체험이 매우 강렬해서… 며칠쯤은 악몽에 시달릴 것 같다. 씨발.
“로즈… 괜찮아요?”
숨을 겨우겨우 내뱉다가 내민 손을 잡고 몸을 일으켰다. 힘이 들어가지 않는 다리가 후들거리고, 속이 자꾸만 메슥거렸다. 방금 전 환상이 지나치리만치 또렷했다. 마치 아직도 그 황금색 용의 눈동자가 머릿속 한구석에서 바라보고 있는 느낌이 소름끼친다.
“…솔직히 안 괜찮아. 속이 뒤집힐 것 같아… 그래도, 덕분에 살았어. 고마워, 페리링.”
그 순간 페리링이 구하러 오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지 상상하기도 싫다.
내 커스터마이징 룸에 어떻게 페리링이 들어올 수 있었는지도 신경 쓰이지만… 그건 일단 나중 문제고.
“너… 물 좀 마셔. 얼굴 하얀 것 봐.”
“으… 여긴, 대체 어디야?”
키르케의 목소리도 들렸다. 같이 있었던 모양이다.
길게 한숨을 내쉬고는 몸을 일으키려다가 비틀거리는데, 페리링의 것보다 단단한 손이 어깨를 붙잡았다.
머릿속이 뭉개질 것처럼 지끈거리는 가운데, 키르케의 부축을 받아 침대에 앉았다. 겨우, 지금 자신이 있는 곳이 어딘가의… 여관방이라는 것을 알았다. 짚을 채운 침대에 앉은 다리가 아직도 떨리고 있었다.
겨우 물 한 모금 마시고 나자 정신이 돌아온다.
자신이 본 것을 말한들 키르케가 믿을까 하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다행히도 목격자는 자신만이 아니라는 점은 정말로 다행이었다.
“페리링… 너도… 봤지?”
페리링이 입술을 깨물고는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그녀도 봤었다. 황금빛으로 일렁거리는… 오로지 증오만으로 이루어진 눈동자를.
긴 마름모꼴로 쭉 찢어진 동공을 보았다.
황금색의 홍채 구석구석에 비탄이 독처럼 타고 흐르는 실핏줄을 보았었다고.
시선이 향한 것만으로 죽음을 강하게 실감했던 그 눈동자를 앞두고서도, 지금 이렇게 숨을 쉬고 있는 것이 그저 신기할 따름이다.
나와 페리링만이 무언의 공감을 주고받는 것을, 키르케는 답답해했다.
“아니, 대체 둘이서만 뭘 봤다는 거야? 로제이아 너, 당주의 서재에서 위험한 책이라도 봐버려서 조금 정신이 어떻게 된 거 아냐?”
“…무슈마헤트를 봤어. 키르케. 그 드래곤을 봤다고.”
키르케의 표정이 빳빳하게 굳어졌다.
드래곤의 이름 앞에서는 늘 남을 깔보듯이 구는 키르케라도 한걸음 물러날 수밖에 없겠지.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눈꺼풀을 파르르 떨면서, 손가락 사이로 드러난 입술이 달싹거렸다.
“…아니, 그게 말이 돼? 당주의 서재는 완벽한 폐공간이라고. 아무리… 아니지, 드래곤이라면 가능하겠지. 당연히 가능할 거야. 하아… 그 드래곤, 단단히 열받은 모양이네.”
“아니, 단순히 ‘열받았다’고 말할 수만은 없는 상황이야.”
독에 받친 드래곤, 무슈마헤트와 대면해서 있었던 그 짧은 일을 말하는 데에 몇 모금의 물을 들이켰는지 모르겠다.
몸이, 목이, 입이… 그 일을 말하는 것을 거부하는 것처럼, 몇 마디 말을 할 때마다 바짝바짝 입이 타들어 갔지만, 아무튼 두 사람에게 어찌어찌 그 일을 설명해주었다.
처음에는 미덥지 않은 눈이었던 키르케도, 설마 하는 얼굴로 바라보던 페리링도 결국엔 수긍한 모양이었다.
“…그러니까 네 말은 그 용은 있지도 않은 자기 새끼를 네가 죽였다고 생각해서 미쳐버렸단 거네. 하아… 억지도 그런 억지가 없잖아.”
“술라 님께서는 드래곤의 생각을 이해하려고 하지 말라고 하셨어요. 완전히 다른… 기준으로 세상을 바라보기 때문에요.”
용은 하늘을 날 수 있고, 인간은 땅을 걷는다.
용은 새끼를 낳지 않고, 인간은 아이를 낳는다.
가령 그러한… 아주 기본적인 부분에서부터 발생한 차이가, 수많은 시간이 흐르는 동안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 그 자체를 다르게 만들었다고.
“좋다 이거야. 하아… 어차피 미친 용이니 어쭙잖게 이해하려 드는 건 멍청한 짓이지. 아무튼. 그럼 당주의 서재에서는 뭔가 도움이 될 만한 정보는 있었고?”
도움이 될 만한 정보… 있었다.
그 정보를 토대로 작전을 세우고, 실행할 수단도 갖고 있었다. 왼쪽 눈이 조금 욱신거리는 게 느껴졌다. 하지만 여전히 부족하다. 아직 한 수, 한 수가 부족해.
“그러고 보니 페리링.”
“네?”
“아까… 드래곤이 널 보고 뭔가 이상하게 반응했었잖아. 뭔가 했었어?”
페리링이 내 커스터마이징 룸에 난입해왔을 때, 이 녀석이 갖고 있던 ‘무엇인가’에 무슈마헤트가 자못 격한 반응을 보였었다. 그것이 무엇이기에, 한순간이나마 나에 대한 증오마저 잊고 절규했었던 걸까.
페리링은 몹시도 내키지 않는다는 얼굴로 한 개의 수정체를 내밀었다. 붉은 표면에서 은은하게 고동치는 듯한 빛이 새어나오고, 반질반질한 표면에 나와 키르케의 놀란 얼굴이 말갛게 비쳤다.
“이거… 드래곤의 심장이지? 좀… 작긴 하지만.”
고룡급 정도 되는 드래곤의 경우, 어른의 몸통만 한 크기의 결정화된 심장이 피와 마나를 순환한다고 들은 적이 있다. 그런데 페리링이 내민 수정체는 잘해야 그녀의 조그마한 손바닥보다 조금 큰 정도. 이게 어디에서 났는지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이제야 이해가 갔다.
“…그래서, 그렇게 반응했던 거네.”
이 수정체는 분명, 우루 늪지에서 사냥한 미성숙한 드래곤의 것임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키르케에게도 설명해주자 그녀가 미간을 확 찌푸렸다. 드래곤 주제에 모성애 같은 거 갖지 말라고, 툭 쏘아붙이는 게 꽤 키르케답다.
“케라우노스 님께서 제게 가져가라고 맡기셨어요. 아마… 지금쯤 왕도 근처에서 날뛰는 마물들을 상대하고 계시겠죠.”
케라우노스, 술라, 헤카이트… 이 나라에서 내노라하는 대마법사 셋이 지키고 있어서야 드래곤도 섣불리 접근하지 못하겠다 싶긴 했다.
남 걱정할 때가 아니긴 했지만.
어쨌든 날 의식한 이상, 문제의 드래곤… 무슈마헤트가 베어링턴을 그저 지나치는 일은 기대할 수 없게 되었다. 싸울 수밖에 없다. 싸울 수밖에… 없다고.
‘싸우다니, 어떻게….’
그 눈 하나만으로도 자신은 말 그대로 심장이 멎을 뻔했다.
그나마도 진짜가 아니라 환영이었다. 드래곤은 그 환영만으로도 내 정신을 죽일 수 있다고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었고.
만약… 진짜 그 눈과 마주친다면…
지금 필사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작전을 실행할 수 있을까? 눈을 꽉 감고 주먹을 꾸욱 쥐었다. 만약 내가 지금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해야 한다면… 이제 단 한 번의 조력을 더 얻어야 한다면, 누구에게 도움을 구해야 살아남을 수 있을까.
“야. 로제이아.”
키르케가 한마디 툭, 내뱉듯 부른 뒤 발끝으로 내 허리를 탁, 걷어찼다.
엉거주춤하게 넘어지려다 겨우 자세를 잡고, 뭘 하는 거냐고 한 마디 째리려는데 키르케는 오히려 몹시도 마음에 안 든다는 얼굴로 허리에 손을 짚고 바라보고 있었다.
“네가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지! 네가 원했든 아니든… 널 보고 모여든 녀석들이 꽤 많아. 그렇게 너부터 세상이 망한 것 같은 얼굴 하고 있으면, 그 우울함이 나한테도 옮을 것 같다고. 알아? 언제나 그랬듯이 뻔뻔하게 네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으란 말야.”
…하아.
정말, 약한 소리 같은 거 쉽게 못 하겠네.
조금도 그럴 생각이 없었는데 말야. 조금 쓴웃음을 짓고는 체념으로 어깨를 늘어뜨렸다.
“…너한테 그런 소리를 듣게 될 줄은 몰랐어. 1년쯤 전인가, 내 뺨을 갈겼을 때는 그냥 재수 없는 썅년이었는데.”
“재수 없는 썅년 맞아. 한 번 더 후려줘? 얼마든지 해 줄 수 있는데.”
“사양할게. …그러고 보니 시간이 얼마나 지났지?”
당주의 서재에서 책을 찾고, 때아닌 드래곤과 기싸움을 벌이는 동안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모르겠다. 아직 창밖에는 해가 높게 떠 있는 것을 봐선 다행히도… 시간이 오래 지나진 않은 모양인데.
“1시간쯤 지났어.”
“다들 어쩌고 있고?”
“…어… 왕자 전하와 바츠 경께서는 성에 들어가셔서 아직 돌아오시지 않았어요. 내일 중에 가능한 한 드래곤을 맞이할 농성 준비를 점검하시는 모양이고요. 그리고….”
페리링이 조금 긴가민가하는 말을 키르케가 받았다.
“왜 여기에 있는지 모를 그… 정체 모를 아저씨와 꼬마는 뭐라더라, 뒷골목 양아치가 있다던가? 거길 조사하러 갔대. 뭔가 도움이 될 만한 게 있는지 찾아본다고.”
…라오후의 본거지에? 거기는 나도 가봤었지만… 드래곤을 상대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게 있었던 것 같지는 않다. 혹시 모르지, 잭 씨의 안목으로는 뭔가를 알아낼 수 있을지도. 아니, 그… 식물인간의 표본 중에는 키에리를 낫게 해 줄 수 있는 뭔가가 있을지도 모른다.
“별게 없을 텐데. 뭔가 찾아낼 수 있었으면 좋겠네.”
그럼 그쪽은 그대로 잭 씨가 하는 대로 맡겨두는 게 나을 것이다.
남은 한 번의 조력… 누구에게 도움을 구해야 할까. 도움을 구할 만한 곳이 있을까?
순간, 머릿속을 스쳐가는 게 있었다.
아직 하나 남아있었다. 이 상황에 파묻혀서 유일하게… 간과하고 있었던 것이.
하필이면 도움을 주는 역할로 키르케가 와준 것이 어쩌면 이 도움을 얻으라는 누군가의 안배가 아니었나 생각이 될 정도다.
“키르케, 네게 부탁할 게 있어.”
솔직히 말하자면 드래곤 상대로 잘 먹힐지 어떨지조차 아직 가늠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썩은 동앗줄이라도 일단 당기고 봐야 하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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