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커스텀 로즈-102화 (102/157)

〈 102화 〉 2 ­ 8 / 미쳐버린 드래곤, 무슈마헤트에게 (6)

* * *

(6)

여신의 맹독, 무슈마헤트.

공략의 실마리는 간신히 손에 쥐었지만, 그것만으로는 결정적인 한 방이 될 수 없음 또한 동시에 알게 되었다.

다소 무거운 마음으로 주문을 되뇌자 도서관의 풍경이 타들어가듯 흩어지고, 들어올 때 그랬던 것처럼 발밑에 아무 것도 느껴지지 않는 느릿한 부유감이 느껴졌더랜다.

숨을 후우, 들이쉰 순간, 뭔가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폐를 태우는 듯 뜨거운 공기. 불과 독이 뒤엉킨 듯이 매캐하다고 느낀 순간, 눈앞에 황금색의… 달이 갑작스럽게 떠올랐다.

‘아니… 달이 아니야…?’

달이라고 생각했던 그 황금색 원형을 세로로 가로지르는 가느다란 마름모꼴 균열이 이글거렸다. 그 정체불명의 ‘달’이 어떤 생명체의 눈동자였다고 간신히 깨닫는 데에는 약간 시간이 필요했다.

마치 수면에 떠오른 달 같은 황금빛이 넘실거렸다. 구석구석에 균열처럼 실핏줄이 붉었다. 핏줄 안쪽에는 마치 피가 아니라 불이 흐르고 있는 것 같은 노기가 파르르 떨리고 있음이 전해져왔다.

자기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쳐도, 마치 공간이라는 것 자체가 없는 것처럼 달은 한 뼘도 멀어지지 않았다. 아니면 지나치게 거대해서 멀어졌다는 인식조차 불가능했던 걸까.

[…너로구나….]

마치 수많은 뱀이 동시에 혀를 날름거리듯 한 쉭쉭 거리는 소리와 함께 한 가닥 의사가 울려왔다. 적의라는 이름으로 짜인 붉은 천에 섞인 단 한 가닥의 하얀 실처럼, 흐릿하고 희미한 의사가.

폐에 독이 들어찬 듯 찢기듯이 아파왔다. 주변의 공기가 온통 살을 찌르는 옅은 독처럼 느껴졌다.

쉭, 쉭, 쉭.

혓바닥을 낼름거리는 소리가 얼굴에 달라붙는 것처럼 소름끼치게 스며들었다.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녀석이 아니다… 본능이 경고했다. 마치 호랑이 앞의 쥐가 된 것처럼 손끝에서부터, 몸이 얼어붙었다.

“나… 라니, 대체, 콜록. 무슨… 소리냐고, 그게! 넌… 대체 누구야!”

피가 거꾸로 비어져 나오는 듯한 기침을 내뱉은 순간, 반투명한 막이 황금색의 눈동자를 덮었다. 막이 걷혔을 때 오히려 노기는 한층 더 타오르고 있었다.

[무지하고, 또한 몽매한 것. 네 우매함이 내 독샘을 한층 더 들끓게 하는구나. 네가 모른다고 하겠느냐, 네년이 처참하게 죽인 내 아이를!]

머릿속에 직접 이미지가 들이쳐왔다.

눈앞이 바들거리며 떨리고 일그러졌다. 버틸 힘을 잃은 다리가 무너져 정체모를 바닥에 주저앉았다. 아니, 어쩌면 바닥이 아니었을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내 몸을 삼키려 드는 늪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마치 지금 내 머릿속에서 되살아나고 있는 우루 늪지의 풍경처럼.

끔찍하게 뒤틀린 용의 유생(??)체가 케라우노스의 벼락을 맞고 숨이 끊어졌던 그 장소와 같은, 질척한 늪.

“설마… 그 괴물의 어미라고, 자칭하기라도 할 셈이야?”

[누구를 일컬어 괴물이라고 지껄이느냐, 이 열등한 계집아!]

용의 진노가 코앞에서 몰아쳤다.

온몸이 불타버릴 것 같은 그 분노 앞에서 어떻게 아직도 제 몸이 숨을 쉴 수 있는지부터 신기했을 정도다. 왜 아직까지 날 죽이지 않는 거지? 공포로 마비될 것 같은 머릿속에서 간신히 그 의문만이 쥐어짜내어졌다.

무섭다, 무섭다, 무섭다.

이렇게 무서웠던 적이 없었다. 발스턴 따위는 이런 공포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느껴질 정도다. 창피하게도 다리 사이가 시큰하게 풀리는 것 같았다. 입술을 달달 떨면서 바닥을 짚는 손이 허우적거렸다.

하지만 공포에 먹혀버린다면 정말로 죽을 것이다.

죽기 싫다면 생각을 해야 한다. 어떻게 이 궁지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 한 가닥 각오를 하고 나자 겨우 숨통이 탁 트였다.

일단 내가 할 수 있는 것. 시간을 버는 일.

여기서 정신을 놓치지 않고 버티고 있으면, 키르케든… 아니면 페리링이든, 누군가가 어떻게 해 주길 바랄 수밖에 없다.

“그건… 말이, 되지 않아. 용은 자식을 낳지도 않고 기르지도 않아. 당신은… 무슈마헤트, 당신은 그것의 어미가 될 수 없어.”

[건방진 계집!]

그녀는 소리를 쳤을 뿐이다.

단지 그것뿐이었는데, 이 정체모를 공간에서 몸이 저 멀리로 날려지고 있었다. 천장도, 바닥도, 벽도 없는 공간인데 마치 종이가 바람에 날리듯이 무력하게 몸이 구르는 고통만은 어째서 진짜인지.

용이 노기를 참지 못하고 쉭쉭거렸다.

[어설픈 앎이 네년의 명줄을 재촉한다는 것을 알아라. 그래, 네년의 말대로 뭇 짐승들처럼 그 아이는 내가 낳은 것이 아니다… 하지만 나의 기운으로 태어났으매, 그 뒤틀리고 가엾은 모습을 불쌍히 여겨 내 그 아이를 자식으로 삼았다!]

기가 막힐 따름이다.

재수 없는 사람은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진다고 하니 딱 이런 꼴이잖아.

‘침착해.’

혀끝을 꾹 깨물었다. 날카롭게 스미는 통각이 조금 제정신을 찾게 해 주었다. 입 안에 피맛이 조금 맺힌 건 어쩔 수 없지.

‘무슨 말을 해야 하지…?’

무슨 말이든 해야 해.

어설픈 동정은 오히려 분노를 부채질할 뿐이다. 그런 건 겪어봐서 잘 안다.

내게 어머니란 그저 날 낳아주고 도망쳐버린 여자였을 뿐이다. 씨발, 이 용의 모정 따위 내가 알 수 있을 리가 없잖아. 낳고도 도망가버린 년의 뱃속에서 태어난 내가 낳지도 않은 제 새끼를 사랑해주는 용의 마음 따윌 어떻게 알아?!

이렇게 되면 이판사판이다.

“어차피 네 모성 따위는 가짜야, 난 알아! 동족들이 전부 죽어 나갈 때 넌 혼자 살아남아 도망쳤다고! 사람 잡아먹는 괴물을 네 새끼로 품든 말든 네 자유지만, 그 화풀이를 엉뚱한 데나 하지 말라고, 이 빌어먹을 도마뱀 대가리야!”

말을 뱉으면서도 아니다 싶었지만, 두 개의 달덩어리 같은 눈동자가 시뻘겋게 달아오른 것을 보고서야 단단히… 말 그대로, 이 용의 역린을 건드렸다는 걸 깨달았다. 아, 난 죽었구나. 내 이야기는 여기서 끝인가 하는 체념이 확신으로 변했다.

[건방진 것…! 어떤 계집인지 보고 놓아주려 했으나, 놓아줄 가치가 없는 것이로다. 육체에 되돌려 한꺼번에 죽이기조차 하찮구나, 여기서 네년의 정신을 찢어발겨주겠다!]

정신이 확 들었다.

육체에 되돌려…? 순간적으로 번뜩이는 생각이 구명의 동앗줄이 되어 내려왔다.

이걸 일단 붙잡아봐야 썩은 것인지 아닌지 알 수 있겠지.

용의 아가리가 벌어졌다. 성벽조차 씹어 가루로 만들 법한 이빨들이 수없이 줄지은 가운데, 나는 이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해야만 했다. 할 수 있을까?

정신을 하나로 모은다고? 이 상황에?

씨발, 죽기 싫으면 할 수밖에!

“…커스터마이징, 오픈!”

머리 위로 이빨과, 아가리와, 턱이 삼키러 오는 순간 겨우겨우 짜낸 한 마디.

쾅, 하고 맞물리는 소리가 귀에 먹먹하게 울렸다.

용이 그 입을 닫는 것과 동시에, 내 발밑은… 내게 아주 익숙한 다른 어둠을 딛고 있었다.

일단… 용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살았… 나?”

내 모습을 바꾸는 스킬인 ‘커스터마이징’. 그를 위해 준비된 아공간, 커스터마이징 룸에서 겨우 살아났다는 안도감에 숨을 내쉬었다. 최근에는 쓸 일이 거의 없었는데, 이런 식으로라도 쓸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해야겠지.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이제야 겨우 숨이 나온다.

아무리 용이라고 해도 여기까지 쳐들어올 순 없겠지. 아니, 이런 생각을 하면 진짜로 쳐들어오더라고. 아직도 손이 달달 떨리고 있었다. 아, 못 일어나겠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빠직, 빠직, 빠직….

커스터마이징 룸에 있을 리 없는 벽면에 금이 갔다. 우수수 무너지는 검은 벽 틈에서 황금색 빛이 드리웠다. 그 빛은 전혀, 내게 우호적인 빛이 아니었다. 용이, 벽 한 겹 너머에서… 날 바라보고 있는 게 우호적일 리가 없잖아!

“말… 도, 안 돼…!”

[내방자(Pilgrim) 계집이었구나. 내게서 도망칠 수 있을 줄 알았더냐?]

분노와 비웃음.

용의 눈이 두 가지의 감정을 품고 날 바라보고 있었다. 틀렸어, 이젠 진짜로 틀렸어!

숨을 들이마시는 소리가 들렸다. 얼굴에 핏기가 싹 가셨다. 이름이 익히 알려진 독룡의 숨결, 뒤집어쓴다면 어떻게 될지 상상조차 하고 싶지 않다…!

쨍그랑, 맑은 소리가 반대편에서 울렸다.

누군가가 다급하게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금방이라도 숨을 내뿜으려던 용의 눈빛이 잠시 흔들렸다.

[그, 건!]

[로즈! 얼른… 이리로!]

빛에 감싸인 사람의 형상이 너울거렸다. 솔직히, 용만 아니었으면 오히려 저 모습에 겁을 먹었을 것이다. 용을 향해 뻗은 손에, 그녀를 감싼 빛보다도 더 강렬한 핏빛이 뿜어져나오고 있었다.

용, 무슈마헤트는 그 붉은 빛에 잠시 멍하니 시선을 빼앗긴 것 같았다. 지금이 아니면… 정말 기회가 없다!

다리에 겨우 힘이 들어갔다. 바닥을 딛고, 빛무리를 따라 달렸다. 등 뒤에서 당혹한 용의 발톱이 무엇인가를 비집고 삐걱거리면서, 무너뜨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게 뭔지는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다.

[어딜 가느냐…! 그걸, 그걸… 그걸 두고 가라!]

피끓는 듯한 외침. 절규하듯이 말하는 그것이 무엇인지 생각할 겨를도 없이 뻗어진 빛의 손을 붙잡았다. 그대로, 빛 너머에 몸을 던지듯이 뛰어들었다.

바라건대, 이 너머가 여신이 다스린다는 천국이 아니기만을 바랄 뿐.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