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1화 〉 2 8 / 미쳐버린 드래곤 무슈마헤트에게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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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낯선 어감의 주문을 외우고 몇 초가 지났을까.
발끝에 느릿하게나마 감각이 돌아왔다.
꽤 길게 느껴졌지만 실은 숨을 한 번 쉴 정도의 시간밖에 흐르지 않았던 모양이다.
온통 검은색 뿐이었던 시야에 광경이 돌아오고, 그 광경이 구체적인 것이 되었을 때, 내쉬었던 숨을 다시 삼켰다.
책, 책, 책.
눈을 돌려도 책, 눈을 올려도 책, 심지어 딛고 있는 바닥까지도 책이었다.
바닥도 책. 천장도 책. 기둥도 책.
정신건강에 심히 좋지 않을 것 같은 공간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여기가 헤카이트 당주의 도서관이라 이거지. 정말,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후환이 두려우니 말은 여기까지만. 뒷말을 마저 말했다간 아무 일 없이 끝날 것 같지 않으니까. 아무튼 걸음을 옮기려는데, 히끄무레한 것이 지나갔다.
“으악!”
너무 놀라 소리를 질러버렸다. 마치 바람에 휘날리는 커튼이 반투명하게 된 것 같은 불규칙한 움직임을 보이는… 희끄무레한 뭔가가, 이상하다는 듯 이쪽으로 머리(?)를 돌렸다가 다시 둥둥 뜬 그대로 허공을 매끄럽게 가로질러 나아갔다.
…정말 오래 있으면 정신 건강에 아주 나쁜 영향을 미칠 것 같다.
심호흡을 하면서, 주위를 둘러보니 그런 희끄무레한 정체불명의 무엇인가가 몇 명쯤 더 보였다. 쌓여있는 책을 들여다보는 이들도 있고, 하릴없이 헤매이는 이들도 있었다.
아무튼, 유령은 유령이고 해야 할 일은 해야 할 일.
제 뺨을 짝 한번 때리고는 기합을 넣었다. 키르케가 무슨 책을 말했었더라.
무슨 스트레스가 쓴 무슨 전쟁사라고 했던가?
보아하니 사서가 관리하는 도서관은 아닌 것 같은데, 어떻게 책을 찾는담.
“…악취미인 공간이라 미안하네요. 생각했던 것보다 방문이 늦었는걸요. 로제이아.”
조금 샐쭉하게 삐진 듯한 익숙한 목소리에 눈을 들었다.
책장도 없이 쌓여있는 책더미 위에 다홍빛 빛무리가 이글거렸다.
원래 알던 얼굴보다는 조금 어린 감이 있지만, 누구인지는 알아볼 수 있었다.
헤카이트 당주, 그녀였다.
홍련색 머리카락은, 그녀의 몸을 감싸고 있는 다홍빛의 빛과 어우러져 정말로 불타는 것처럼 보였다.
“당주님… 이세요? 왕도에 계셨던 게…”
“로제이아의 질문 내용 중에서는 두 가지를 정정해야겠네요.”
쌓여있던 책더미에서 당주는 가볍게 뛰어내렸다.
발끝이 바닥을 딛지 않고, 반 뼘쯤 둥둥 뜬 채로 조금 어린 모습의 당주가 싱긋 웃었다.
“여기 있는 나는… ‘횃불의 마녀’ 헤카이트 본인이 아니에요. 일종의 분신이라고 해 두죠. 헤카이트가 살면서 모아놓은 지식을 관리하는 역할이라고 이해하면 되겠어요. 로제이아에게도 비슷한 아이가 있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그렇게 말하니 이해하기는 쉬웠다.
자신을 만능 비서 정령이라고 주장하는 웬즈데이 같은 존재란 말이지. 다만 웬즈데이처럼 주인을 사사건건… 잡아먹으려 들지만은 않는.
“그리고 한 가지 더 정정할 것은, 여기는 결코 장소에 국한된 공간이 아니라는 거에요. 이 서고에 출입할 수 있는 이라면 시간, 장소에 구애되지 않고 들어올 수 있어요.”
“…그건 꽤… 편리하겠는데요.”
헤카이트 당주의 눈이 가늘어졌다.
“비밀기지를 발견한 것 같은 눈은 하지 말고요. 로제이아. 난 여기에 드나드는 이는 다 알 수 있거든요. 이상한 용도로 쓰면 혼낼 거에요.”
…이상한 용도라니, 대체 어떤 용도?
생긋 웃는 헤카이트 당주의 얼굴이 무서워서 캐묻지는 않기로 했다.
뭣보다 지금은 농담 따먹기를 할 만한 상황도 아니기도 하지.
“…이상한 용도로 쓸 생각은 없어요. 제가 여기에 왜 왔는지는 당주님도 아실 것 같은데요. 나중에라면 몰라도 지금은 그럴 만한 여유도 없고요.”
“짐작은 하고 있었어요. 무슈마헤트를 물리칠 단서가 없을까 해서 왔겠죠.”
헤카이트 당주가 슬그머니 손짓하자, 책들 사이에서 한 권이 스르륵 빠져나와 펼쳐졌다. 키르케가 말했던 그 책이었다. 빌 풀트라스 저, ‘탐욕의 전쟁에 대한 연구’.
촤르르륵 하고 책장이 빠르게 넘어갔다.
그리고 이집트의 벽화 같은 스타일로 그려진 용의 삽화와 짧은 설명에서 책이 멈춰섰다.
긴장감에 침을 삼키고, 그 책장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무슈마헤트.
여신의 독샘이라는 별칭을 가졌으며, 흐레스벨그의 군대에 참가해 니힐리그의 악룡들을 그 독한 숨결로 몰살했음. 날카로운 발톱과 이빨로 쓰러진 악룡들을 잡아먹어 몸집을 키웠으나, 50마리의 용들이 참가한 ‘무시무시한 텅 빈 눈’ 고르기아스와의 싸움에서 홀로 살아남아 도망침. 이후로 활동 기록 없음.」
…조금 맥빠지는 기분이었지만, 문제의 책에서 무슈마헤트에 대해 다룬 내용은 아무래도 그게 끝인 모양이다.
조금 멍해진 얼굴로 헤카이트 당주를 올려다보았지만 당주는 그저 어깨를 으쓱일 뿐이다.
“하고 싶은 말은 알겠지만 무슈마헤트는 옛 전쟁에서도 크게 활약했던 용이에요. 왜 지금 갑자기 나타났는지는 모르겠지만… 다른 기록도 결국 비슷하다고요.”
“여기 이… ‘고르기아스’라는 놈에 관한 책은 없을까요?”
“흠… 글쎄요, 찾아봐야겠는데. 잠시만 기다려줄래요? 잠시 걷죠.”
“…설마 책 찾는 거 아날로그식은 아니죠?”
헤카이트 당주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 뒤를 따라 걸으면서 조금 입술을 달싹거렸다.
“그, 굉장히… 주제넘은 질문일지도 모르지만요. 당주님께서는… 무사하신 거죠?”
쓸데없는 걱정이라는 건 알고 있지만… 그래도 묻지 않을 수가 없다.
그녀는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가 이내 빙그레 웃었다. 홍련색 머리카락을 손으로 쓸어내는 동작에 부자유는 느껴지지 않았다.
“용이 지나간 자리에 몬스터가 미쳐 날뛰긴 했지만, 다행히도 아직은 무사하답니다. 전 오히려 로제이아 쪽이 더 걱정이에요. 여기는 폭풍이 지나갔지만, 그쪽은 아직이니 그저 무사하길 바라고 있답니다. 아, 여기 있네요. 여기라면 뭔가 씌여 있을 거에요.”
작은 당주… 일단 그렇게 부르기로 하고.
작은 당주는 한숨을 짓고는 책장 한편에 꽂혀있던 한 권의 양장본을 꺼냈다.
책을 감싼 가죽에 시선이 간 순간 자기도 모르게 숨을 들이마셨다.
“…악취미네요.”
“그렇죠?”
여러 종류의 가죽을 아무렇게나 덧대어 꿰맨 양장은 말 그대로 누더기나 다름없었다.
저게 사람 가죽이 아니길 바랄 뿐인데…
지금 내 눈이 잘못된 게 아니라면 저 가죽 표지, 미세하게 꿈틀거리고 있는 것도 같아서 더 기분이 나쁘다.
“무엇으로 만들었는지는 별로 알고 싶지 않을 거예요. 아무튼, 어디 보자… 아, 미리 말해두는데 로제이아는 이 책 절대로 읽으면 안 됩니다.”
별로 읽고 싶지도 않아요. 그런 수상한 책 읽으면 별로 끝이 좋지는 않을 거라고요.
호기심이 고양이를 죽인다는 말은 괜히 있는 게 아니니까.
작은 당주는 안경을 하나 꺼내 쓰고는 책을 펼쳤다. 기분 나쁜 책을 펼치자마자 내 눈에도 보일 만큼 짙은 독기가 스멀거렸다.
조금 떨어져 있었는데도 속이 메슥거리게 할 정도로 한가득 짙었다.
“여기 있네요. ‘공포의 눈’ 고르기아스. 거대한 눈 하나 안에 수백 개에 달하는 눈동자를 가진 악마라고 해요. 그 눈동자 중 하나와 마주치면 두려움에 온몸이 떨리고, 두 개와 마주치면 가장 두려워하는 것과 마주하게 되고, 세 개와 마주치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도망칠 수밖에 없다고요. 네 개와 마주치면 어떻게 되는지는 아무도 모른다나봐요.”
…어라? 바로 요전번에 그런 능력을 갖춘 걸리버와 마주쳤었다.
라오후의 수장… 이라고 생각되었던 그 기분 나쁜 식물인간이 악마와 같은 능력을 갖추고 있다니, 우연치고는 꽤 으스스하다.
하지만 소득은 있었다.
적어도 드래곤을 상대할 수 있을 만한 카드를 한 장 얻었지 않나.
이 틈을 잘 파고들면 어떻게든 쓸 만한 작전을 세울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제 도서관이 도움이 된 것 같네요.”
“네. 큰 도움이 되었어요.”
“내가 직접 도울 수 있으면 좋을 텐데.”
헤카이트 당주의 얼굴에 살짝 걱정스러움이 번졌지만, 그녀는 조금 웃으면서 손을 뻗어 내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겸연쩍은 기분이었다. 그녀에게 쓰다듬을 받은 적이 있었던가, 당주 본인보다는 조금 작은 손이긴 했지만 그래도 온기만큼은 확실하게 전해져왔다.
“그만 가볼게요. 감사합니다, 당주님.”
“어려운 일이 있거든 또 오도록 해요. 당신은 제 자랑스러운 제자이니까.”
“…아직은 자랑스럽다고 하실 만큼은 안 되지만요.”
가죽신을 분석할 때 알아낸 주문을 천천히 되뇌면서 여기에서 얻은 지식을 머릿속에 잘 갈무리해뒀다. 그럼 이제 남은 것은 여기서 얻은 지식을 이용해 드래곤을 어떻게 할 방법을 찾는 것뿐인데.
말처럼 쉽게 될지는 아직은 조금도 자신이 없었다.
남은 시간은 앞으로 하루하고 조금 더.
그리고 점쟁이가 말했던 도움은 어떤 걸 말하는 걸까.
감이 잡히지 않은 답답함을 뒤로 하고, 현실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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