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0화 〉 2 8 / 미쳐버린 드래곤 무슈마헤트에게 (4)
* * *
(4)
수상한 점쟁이의 말에 따르면 드래곤이 도착하는 것은 모레 아침이렷다.
틀림없이 여기에 내려앉을 것이라고 장담한 그녀의 말은, 이제까지의 예언이 제대로 들어맞았던 것을 생각하면 충분히 신빙성이 있었다.
물론 전혀 반갑지 않다. 이번 예언만큼은 빗나가길 바라지만… 준비는 일단 해 둬야겠지.
준비, 준비라… 대체 드래곤을 상대로 무슨 준비를 할 수 있단 말야.
“무슈마헤트… 란 말이지. 그래, 읽어본 적이 있어. 마법학자 빌 풀트라스가 쓴 ‘탐욕의 전쟁에 관한 연구’에서.”
키르케가 의외로 조금 인텔리처럼 보이는 이야기를 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마법학자의 이름 자체는 헤카이트 당주의 수업에서 들은 적 있는 것도 같았지만… 그런 책이 있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도 없었다.
처음 듣는 소리라는 듯 반응하는 날 보곤 키르케가 끌끌 혀를 찼다. 무례하다.
“금서거든.”
“그럼 궁금하게 만들지를 말던가.”
대체 어떤 책이길래 금서까지 지정된 거람.
율령교회는 나름대로 그런 지식 탐구에는 관대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나저나… 막막하네. 뭔가 좋은 방법 없어, 키르케?”
“낸들 뾰족한 방법이 있겠어? 그냥… 술라 님이나 헤카이트 당주가 오실 때까지 버틸 수 있는 한 버틸 수밖에 없지.”
아무튼, 하루 하고도 한나절의 시간이 남았으니 일단 내일 아침에 다시 모여서 재차 작전 회의를 하기로 결론이 모였다. 아직은 할 수 있는 것도, 뾰족한 방법도 없었고 무엇보다 각자 입장을 정할 시간이 필요했으니까.
“다른 사람들까지 자포자기한 건 아닌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지만.”
“난 자포자기하고 싶어. 드래곤, 드래곤… 그것도 고룡급. 그걸 무슨 수로 잡아? 전문 파티가 준비를 하고 가도 성공률이 희박한 게 드래곤 사냥인데.”
센과 카르티는 대장간으로 돌아가 가능한 전투에 필요한 밑준비를 돕겠다고 했고, 잭과 토마스는 아는 연줄을 동원해서 방법을 찾아보겠다고 나섰다.
키에리는… 소식을 듣고 놀라 서둘러 달려간 페리링이 돌보고 있었고, 혹시 모를 일에 대비해 즈왈트와 웬즈데이를 남겨두었다. 루시탄은 영주성으로 들어가 방어 태세를 확인하겠다며 나갔다. 즉… 남은 건 나와 키르케뿐이었다는 얘기다.
결국, 마녀들끼리 뭘 할 수 있는지나 좀 알아보려고 거리에 나선 것까진 좋았는데.
드래곤 레어에 헤딩, 계란으로 드래곤 치기나 다름없는 현실과 마주하는 외에 아무런 소득이 없었다는 얘기다.
“그럼 그… 스트레스…인지 하는 사람은 뭐라고 거기에 적어놨는데?”
“풀트라스야, 풀트라스. 마법 역사에 대한 연구에 있어서는 아주 독보적인 사람이라고. 너도 당주의 수업에서 많이 들어봤을텐데 여전히 사람 이름 외우는 데는 젬병이구나.”
한심하다는 듯이 보지 마. 너도 내 입장 한번 돼 보라고.
문화권도, 쓰는 말도 다르고 상식도 다르고 이미 머리가 굵어서 굳은 머리에 아예 새로운 지식을 욱여넣는 게 과연 쉬운지 생각해보라고.
“걸리버들의 복잡한 사정까지 내가 알 순 없지. 대신 너한테는… 묘한 걸리버들의 재주가 있잖아. 스킬인가 하는.”
“내 스킬은 그나마 전투계도 아니라구. 이럴 때 전혀 도움이 안 돼.”
“그건 그렇지.”
수긍하지 마.
물론 키르케는 그런 걸 생각할 필요조차 없겠지. 아, 얄미워.
내 그런 생각 같은 건 헤아릴 필요조차 없다는 듯 키르케는 어디서 꺼냈는지 모를 안경을 쓰고 마치 강사처럼 설명을 이어갔다. …왜 갑자기 안경은 쓰고 난리야. 너도 페리링한테 안경 덕후 기질이 옮기라도 했어?
“아무튼. 무슈마헤트의 이야기인데… 지금처럼 이 지역, 그러니까 ‘서부 사수지’ 말고도, 지금은 ‘상실의 땅’이 되어버린 대륙 중앙에 인간족이 처음 살기 시작했을 때의 이야기야.”
“대체 얼마나 오래된 일이야, 그건?”
“얼마나 오래된 일인지 제대로 모를 정도로는 오래됐지.”
어흠, 하고 키르케가 목청을 가다듬고는 말을 이어갔다.
은근히 남을 가르쳐주는 것을 좋아하는 경향이 있었다. 흥미로운 이야기이기도 하고 혹여 드래곤 공략에 도움이 될만한 이야기가 있을까 하여 귀를 기울였다.
“풀트라스의 연구에 따르면 이 세상의 모든 드래곤들이 두 파로 나뉘어 싸웠대. ‘여신의 전령’ 흐레스벨그가 이끄는 날개를 가진 드래곤과 ‘망각의 왕’ 니힐리그로부터 태어난 날개 없는 드래곤으로 갈라졌는데, 그중… 무슈마헤트에 대한 기록도 있었어.”
그 뒷내용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 하고 얼버무렸다.
잘 나가다가 왜 거기에서만 기억이 안 나는데. 한숨밖에 나오지 않았다.
“…여기 도서관에 가보면 좀 뭔가 알아낼 수 있으려나.”
“금서라고 한 말 못 들었어?”
따악, 경쾌한 딱밤 튕기기가 내 이마에 적중했다… 뭐 하는 짓이야, 한판 붙자는 거야?
홱 노려보니 키르케는 즐거워 죽겠다는 듯이 히죽거리면서 오냐, 받아주마 하는 태세로 돌변했다.
“정 읽고 싶다면 방법이 없는 건 아닌데.”
“무슨 방법이라도 있어?”
“당주의 비밀 서고에 금서란 금서는 잔뜩 보관되어 있거든. 거기에 아마 책이 있을걸.”
…들어본 적도 없다.
헤카이트 당주의 비밀 서고라니, 읽으면 눈이 멀어버린다든가, 미쳐버린다든가, 아니면 인간족의 피부로 만든 책이라도 있는 건 아니겠지? 하지만 근본적인 문제는 따로 있잖아.
“…무리지, 무리. 당주의 탑이라면 왕도에 있잖아. 거길 언제 다녀와.”
“흐으응….”
키르케가 재밌어 죽겠다는 듯한 얼굴을 했다. 뭐야, 뭔가 할 말이라도 있어?
아니, 그보다 이 녀석 분명히 내가 아무것도 모르는 것을 즐기는 것 같은 눈이다. 대체 뭔데. 뭔 소리를 하고 싶어서 그렇게 의기양양해하는 거냐고.
“너, 당주가 준 가죽신 아직 가지고 있어?”
“그야 갖고는 있지만.”
“그게 어떤 물건인지 생각도 해보지 않은 모양이네.”
애초에 알려준 적도 없다고.
최소한의 사용설명서도 없이 알아서 알아내라는 건지, 뭔지. 투덜거렸지만 키르케는 어깨를 으쓱일 뿐 그 뒷말을 보태지 않았다.
“…본의 아니게 말해버리긴 했지만 어떻게 쓸 수 있는지 알아내는 건 네 몫이야. 당주도 내가 가르쳐주길 원하지 않을걸.”
하여튼, 당주나 키르케나 교육방식이 참 글러먹었다니까.
하지만 힌트를 말해준 것은 키르케의 실수였거나 나름의 배려일지도 모르겠다.
즉시 무한의 주머니에서 가죽신을 꺼냈다. 우루 늪지에서는 신어봐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는데. 그때 이후로 깨끗하게 손질해서 말리고 무한의 주머니에 넣은 뒤로, 그 존재를 아예 잊어버리고 있었다.
가죽신을 손에 쥔 채, 정신을 집중했다.
“「튜닝」 개시.”
정확하게는 튜닝보다, 이 아이템의 상세한 정보를 알아내는 것이 목적이었다.
의식을 가죽신에 잠시 집중해보니, 그동안 신어봐도 알 수 없었던 이 가죽신의 진짜 능력을 겨우 알아낼 수 있었다. 왜 이제껏 이 가죽신에 튜닝을 써볼 생각을 해보질 않았는지.
“전령의 가죽신 ‘탈라리아(Talaria)’….”
머릿속에 죽 나열되는 정보를 꼼꼼하게 살핀 결과… 헤카이트 당주가 내게 엄청난 것을 줬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제껏 내 고생은 뭐였나, 싶을 정도다.
케라우노스가 준 무한의 주머니와 술라 님이 준 가브롤의 지팡이에 비해 절대로 격이 떨어지는 물건이 아니었는데, 제대로 어떤 아이템이라고 설명을 해 줬으면 이랬을 일도 없잖냐는 볼멘소리가 절로 나올 정도였다.
그런데 이런 걸 내게 줬으면…
“…키르케, 넌 심사에서 합격했을 때 헤카이트 당주에게 대체 뭘 받았어?”
불쑥 궁금증이 치솟는다. 키르케는 나보다 훨씬 헤카이트 당주에게 오래 배운 수제자나 다름없다. 그렇다면 필시 이 가죽신보다 더 대단한 걸 받았을 것 같아, 궁금증이 들었다.
“그걸 쉽게 말해줄 리가 없잖아. 동문이라고 해도 마녀끼리.”
“내 비밀은 다 알고 있으면서 좀 치사하지 않아?”
“마녀니까.”
득의양양해하는 꼴 좀 보라지.
한숨 푹 내쉬고, 일단 가죽신을 신었다… 우루 늪지에서 험하게 신고 다닌 게 참 뒤늦게 아까울 정도다. 좀 살살, 아껴서 신을 것을.
“일단 다녀올게. 뒤를 부탁해.”
“너무 오래 끌지 마. 당주의 서고에 오래 있다가 나도 한번 정신이 나갈 뻔했으니까. 몸도 조심해야 할 거고.”
“참고할게.”
대체 거기에 뭐가 있길래.
어깨를 으쓱이고는 가죽신을 신은 발을 앞으로 한 발짝 내디디며 지팡이 끄트머리에 정신을 집중했다. 마나맥에서부터 쭉 마나가 뽑혀나가는 듯한 이 기분은, 아무리 겪어도 도통 익숙해지질 않는다니까.
아이템 설명에 붙어있던 발동 주문은 내게는 다소 생소한 주문이라서 발음이 틀리지 않게 진땀을 빼야 했다. 발음 조금 틀리면 엉뚱한 주문이 발동하는 경우가 많아서 이만저만 고역이 아니다.
“「딕세δεξε 모우μου 톤τον 드로모δρμο 모우μου」.”
나의 길을 밝혀다오.
그러한 뜻이 있는 주문을 외우자 발아래가 천천히, 느리게 물결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지면을 밟고 있는 단단한 감촉부터 사라지고 발바닥 아래에서부터 한순간 중력이 사라진 듯한 허무감이 발목을 휘감았다.
여기부터는 미지의 영역.
정신을 바짝 차리고 갈 일이다.
헤카이트 당주의 서고, 단순한 서고는 절대 아닐 것이다.
절대 만만한 곳은 아닐 테니까.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