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커스텀 로즈-93화 (93/157)

〈 93화 〉 2 ­ 7 / 가끔은 휴가를 받고 싶은 골렘 웬즈데이에게 (3)

* * *

(3)

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던 것 같은데.

그때와 다른 게 있었다면 그때는 옆에 카르티가 누워있었다는 정도였으려나.

게다가 그 전날 밤이 전혀 기억나지 않았던 것 같고.

별로 넓다고 할 수 없는 침대였지만, 바로 옆에서 루시탄이 자고 있는 모습에 어쩐지 피식 웃음이 났다. 손을 뻗어서, 슬슬 머리카락을 만져주고는 먼저 몸을 일으켰… 는, 데…

“으으으으…!”

허리가 욱신거리고, 지끈거리고, 뱃속이 징징 울리고, 안쪽에 아직도 찐득거리는 감촉이 아직도 남아있다… 어젯밤, 이 녀석과 날이 거의 밝을 때까지 서로 지독히도 얽혔었지. 생각하고 나니 머릿속이 확, 뜨거워졌다.

뭐… 덕분에 마나맥의 상태는 꽤 괜찮아졌다.

줄곧 시달린데다 제대로 쉬지도, 그… 풀지도 못했던 탓에 영 제 상태가 아니었던 마나맥은 푹 잔데다 푹… 풀어준 탓에 새롭게 마력이 차오르고 있었다. 그것만은 퍽 다행한 일이다.

“하여간에….”

그동안 푹 쉬지 못했던 건 이 녀석도 마찬가지였던 모양.

햇볕이 눈에 들이치고 있었을 텐데도 여전히 제대로 눈을 뜨지 못한다. 아침에 약한 건 그때나 지금이나 매한가지네, 넌.

가만히 뺨에 살짝 입술을 대었다 떼고는 벗어두었던 옷을 입었다.

하룻밤 사이에 어째 새로 빤 듯한 냄새가 나서, 기분 좋게 블라우스까지 걸치고 나자,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이 녀석을 좀 깨워야 하나.

“루시탄, 루시탄. 일어나.”

“으, 음….”

제대로 일어나지를 못하네. 그러고 보면 눈 밑이 조금 거뭇거뭇하기도 하고.

주문으로 깨우는 건 솔직히 쉬운 일이긴 했지만, 어쩐지 그럴 마음이 들지 않았다. 조금 더 자게 내버려 두는 게 좋겠다. 대신 쪽지 한 장을 남기고.

상의를 걸치고 먼저 간단한 빵과 수프로 허기만 면하고 난 뒤 여관을 나섰다.

눈에 익은 길드 근처의 거리인 것 같았지만, 여전히 길은… 영 모르겠다.

어제 난리가 있었던 것치곤 거리의 분위기는 나름대로 조용했던 편이다.

후드를 뒤집어쓰고 슬그머니 모습을 바꾸었다. 머리는 붉게 물들이고, 피부는 갈색으로. 가슴 볼륨도 조금 키워서…

“좋아, 이 정도면 감쪽같지.”

손거울을 들여다보곤 살짝 키득거렸다.

안대 하나만 빼곤 전혀 다른 내 모습은 꽤 만족스럽다… 지나가던 사람이, 음침하게 웃는 것을 보곤 허둥지둥 손거울을 집어넣었다.

뭐, 아무튼 이 정도면 혹 누군가가 어제의 나를 봤다 하더라도, 절대 같은 사람이라고는 생각 못 하겠지.

“그럼 어디 보자. 거기가 어느 쪽이더라….”

어렴풋한 기억을 더듬어서, 센의 대장간으로 일단 발걸음을 돌렸다.

카르티도 아마 한창 거기서 일하고 있을 테니 얼굴이라도 좀 보러 들르는 게 좋겠지.

몇 번 들르지 않았더라면 길을 잃기 딱 좋은 구불구불한 골목길을 지나서 쇠를 두들기는 소리가 들려왔다. 매캐하게 타는 냄새와 두런두런거리는 말소리도 함께 들렸다.

“…우둔하기가 딱 이 근처에 돌아다닌다는 도바츄들이나 매한가지일세. 실로 돼지 목에 진주 목걸이가 아닌가 말이야. 불 조절조차 제대로 못 하는 녀석한테 왜 그런 스킬이 붙은 거지? 하.”

“끄으응….”

비웃는 듯도 하고, 질타하는 듯도 한 센의 목소리에 뒤따라 카르티가 끙끙거리면서 앓는 소리가 겹쳤다. 조금 웃음이 나서, 입가에 웃음을 띤 채로 천천히 다가갔다.

“아, 손님이신가요? 어서 오세….”

“왔냐. 어젯밤은 잘 곳이 따로 있었던 모양이군.”

“에?”

카르티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대체 어떻게 알아본 거지? 센의 눈만은 대체 어떻게 커스터마이징을 해도 속일 수가 없었다. …독심술?

“…로제? 너야?”

“카르티. 좋은 아침.”

“통 적응이 안 돼….”

카르티는 한숨을 푹 내쉬고는 잠시 일손을 놓고 다가왔다.

서로 팔을 벌린 뒤 가볍게 포옹했다. 카르티는 의외로 이런 스킨쉽을 꽤 좋아하더라.

조금 길다 싶은 포옹이 이어졌다가 떨어졌다.

“밥은 먹었나?”

“네, 오면서 적당히… 그 사람은?”

여기서 ‘그 사람’이란 늑대원숭이를 말하는 것이다.

내가 갑자기 사라지는 바람에 놀랐을 텐데. 본의 아니게 폐를 끼쳤으려나.

“제자 말이지? 어제는 들르지 않았다. 아마 그쪽 동향이라도 보고 있는 것이겠지.”

어제의 회담이 어떻게 마무리되었는지도 신경이 쓰였다. 루시탄이 말하는 눈치로 봐서는, 결코 온건하게 끝나지는 않았을 것이고 파국으로 치달았을 거라고 막연하게 짐작했을 뿐이다.

좀 더 구체적인 얘기를 듣고 싶은데.

“너도 너대로 꽤 큰일에 휘말렸었던 눈치던데? 조수가 걱정을 많이 하더군.”

“윽. 아니 뭐어… 그야 당연히 걱정하지. 여기서 먹고 자고 한다는 녀석이 내가 오자마자 안 들어오고 그러면. 무슨 일이라도 있었어?”

무슨 일… 있기는 했지.

조금 겸연쩍어져서 볼을 긁적였다. 센의 눈이 가늘게 좁아졌다.

“걱정할 일은 아니었나 보구만.”

“아니, 그게…”

카르티를 잔뜩 걱정시켜놓고 어제 여관방에서 남자랑 잤다고 얘기하기는 참 민망한 일이었다. 아직 허리가 지끈거릴 정도로.

“아니, 그나저나 그 덩치 큰 사람은 제자고, 난 조수야?”

“뭐가 문제지? 기술을 배우고 싶다고 찾아온 건 너다. 처음부터 넙죽 제자 취급으로 받아줄 알았나.”

“사사할 스승을 영 잘못 고른 것 같아.”

“맘에 안 들면 때려치우고 나가든가.”

그래도 카르티와 센의 아옹다옹은 조금 재밌고, 덕분에 그쪽 화제가 옮겨간 건 다행이다.

센은 이러니저러니 해도 남 돌봐주기 좋아하는 사람이고, 카르티도 입이 좀 거칠 뿐 좋은 녀석이니 케미가 맞을 것이다. 카르티의 입 험한 건 역시 양부 케라우노스의 영향이겠고.

“그럼 서로 정보나 교환해보도록 하자고. 밥이라도 먹으면서 말야.”

뭐… 간단한 빵과 수프 정도로는 조금 배가 덜 찼으니 괜찮으…려나?

대장간에서 챙기는 아침은 다소 과했지만, 여기야 그만큼 힘쓰는 일을 하는 곳이니 당연하다 싶지만… 먹을 때마다 기가 질리곤 했다.

“넌 먹을 수 있을 만큼만 먹고. 조수, 넌 전부 다 먹어라. 남기지 말고.”

“…명백한 차별 대우 아니우?”

“아둔한 놈. 넌 먹어야 힘을 쓸 것 아니냐?”

그리고 그 예감은 여지없이 들어맞더라.

커다란 탁자에 여지없이 늘어놓아지는 탄수화물과 단백질, 그리고 지방의 삼중주에 보기만 해도 기가 질린다.

“전부터 궁금했던 건데….”

호밀을 구운 빵과 귀리죽, 누에콩이 들어간 스튜가 아직도 솥 안에서 부글거렸다.

누에콩 스튜에는 양배추와 베이컨, 소시지가 잔뜩 들어가 셋이 아니라 여섯 명은 먹어야 할 양인데, 카르티도 꽤나 질린 기색을 보였다.

버터를 발라 구운 송어, 치즈, 그리고 이 세계에 처음 왔을 때는, 이게 대체 무슨 새의 통구이인가 하고 생각했던 칠면조만큼 커다란 닭. 거기에 애플 파이까지.

이게 다 한 끼 식사랜다.

“…이거 다 누가 만드는 거예요?”

설마 센이?

저 무뚝뚝한 대장장이 영감이 화덕에서 스튜를 뒤적거리고 청어에 버터를 발라 굽고 있는 광경은 영 상상하기 힘든데.

카르티가 호밀빵을 우물거리면서, 데운 우유를 한 모금 삼켰다.

“직인 거리에 거래를 튼 여관이 있대. 가게 이름이 ‘회색곰과 연어’였던가. 거기서 사 온다나. 근데 거기 여급 눈치가 아무래도 스승한테 흑심이 있는 것 같아. 속 알맹이야 얼마나 곯았던… 겉모습만은, 훤칠하잖아?”

“어이, 쓸데없는 말 하지 마라, 조수.”

속 알맹이가 곯았는지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센의 겉모습은 확실히 아직도 팔팔한 청년으로 보인다. 무뚝뚝한 인상이지만 말끔하게 꾸미면 제법 태가 날 얼굴을 하고 있으니, 무리도 아니지.

“에이, 왜. 거기 여급 꽤 예쁘장하게 생겼잖아. 스승도 아예 싫은 눈치는 또 아니고. 한번 잘해보지 그래요?”

“그 입으로 쓸데없는 소릴 늘어놓을 여유가 있으면 먹기나 해라. 어차피 언제 떠날지 모를 일인데 괜히 귀찮은 일은 만들지 않는 게 서로를 위해 좋은 일이라고.”

“그야 스승이 데리고 다니면 되지.”

만난 지 며칠 되지도 않은… 카르티와 센의 의외로 죽이 잘 맞는 모습을 보며 귀리죽에 빵을 찍어 삼켰다.

“거기다가 네 녀석이 남 말할 처지가 아니지. 너도…”

“악, 그 얘기는 반칙!”

뭐야. 카르티한테도 신경 쓰이는 상대가 있었나?

조금 궁금해졌다. 대체 누구야? 내가 아는 사람?

센은 싱글거렸고, 카르티는 부루퉁한 표정으로 빵을 세 개째 씹었다.

애매모호한 분위기 속에서 스튜를 한 그릇 퍼다 담으면서 화제를 조금 돌리기로 했다.

그나저나, 나도 여기서 밥을 얻어먹는 게 며칠째다보니 위장이 좀 커진 것 같다… 다이어트 해야 하려나.

“그래서 어제 결국은 어떻게 되었던 거에요? 그 뭐지… 4번가에서 농성 중이란 얘기랑, 거기 우두머리 둘이 잠적했단 얘기까진 들었는데.”

“나도 오면서 들은 얘기지만, 결국 강제 진압에 들어간다고 하더군. 길드 녀석들은 다리를 건너고, 영병들이 3번가, 5번가에서 동시에 들이친다고 들었다.”

석연찮은 구석은 있지만… 이 도시의 라오후 사태도 그렇게 일단락될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과연 그렇게 허무하게 끝날까, 하는 의혹이 한 점 남았다.

“왜 그래? 로제, 너 표정이 그닥 안 좋은데.”

“실은 어제, 일이 있긴 있었는데요.”

걱정스러운 표정의 카르티와 이쪽을 조용히 응시하는 센.

어디부터 말해야 할지 조금 고민하고는, 숨을 들이마셨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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