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1화 〉 2 7 / 가끔은 휴가를 받고 싶은 골렘 웬즈데이에게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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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 병의 술. 두 잔의 글라스.
그리고 간소한 안주 한 접시에 촛불 하나면 자리는 충분했다.
“서로의 빡셌던 1년에 건배.”
느탈리 4년산 이랬던가. 이걸 마시고 정신을 바로 잃어버렸던 기억이 난다.
값비싼 포도주라고 했지만 모처럼의 재회인데 이 정도 사치는 부려야겠지.
맑은소리를 내며 가볍게 잔이 부딪치고 한 모금 마셨다.
여전히 머리가 얼얼할 정도로 독했지만, 이번엔 알고 마시니만큼 바로 정신을 잃거나 하진 않았다. 다만 너무 급하게 취해버리지 않도록 미리 주문을 걸어놓은 것은 비밀.
첫맛은 달게. 끝맛은 쌉쌀하면서도 짙게 여운이 남는 맛.
술기운이 후욱 올라와 입 밖으로 나오는 숨이 더웠다.
“하아아…”
역시 독하네, 이거.
만만치 않은 술자리가 되겠는데. 안주로 나온 구운 소시지를 잘라 입에 넣었다.
소시지는 맥주 안주라는 인식이 있긴 하지만, 술이 좋으니 뭐든 잘 받는다.
“휴우, 좀 살 것 같네.”
“이거 꽤 독한데 어째 잘 마신다? 좀 마셔봤나보지?”
“그렇지, 뭐어.”
말에 살짝 질투가 섞여있는 것도 같았지만 가볍게 넘겼다.
어차피 이 녀석과 사귀거나 그런 관계도 아니니까.
“우루 늪지에서 겨우겨우 돌아온 다음에 뒤풀이로 한번 마셨었어. 그땐 한 잔도 제대로 못 마셨지.”
카르티는 정말로 죽을 뻔했고.
자연스럽게 카르티와 케르 씨에 대한 이야기로 화제가 옮겨갔다.
그리고 우루 늪지에서의 일에 대해서도.
“…거기에서 봤던 해골 무더기 꿈은 아직도 가끔 꾼단 말야. 진짜… 최악이었어.”
한 모금 홀짝거렸다.
그 키메라 둥지 앞에서의 해골더미는 결국 정체가 뭐였는지 지금도 알아내지 못했었다.
루시탄도 한 모금 마주 삼키면서 미간 사이에 주름을 깊게 잡았다.
이러려고 꺼낸 얘기가 아니었는데.
“아~ 됐어. 술맛 망치네. 네 얘기도 좀 해봐. 어떻게 지냈어? 성기사 흉내까지 내고 말야.”
“흉내가 아니라고 하면?”
엥?
성직자랑은 세상에서 가장 동떨어진 것처럼 보이는 녀석이 흉내가 아니라고 해 봤자 그다지 설득력은 없다. 자랑스럽게 벗어둔 옷가지 사이에서 태양십자가 새겨진 팬던트를 내밀면 믿을 수밖에 없지만.
“정식으로 수계를 받은 성직자라고.”
“아니, 대체 왜?”
성직자는 그 뭐냐… 청빈한다든지, 그런 이미지이지 않았어?
물론 뒤로 딴주머니 차고는 점잔뺄 수도 있겠지만 이 녀석은 대놓고 돈 버는 걸 좋아하는 녀석이었는데.
“그렇게 놀랄 것도 아냐. 이 나라에서 아버지의 압력을 어떻게든 피하려고 방법을 찾다 보니 결국 제일 나은 방법이 이거더라고.”
그렇게 불순한 동기로 성직자의 길을 걸어도 되는 거야?
실재하는 신이 세상에 간섭하는 세계에서 불경죄로 천벌을 받거나 하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동기야 어쨌든간에 너는 조금 신실한 생활을 해볼 필요는 있겠지. 난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
어차피 남의 일이니까 나랑은 별 상관없는 이야기.
녀석과 운명공동체였던 것도 1년 전의 이야기였으니까.
“그래서, 성기사님께서는 어쩌다가 깡패들이 활개를 치는 도시에 오셨는가가 좀 궁금한데. 우연이라고 하진 않겠지?”
“물론 우연은 아니야. 하지만 흠… 그건 다음에 또 이야기할 기회가 있겠지. 지금은 당면한 일이 더 급하니까.”
“당면한 일?”
루시탄은 제 몫의 소시지를 잘게 잘라 입 안에 넣고 우물거렸다.
후추가 잔뜩 들어갔는지, 순간 코끝이 찡한 모양이었다.
“셴 타이펑… 과 신 쉬푸. 라오후의 핵심 간부들 얘기인데 결국 영주의 소환에 불복하고 잠적해버렸어. 라오후 측은 4번가에서 농성을 벌일 예정이라더라고. 결국 길드와 영주성에서 협력하기로 했어. 길드에서는 이번 기회에 라오후는 물론…”
가늘어지는 그 눈에서, 조금 유감스러운 기색이 읽혔다.
“…걸리버들까지도 이 도시에서 몰아낼 생각인 모양이야.”
께름칙한 말이었다. 물론 난 이 도시에 살거나 하지도 않았고, 여러모로 이 도시에서 험한 꼴만 당하긴 했지만, 그래도 저쪽풍 라면을 먹을 수 있는 장소가 하나 줄어든다는 건 섭섭한 일이야.
어쨌든 4번가의 걸리버들이 라오후의 사업에 동조하여 이득을 챙긴 사실이 있으니만큼, 설령 축출을 피한다 하더라도 ‘걸리버들의 도시’라는 캐치프레이즈로 영지를 알리는 일은 앞으론 없겠다 싶었는데… 가만.
“그럼 동항로 회사는?”
“그쪽에 대한 혐의는 불문에 부치고 넘어가기로 영주성과 길드 사이에 얘기가 된 것 같아.”
“잠깐, 그게 말이 돼? 동항로 회사… 그쪽에 연관된 어딘가가, 이번 일의 진짜 원흉인데?”
“흥분하지 마.”
루시탄은 잔에 반쯤 남은 느탈리 4년산을 삼키고, 내려놓았다.
분해보이는 얼굴에 술기운이 불그레하게 올라왔다.
녀석도 몹시, 그 결론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복음회’. 녀석들의 이름이야. 다른 수많은 이름의 점조직이 있다고 생각하지만 지금까지 파악된 것만으로는 이 이름으로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어.”
복음회.
이 나라에서 가장 음험하게 암약하고 있는 단체의 이름치고는 지나치게 경건하잖아.
니이냐, 노엘… 그리고 아마도, 발스턴까지. 어떤 식으로든 그들과 연관되어 있을 것이다.
루시탄을 왕위에 올리려 했고, 로젤라이를 죽였고, 우루 늪지에 키메라를 풀어놓고, ‘미미르’ 물약으로 무엇인가의 공작을 꾸미던 비밀결사.
셴 타이펑이나 신 쉬푸가 잠적한 것도 어쩌면 그들의 노림수가 아닐까? 그 둘이 없다면 라오후에서 지금껏 풀지 않았던 미미르에 그들이…
“그 녀석들은 라오후가 이제껏 쌓아두고 있던 미미르 물약을 풀어놓으려 할 거야. 루시탄, 그냥 덮고 넘어갈 일이 아니야. 난 봤어, 라오후 녀석들….”
입술을 깨물었다. 입이 바짝바짝 탔다.
라오후 회담장의 뒤뜰에서 보았던 것. 그건… 나도 여기에 오기 전에는 몰랐을 것이지만, 분명 양귀비였다. 아편의 원료… 그게 어떻게 이 세계에 있을 수 있는지는, 나중 문제다.
“…저쪽 세계의 마약을 재배하고 있었다고. 그걸 미미르에 섞어서 풀기라도 하면 사태가 걷잡을 수 없게 돼.”
“일단 진정해. 녀석들이 농성 중인 4번가는 지금 길드와 영병들이 포위망을 짜놓았어. 그 밖으로 약이 샐 사태는 일단 없을 테니까.”
…일말의 불안감은 있긴 하지만, 루시탄을 다그쳐봐야 당장 특별히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하지만 이 불안감은 대체 뭐지…?
“하지만 나 역시도 지금 이대로는 불충분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어. 내일 시장을 만나서 확인해볼 테니, 그때 같이 가 줘.”
“어쩌다가 일이 이렇게 커졌는지 모르겠어.”
내일 아침이라.
조급해봐야 소용이 없다. 술기운이 슬슬 돌아 머리가 무거웠고. 툭, 녀석의 어깨에 나도 모르게 이마를 기대어 있었다.
“…그래도, 이렇게 있을 수 있는 건 조금… 좋네.”
사실이었다.
루시탄의 손이 가볍게 어깨를 쥐었다. 시선이 올라가 마주보고, 자연스럽게 입술이 포개어졌다.
1년 전 레짐에서도 이렇게 어깨를 잡혔었던가?
이 녀석 어깨 페티쉬라도 되나. 엉뚱하게도 그 생각이 들었다.
“후, 응….”
숨이 새었다. 그리고 다시 맞닿아, 갇혔다.
갈 곳 없는 서로의 숨이 맞닿은 혀 사이에서 찐득거렸다.
정확히 그때 녀석의 손의 느낌을 기억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그때보다 조금 단단해졌고, 손바닥도 다소 거칠어진 것처럼 느껴졌다. 손아귀 힘도 조금… 늘었나?
저 나이의 남자아이는 하루가 다르게 큰다고 조교 오빠가 말했던 것도 같은데, 1년 만에 이렇게 달라진 것을 실감하니 꽤, 감회가 새로웠다.
그건 아무튼.
“너 말야… 그동안 꽤 쌓였었나 보다?”
우와, 술기운이 핑핑 도는 머리로도 한 대 때리고 싶어졌다.
녀석의 말이 맞고 틀리고를 떠나서 그런 말을 대놓고 할 수 있는 뻔뻔함에는 정말 한 방 날리고 싶다.
“내 탓이… 아니거든. 그 너도… 봤잖아. 이상한… 동충하초 자식. 그 자식이… 내 마나맥에 뭔가 술수를… 걸어놓은 게, 조금….”
손에 힘이 살짝 들어가지 않는 걸 다행으로 여겼으면 한다.
안 그랬으면 일전에 그랬던 것처럼 이를 악물어야 했을 테니까.
지금은 표정을 보이고 싶지 않아 몸을 돌리고, 대신 어깨에 등을 기댔다.
숨을 삼키는 소리가 났다. 낮았다. 웃음 같았다.
“…뭐야, 왜 웃는데.”
“안 웃었거든.”
겨드랑이 사이로 녀석의 손이 천천히 뻗어왔다. 원하는 게 뭔지는 다소 뻔했다.
가늘게 뜬 눈으로 눈웃음치면서, 살짝 턱을 들어 루시탄의 입술에 제 입술을 맞췄다가, 떼었다.
“속세의 부정한 계집한테 이렇게 치근덕거려도 되는 건가요, 성기사님?”
“뭐어, 여신한테는 너도 같이 변명해달라고.”
생각해볼게.
크고 단단하게 여물은 손이 가슴을 덮었고, 이내 살살 그 손에 힘이 들어갔다.
주물러내는 손길이 달게 느껴졌다. 허리에 힘이 살짝 풀린다.
조금, 꼭지가서버렸다….
“…크게 해 줘?”
그 정도는 이제 정신집중을 거치지 않고, 커스터마이징 룸에 들어가지 않아도 어느정도 조절할 수 있지만 녀석은 그저 웃고는 천천히 손을 움직였다.
거칠고 단단한 손끝이 맵게, 젖꼭지 위를 지분거리며 눌렀다. 살짝 넓어진 유륜을 간질이듯 스멀거리는 느낌이라, 콧소리가 살살 새고 있었다.
“으, 응… 거기이. 젖꼭… 지이. 만지는 거. 좋, 아… 하아, 흐윽….”
그러고보면, 만족스럽게 자위를 했었던 것도 꽤 오래되었다.
딸감으로 웬즈데이를 썼다가 얼결에 즈왈트를 소환해버린 이래 제대로 풀지를 못한 욕망이 나도 모르게 쌓여서, 넘실대고 있었나보다.
“루시탄….”
그 감정이 얼굴에 드러났을까.
네 얼굴에서도 같은 감정이 읽힐까.
루시탄의 손이 내 뺨을 쓰다듬는다.
말 잘 듣는 강아지처럼 그 손에 뺨을 비볐다. 번져오는 온기에 조금 눈꺼풀이 떨렸다.
바들거리는 눈꺼풀 사이로 까닭모를 감정이 넘치려 하는 것은, 지금은 참아야 했다.
“우, 응… 하아, 읍. 후으….”
아마 그 감정들을 오늘 밤,
넘치도록 풀어야 할 것 같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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