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0화 〉 2 6 / 1년 만에 만난 너희들에게(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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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그래, 키가 자라있었다.
단정했던 금발은 꽤 오랫동안 제대로 된 손질을 받지 못한 것처럼 어설피 길어, 한데 묶여 뒤로 늘어뜨렸다.
누가 봐도 어리고 치기 등등했던 소년은, 이제 그 자신이 질투했던 형과 같은… 어렴풋이 아이의 태를 벗고 남자로 자라나는 중이었다.
다만 그 파란 눈동자만은 달라지지 않았다.
약빠르고 조금 교활한 인상을 주는 눈매 아래, 커다란 눈망울은 여전히 그 시절 소년다운 장난기 어린 기색을 품고 있었다.
그 사실이 반가웠지만… 얼굴로 드러내고 싶지 않았던 건, 내가 변해서였을까.
”…루시탄.“
그 이름을 부르고 나자, 비로소 이 재회에 겨우 현실감이 느껴졌다.
잠시 뭐라고 말을 꺼내야 할지 목이 잠겼다가, 전혀 엉뚱한 답이 튀어나왔다.
”너… 건방지게 나보다 키가 커졌잖아. 징그러워.“
”이봐, 1년 만에 보는 건데 첫 마디가 그거야?“
1년 전에는 나보다 키도 작고 누가 봐도 나보다 어려 보이던 녀석이 불쑥 커졌어 봐.
징그럽게 느껴지는 거야 당연한 일이지.
”대체 무슨 일이 있었으면 1년 사이에 사람이 이렇게 변한대.“
”그건 내가 할 말인데. 너도 엄청 변했잖아.“
녀석이 웃었다.
변하지 않은 건 눈매만이 아니었다. 웃는 얼굴도 예전 그대로다.
거기에 조금 안도하고 있었다.
안도하고 나니 온몸에 힘이 쭉 빠져서, 다가온 루시탄에게 조금 몸을 기대야만 했다.
”좀… 받쳐줘. 머리가 울리고 막 그래. 힘도 없고. 좀 부축해 봐.“
”…못 보던 사이에 꽤 뻔뻔해졌고 말야.“
누가 할 소린지.
감히 왕자더러 몸을 대라고 하다니, 하고 녀석은 키득거리면서도 팔을 둘러 내 몸을 선선히 지탱해주었다. 갑옷이라 조금 불편하지만 이 정도도 감지덕지다.
눈꺼풀이 무거워서 참을 수가 없다….
”잠깐 자고 있어. 깨고 나면 서로 할 얘기가 서로 많을 테니까.“
”…나… 자는 사이 멋대로 만지면 죽는다.“
녀석이 흠칫하는 반응을 보였다.
내가 자는 사이 뭘 하려고 했던 거야. 투덜거리면서도 지금은 그냥 몰려오는 졸음에 몸을 맡기기로 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나는 이 녀석을 믿고 있는 것이다.
”…….“
그리고 그 믿음은 불과 반나절 만에 무참히 뒤통수를 맞아야 했다.
낯선 여관방의 침대에서 일어난 건 좋다. 어차피 루시탄이 센의 대장간에 대해 알고 있었을 리도 없었고, 매일같이 거기에 얼굴을 비치는 것도 민망한 일이지. 청소도 잘 되어있고.
침대가 폭신한 것도 고마운 일이다. 이 세계에서는 꽤 흔치 않게 솜을 잔뜩 넣어 푹신푹신한 게 기분 좋다. 다 좋은데…
”대체 어느 틈에 이렇게!“
홀딱 벗겨놓을 수가 있냐고!
지금 난 솜이불 한 겹 외에 내 몸을 가리고 있는 게 전혀, 없는,
훌륭한 알몸이었다.
”루시탄, 이 변태 왕자가 진짜…!“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사실 틈이라면 잔뜩 있었지.
모처럼 엄청나게 꿀잠을 자버렸겠다. 요 1년 동안 이렇게 잘 잤던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돈데. 말 그대로 누가 업어가도 모르게 자버렸지. 그래, 누가 뭘 하든지간에 절대 깨지 않을 정도로 잠들었다, 이 녀석을 믿었다고!
그런데 그렇다고 냅다 벗기거나 하냐고 보통!
”오, 일어났어?“
게다가 녀석은 시원하게 샤워까지 한 판 조지고 온 모양.
얼마나 사치를 부리는 건지, 몸에서 모락모락 김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눈을 가늘게 뜨고 흘겨보려는데… 조금 놀라고 말았다.
자신의 기억에는 없는 잔상처와 멍 자국이 녀석의 몸에 줄지었다.
뼈가 단단히 여물었고 근육이 두툼해진 것이 전혀 그쪽에 대해 알지 못하는 나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을 정도다.
넓어진 어깨를 으쓱이며 너스레를 떠는 몸짓만은, 예전 그대로였지만.
”너무 그렇게 빤히 보진 말지? 불경죄로 잡혀갈라.“
”아니, 이 상황에서 불경죄를 운운하는 거야?“
조금 어이가 없다.
눈을 떠보니 낯선 여관에서 옷을 전부 벗겨진 채 침대에서 쿨쿨 자고 있었던 상황이잖아.
불경죄라고 따져야 할 쪽이 어느 쪽이냐고, 이 상황에서.
어쩌겠어, 상대는 왕자인데. 미천한 내가 숙이고 들어가야지.
”…어디의 누가 밀고하지 않으면 괜찮겠지 뭐. 그나저나… 어떻게 된 거야?“
여러 가지 뜻을 함축한 질문이었다.
대체 1년 만에 사람이 완전히 달라져서 나타난 것 하며, 여기에 타이밍 좋게 나타난 것 하며. 이 만남을 순전히 우연이라고 편하게 생각하기에는, 난 좀 세상 때를 많이 탔다고.
”재미없는 일부터 묻기는.“
녀석의 말이 조금 힐난하는 투였다.
그래, 1년 만에 만나서 처음 나누는 대화가 다소 건조한 화제였다는 건 인정하지 않을 수 없지만, 그래도 궁금한 건 궁금한 거지. 난 궁금한 건 못 참는다고.
”여기에서 널 만난 건… 반은 우연이고, 나머지 반은 내가 좀 손을 쓴 거긴 해. 찬찬히 이야기해 봐야 알겠지만, 아마 너랑은 같은 일 때문에 마주친 게 아닌가 싶어.“
그렇다는 건 루시탄도 내가 요 얼마간 겪었던 사건의 전모에 자기 쪽에서 개입하고 있었단 뜻이려나.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 한편에 조금 훈기가 돌았다.
장소는 달랐어도, 출발점은 달랐어도, 결국 1년 전의 레짐에서의 일과 마찬가지로, 난 결국 이 녀석과 같이 있었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사실이 조금… 기쁘다.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다.
어쩔 수가 없네, 정말로.
”루시탄, 너… 꽤 인상이 변했네. 그러고보니. 우락부락해졌고 말야. 고생 좀 했나봐.“
”…우락부락.“
거침없는 단어 선택은 여전하다고, 루시탄은 웃었다.
어깨를 한번 으쓱이며 너스레를 떠는 건 확실히, 루시탄다웠다.
”아아, 고생 좀 했지. 너도 만났잖아? 칼 프레드릭 바츠 경. 한동안 바츠 경에게 검을 배우면서 이래저래 일이 있었거든. 절대 인정사정 봐주지 않는 사람이라 이만저만 고생이 아니었어. 그래도 뭐, 적어도… 왕도에 비하면 훨씬 홀가분했지만.“
역시 그 사람… 센에게 검을 주문하러 왔던 그 사람이 루시탄의 지인이었구나.
그제야, 어디서 봤는지 생각이 났다.
”그래, 기억났어. 분명 그때 동항로 회사의 왕도 여각에서…“
읏, 거기까지 생각하고 나니 생각나버렸다. 왕실 호위 기사, 뭐 그런 인상이었던.
그 영감님한테 이 녀석한테 기습 키스 당했던 것도 훤히 보였었지… 몹시도 부끄러워져서, 얼굴을 돌리고 끄응 앓는 소리를 냈다.
”너만큼은 아니지만 나도 조금 분주히 돌아다니느라 다소 피곤해. 일단 이 이야기는 여기까지만 하자고. 일 얘기를 할 시간은 앞으로도 많잖아? 좀 앉는다.“
하체를 제외한 몸을 드러낸 채로 녀석은 물기 어린 머리를 털었다. 묶고 있던 머리를 풀어헤치니 대충 어깨를 조금 넘을 정도로 자라있었다.
언제고 저 머리를 꼭 정리해주겠다고, 때아닌 사명감에 불타고 있을 즈음, 루시탄은 천천히 다가와 침대에 풀썩 주저앉았다.
”…너 말야. 지금… 그 뭐냐. 지금 스킬 쓰고 있는 거 아니지?“
”응? 이상한 걸 물어보네… 아닌데. 그건 갑자기 왜?“
”그야 좀… 야윈 것 같아서. 피차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나 싶어. 아니, 그보다…“
오히려 루시탄의 변화에 놀란 건 이쪽이다.
내가 기억하기로는 이 녀석, 반쯤 귀양살이이긴 해도 자기 영지에서 나름대로 잘 먹고 잘 쉬고 있을 거로 생각했는데, 어디 무사 수행이라도 다닌 것처럼 변해버렸단 말이지.
”…보고 싶었어. 그래도 건강해 보여 다행이다.“
”나도 보고 싶었어. 루시탄.“
게다가 꽤 뻔뻔해졌고.
겸연쩍은 얼굴로 뺨을 긁적이는 모습은 영락없이 그 시절 루시탄이었다.
하지만 그건 그거, 이건 이거.
”근데 말야. 너… 한 가지 제대로 설명해야 할 일이 있지 않아?“
”뭐가?“
”뭐가가 아니잖아? 너… 진짜 옛날이고 지금이고 왜 이렇게 손이 빠른 거냐고. 모처럼의 재회하는 장면이 마치 호텔 방에서 원나잇 뜨는 것처럼 되어버렸는데.“
“부탁이니까 내가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따져주시지. 걸리버.”
조금 욱해버린 나머지 찌르는 듯한 말투가 되어버렸지만, 오히려 그래서 녀석은 얼른 알아듣지 못한 것처럼 굴었다. 뻔뻔함에 부아가 치밀면서도, 꽤 오랜만인 이런 대화를 그리워하고 있었다는 걸 깨닫고 있었다.
“너 꽤 다쳤잖아. 거기에 며칠간 만족스레 쉬지도 못하고. 그래서 씻기고 재우느라 부득이하게…”
주섬주섬, 말을 이어가던 녀석이 돌연 입을 꾹 다물었다. 마음에 없는 말을 잘 하지 못하는 그런 면모는 여전하네.
“혹시 너, 여기에서 계속 날 지켜보고 있었던 거야?”
“음.”
입을 꾹 다물고 눈앞의 죄없는 꽃병을 잠시 노려보던 녀석이 이쪽으로 홱 몸을 돌렸다. 눈가에 주름이 꾹 잡힌 그 표정은 분명 못된 짓을 꾸미는 악동의 얼굴이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1년 전 레짐에서 ‘알리바이’를 만들자고 했던 그때의 이 녀석과 똑같은 표정을 짓고 있다!
이불을 확 어깨까지 끌어올리며 경계하려는데…
“뭐, 역시 변명은 나답지 않지. 어때, 일단 알리바이를 만드는 게.”
키득 웃고는 다가왔다. 역시 그거냐, 고…!
“읍…”
손이 어깨를 짚었다.
새삼스럽게, 입술을 눌러오는 감촉이 1년 전보다 훨씬 거칠어졌다. 까끌까끌하고 조금 말라있는 키스의 감촉에 볼이 확, 불에 데인 듯이 달아올랐다.
“읍, 후으. 으응….”
맨살에 와닿는 감촉을.
강하게, 강하게. 의식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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