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9화 〉 2 6 / 1년 만에 만난 너희들에게(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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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손바닥에서 핏방울이 줄기로 이어져 떨어졌다.
기세를 타서 제정신을 차리기 위해 강짜를 부린 것이 벌써 후회가 된다.
하지만 투덜거리고 있을 수만은 없지.
숨을 들이마셨다가 내뱉으면서, 눈앞의… 실체든 환영이든, 악연을 향해 지팡이를 겨누었다.
“읏…!”
마나를 쥐어짜인 마나맥이 묵직하게 욱신거렸다.
그럴 만도 하지. 꽤 오랫동안 혹사하고 있었으니까.
최근 며칠간은 더더욱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오히려 다친 몸을 무리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아직 퍼지면 안 돼.
“…Shooting!”
짤막한 영창과 함께 마력으로 짜내어진 화살이 한 발, 허공을 베어 갈랐다.
착탄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바로 이전에 쏘아냈던 한 발보다 오히려 위력이 줄어들어, 놈을 두어 발자국 물러서게 하는 데 그쳤을 뿐이다.
“…쓸데없이 끈질긴 것까지 똑같을 필요까진 없는데.”
눈구멍에 이글거리는 원한도, 증오도, 살의도 그대로다.
나도 하나밖에 없는 눈에 똑같은 감정을 품고 있으려나.
그에 반해 호기롭게 말한 것치고는 주문이 제 생각만큼 날카롭고 빠르게 이어지질 않은 점이 여전히 답답했다.
초조해하면 안 되는데.
초조함은 집중력을 흐트러뜨리고, 집중력이 흐트러지면 주문이 제대로 구성되지 못한다.
자기 피도 봤는데도 여전히 머릿속은 어지럽고, 구토가 올라올 것 같고, 가슴이 두근거렸다.
끼기기기긱, 끼긱, 긱…
지금만 해도, 녀석의 녹슨 칼이 바닥에 끌리는 소리에 털이 쭈뼛 설 정도로 긴장하고 있다.
아무리 각오를 다져봐도, 마음 한구석에 있는 그에 대한 두려움을 어쩔 수가 없는 걸까.
“웃기지 마, 무서운 게 아니라 좆 같은 거라고….”
손톱이 손바닥에 파고들도록 손바닥을 움켜쥐면서 숨을 내쉬었다.
피가 빠져나가서인지, 아니면 아직 떨쳐내지 못한 두려움 탓인지 달달 떨리는 손끝이 조금 차갑게 식은 것처럼, 감각이 둔했다.
조금 마력량은 아슬아슬하지만…
“Emeth!”
단단한 돌바닥에는 내 피가 흩뿌려졌다.
거기에 마력을 흘려 넣는 것만으로도, 골렘을 급히 한 마리 불러내는 데에는 충분했다.
“뭉개버려!”
검은 돌로 된 몸뚱이를 일으켜 세우면서 낮게 골렘이 으르릉댔다.
급하게 불러낸 골렘은 바닥의 돌과 흙더미로 얼기설기 이어진 조악한 꼴이었다.
넉넉히 잡아도 10초쯤이면, 다시 돌무더기로 무너질 테지.
그러니까… 여기에서 승부를 낼 수밖에 없다!
「공격」이라는 명령에 골렘이 다리를 움직였다. 무겁게 움직이는 발걸음을 뗄 때마다 몸에서 돌과 흙이 후두둑 떨어졌다.
오래… 버틸 수가 없어.
마나맥이 지끈거렸다. 숨이 거칠어졌다.
골렘이 주먹을 들었다. 흙을 아무렇게 날리면서, 내뻗는 것과 동시에 무너지는 골렘의 팔.
다리를 절면서 녹슨 검을 그 손바닥에 찔러넣는 것이 느껴졌다. 마치 손바닥의 상처를 노리고 찌르는 것처럼 찌릿한 아픔이 스며들었다. 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어?”
그렇기에, 너무나도 쉽게 골렘의 서투른 주먹질에 맞아 쓰러진 것을 보고는 어안이 벙벙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쉽게 쓰러질 리가 없는데…?
주먹질과 동시에 붕괴된 돌더미에 깔린 발스턴의 환영은 아무 움직임이 없었다. 입술을 꾹 깨물고, 지팡이에 의지하여 다가갔다.
환영이든, 아니든… 그리고 죽었든 살았든.
이번에야말로, 내 손으로 직접.
그렇게 다짐하면서 다가간 돌무더기 아래에 깔린 건 허무뿐이었다.
분노가 치밀었다. 머릿속 심지가 끊긴 느낌이었다.
실제가 아니라 환영일 뿐이라고, 허상일 뿐이라고 재차 자신을 다그쳤긴 했지만, 그게 사실이 되니 더 열이 뻗쳤다.
물론 그 분노가 누굴 향해 뻗었는지는 말할 필요조차 없겠지.
지팡이 끝이 움직였다.
“…끝난 건가? 그다지 흥이 오르지 않는 싸움이더군.”
“아, 그러셔…! 죽여버린다, 이 동충하초 페티쉬 새끼야!”
남의 트라우마를 들쑤셔놓고는 유흥 취급을 하는 태도가 무엇보다 열받았다.
이 독버섯 같은 자식한테 한 방 먹이지 않으면 성이 안 풀려!
“동충하초… 페티쉬? 뭐지, 그건….”
저 멍청한 태도마저도, 지금은 한없이 열받는다.
지팡이를 다른 손에 쥐었다. 방금 전에 골렘을 불러냈던 것으로 마력은 텅 비었다.
그러니까 지금 녀석의 수조에 날아간 것은 그냥 돌멩이일 뿐이다.
적어도 억지로 짜낸 화살 주문보다는 낫겠지!
하나, 둘, 셋, 넷…
슬슬 투수들을 존경하게 될 때쯤, 파열음과 함께 녀석의 수조 전체에 얇게 금이 가 있었다.
아까와는 달리 수조를 원래대로 되돌리거나 하지 않고, 녀석은 여전히 묘하게 나른한 표정으로 눈을 멍청하게 껌뻑거리고 있었다. 아직도 동충하초 페티쉬가 뭔지를 생각하고 있는 거 아냐?
“호오, 호오… 그렇군. 너 또한 도래인이었나.”
뜻 모를 헛소리를 지껄이는 그 얼굴에 겨누고… 스트라이크!
다섯 번째 돌멩이가 정확하게 얼굴께에 날아가 부딪혔다.
파열음이 높게 일면서, 녀석의 수조가 마침내 박살났다. 안을 채우고 있던 붉은 액체가 흘러넘쳐 바닥에 남실거렸다. 그런데…
“…대체 이게 무슨 냄새야….”
“쓸모없는 계집이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쓸모는 있을 것 같군. 내 거처를 부쉈으니….”
수조 안에 잠겼을 때와 마찬가지로, 중력이 작용하지 않는 것처럼 공중에 둥둥 뜬 채로 녀석이 깨진 수조에서 빠져나온다. 뭔가 녀석의 기분을 단단히 거스른 것 같다.
“대신, 그 몸을 받도록 할까.”
“지랄 염병 싸고 있네, 콱 뒈져버려, 이 변태 분재 새꺄!”
상관없다. 나도 단단히, 그리고 충분히 기분이 좆같으니까!
녀석의 얼굴을 향해 있는 힘껏 돌을 내던졌다.
그리고 당연하다는 듯 녀석의 몸에서 뻗쳐나온 나뭇가지에 막혀 바닥에 떨어졌을 뿐이지만.
“흠. 법술을 사용하지 않는가? 아무래도 공력이 다 소진된 모양이군. 공교롭지만 꽤 잘된 일이야. 괜히 저항하다가 손상이 생기면 고치는 것도 귀찮으니.”
오싹, 하고 등에 위험신호가 내달렸다.
하지만 정작 몸이 반응하는 것이… 늦었다!
“끅…!”
바닥의 붉은 액체에서 빠르게, 덩굴 식물이 뻗쳐올랐다. 빠르게 자라난 덩굴이 팔다리에 감겨오는 게, 가시를 세우지는 않았지만 나도 곧잘 써먹곤 했던 방식이다… 내가 당하니 기분 더럽네!
“속박 플레이가… 취향인가보네, 이 인삼 새끼야… 레짐에, 그런 거 좋아하는 변태가 좀 있는데, 원한다면 소개해줄 수 있는데 말야.”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잘 알아듣기는 어렵지만….”
하지만 여기서 한 마디 하지 않으면 내가 아니지.
이를 드러내며 있는 힘껏 이죽거렸지만, 녀석은 내 말을 반이나 알아들었는지 의문이다.
“날 모욕하고 있다는 것만은 알겠다.”
“그쪽으로 눈치가 아예 없는 건 아니네? 참 다행이야. 부처님 만만세.”
예수 믿을 것 같지는 않고.
특별히 부처 믿을 것 같은 인상도 아니지만 그쪽에 더 가까워보이니.
“…입 놀리는 것이 조금 천박하군.”
“그런 얘기 좀 듣고 살긴 해.”
녀석이 그 특유의 멍청한 표정을 조금 바꾸었다.
눈을 가늘게 뜨더니 느릿하게 손가락 하나를 치켜들었다. 그 손가락 끄트머리가 기분 나쁘게 꿈틀거렸다. 그 살갗 아래에서 거무스름한 무언가가 몸부림치고 있었다.
툭, 하고 손가락 끄트머리가 갈라졌다. 마치 곤충의 유충처럼 스멀거리는 연녹색 싹은 뭔지모를 체액에 푹 젖어있어 보기만 해도 불쾌감을 자아냈다.
씨발, 그걸로 뭘 어쩔 셈인데! 사람 묶어놓고!
공중에 반 보쯤 떠서, 유령처럼 스르륵 다가온 놈이… 내 로브 앞섶을 붙잡았다. 부우욱, 찢겨나가는 로브 사이로 윗가슴이 드러나 얼굴을 확 붉혔다.
“이, 이거 안 놔, 이 머저리, 변태, 치한 새끼야!
마담 윕에게 당했던 게 떠올라 얼굴에 핏기가 사악 빠져나갔다. 아니, 그 여자는 최소한 내 목숨을 구해준 적이라도 있지, 이 자식은 진짜 최악이야!
”끅, 악…!“
손가락 끄트머리가 겨우겨우 얇게 피부가 덮인 상처 자국을 헤집었다.
일전에 출혈을 막느라 씨를 스스로 밀어넣었던 적은 있었는데, 그때만큼이나 더러운 느낌에 허리가 바들거렸다.
”뭘 할 셈이야, 씨발, 놓으라고 했, 잖…!“
숨이 막혔다. 컥컥거리는 소리가 제 목에서 나오는 거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로 괴상했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좋다. 별로 익숙하지 않은 감촉이다. 신경과 혈관에 스멀스멀 기어가는 뿌리내리는 감촉이.
”흠. 호오. 호오. 경맥을… 이렇게나, 혹사하고 있었을 줄이야. 흠, 게다가 꽤 비대화되어있군. 거기다가…“
힉?!
마나맥에 스멀, 하고 뿌리가 닿은 순간 온몸이 찌릿거렸다.
아픔이나 역겨움이 아니라, 어처구니없게도… 체온이 갑자기 3도쯤 올라간 것 같은 뜨거움이 온몸을 스쳤다.
”학, 학, 하악, 윽…“
묶인 팔다리가 후들거렸다. 마나맥이 자극당해 온몸이 들썩거리고 있었다.
이제껏 꾹꾹 눌러왔던 욕망이 터져 나오려는 당혹감에 입술에 피가 묻히도록 깨물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틈나는 대로… 그 뭐냐, 자위라도 해 둘걸…!
”…경맥이 온통 음기로 가득하다니. 밝히는 계집인가.“
어떤 의미로는 진짜 핀치다. 아니 뭐, 정조고 뭐고 그런 거 없는 년이긴 했지만…
아무튼 진짜로 핀치라고!
”방종한 계집의 몸을 쓰는 건 그다지 내키지 않지만… 그래도 귀중한 소재를 버릴 수야 없지.“
탄식하듯이 말하는 게 짜증났다.
차라리 지나가던 똥개랑 떡을 치지, 너 같은 새끼한테 몸 대주는 건 사양이라고…!
”악, 윽…!“
”괜한 헛수고는 그만두는 게 좋다. 어차피 네 경맥은 지금 완전히 내 수중에…“
녀석의 말이 중간에서 끊겼다.
말을 내보내던 녀석의 목으로 비스듬히, 그 등 뒤에서 무엇인가가 가르고 지나갔다.
”에…?“
나른하게 읊조리던 표정 그대로, 절단면을 미끄러지던 머리가 바닥에 툭 떨어졌다.
그리고 놈의 머리가 붙어있던 뒤쪽이 드러났다.
습격자는… 아까의 회담에서 보았던, 투구를 쓴 교회의 기사… 랬던가?
피 한방울 흘리지 않고 무릎을 꿇고 쓰러지는 몸을 밟고 다가온 그가 손에 든 칼을 조심스레 휘둘러 내 팔다리에 감긴 덩굴을 끊어냈다.
투구 안쪽에서 목소리가 울렸다.
”…괜찮아?“
순간 귀를 의심했다.
너무 자극당한 마나맥이 멋대로 그 녀석의 목소리로 듣게 한 것이 아닌가 생각할 정도였다.
그 녀석이 여기에 있을 리가 없는데.
천천히 그가 투구를 벗었다.
사금으로 잣은 실 같은 금발과, 시리도록 파란 눈동자가 드러났다.
어쩐지 나도 모르게 울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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