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5화 〉 2 6 / 1년 만에 만난 너희들에게(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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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아침부터 신 쉬푸의 장물 가게, ‘이주’에 들어서는 기분은 그다지 달갑지는 않았다.
그야 기분 나쁜 표본으로 들어찬 선반으로 손님을 위압하는 가게가 달가울 리도 없지만 그보다도 천년 묵은 요괴 같은 노인 신 쉬푸가 독을 품은 민달팽이같이 질척거리는 웃음을 띠고 있는 것 때문이기도 했다.
“어서 오시게.”
“…준비는 됐어요?”
인사를 나눌 만한 상대도 아니었기에 본론부터 밀어붙였지만 신 쉬푸는 여전히 비린내가 나는 웃음을 보였을 뿐이다. 굽은 허리를 짚은 채 지팡이를 딸깍거리면서 가게 뒤쪽으로 이어지는 조그마한 쪽문으로 사라졌다.
“저기가 진짜 저승 문턱일 수도 있겠네….”
허무하게 한 마디를 중얼거리면서 쪽문을 열었다. 신 쉬푸의 체격에 맞춘 것인지 들어가려면 허리를 숙여야 했으니, 늑대원숭이는 들어올 수라도 있는지가 의문이었다.
“스승이 말을 전하라고 했던 말이 있다.”
“뭔가요?”
“눈을 마주치지 말라고 하더군.”
…무슨 소리래?
육하원칙이 지나치게 부족한 전달에 눈을 찌푸렸지만 늑대원숭이도 그 외에 다른 말을 들은 것은 없는지 커다란 몸을 무리하게 굽혀서 쪽문을 겨우 통과했다.
쪽문 너머의 공간은 마치 중식당의 홀을 연상하게 했다.
중앙에는 나무로 만들어진 커다란 원탁이 놓였고, 의자가 따로 비치되어 있다.
아직 아무도 앉지 않은 의자들은 둘씩 짝지어 네 방향에 놓였고, 그것은 이것이 대담(??)이 아니라 회담(會?)이 될 것이라는 이야기가 되었다.
해명을 요구하는 시선을 받는 신 쉬푸가 태연히 히죽거렸다.
“독대의 자리를 만든다고 했던 적은 없네.”
“그래요, 그랬었죠. 뭔가 수작을 부릴 거라곤 생각했다고요.”
“칭찬의 말은 고맙게 받지.”
나름대로 가시 돋친 독설을 내뱉었다고 생각했지만 신 쉬푸에게는 그저 애송이가 발끈해서 내뱉은 말이라고 여겼을 것이다. 또한, 그런 말을 듣는 것은 오히려 즐거워할 것이고.
“슬슬 시간이군. 자리에 앉게나.”
“하아….”
이미 빠져나가기엔 너무 늦었다. 호랑이굴이란 걸 알고도 머리를 들이밀어야 한다면 하다못해 정신이라도 똑바로 차릴 수밖에. 비어있는 의자를 끌어당겨 앉았다.
어쩐지 긴장이 등줄기를 기어올랐다.
머릿속이 조금 멍하게 가라앉고, 이제부터 무슨 말을 해야 할지도 제대로 정리되지 않아 입술이 까끌까끌하게 말라붙었다.
공기마저 무거워져서 들이마셔도 갑갑함이 해소되지 않았다. 오히려 목이 점점 더 타들어가는 것 같아 탁자에 놓인 물에 손을 뻗을 뻔했다…. 안 되지. 함부로 마실 것에 손을 대서는 안 된다. 조금 참자.
늑대원숭이는 자리에 앉는 대신 내 뒤에 섰고, 이 회담에 참가하는 듯한 다른 손님들도 곧 도착했다. …내가 들어온 쪽문이 아니라, 치파오를 입은 여자들에게 안내받는 모습으로. 뭐야, 난 귀빈이 아니라 들러리라 뭐 그거야?
하지만 그런 대접 차이는 아무래도 좋았다.
도착한 사람들의 면면이, 눈썹을 꿈틀거리게 만드는 데에는 충분했기 때문이다.
이전에 전사장 돌프의 목을 단숨에 베어버렸던 검은 갑주의 검사와, 얼굴에 베일을 쓰고 있지만, 누구인지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그 여자. 애써 감출 생각도 없었던 것인지 머리카락 사이로 검은 고양이 귀가 쫑긋거렸다. 노엘… 그 수상한 여자다.
“곧 다시 뵐 수 있을 거라고 했죠?”
“케이크가 없는 건 유감이네. 여긴 그런 게 나올 것 같지는 않아서.”
비웃듯한 첫 마디에, 가시 돋친 한 마디로 응수했다.
노엘은 피식 웃고는 부채를 펼쳐 입가를 가린 채로 준비된 자리에 앉았다. 검은 갑옷의 기사는 앉지 않고, 그 뒤에 섰다.
드르륵.
빈 의자를 끌어당기는 소리가 났다. 코와 턱을 허옇게 덮은 건장한 노인은 은회색의 전신갑주를 오만하게 두른 채로 앉았다. 옆구리에 끼고 있던 매의 머리를 본뜬 투구는 탁자 위에 올려두고서.
뒤이어 그보다는 조금 작달막한 체구를 가진 이가… 앉았다. 먼저 앉은 노인과는 달리 그는 투구까지도 꼼꼼히 갖춰 써서 얼굴을 감추고 있었는데, 흉갑의 가운데에는 ‘라에라드’를 섬기는 ‘율령교회’의 표식, 태양십자가 보란 듯이 새겨져 있었다. 교회 소속의… 성기사려나? 흑마법사로서는 그다지 달가운 상대는 아니었다.
“이걸로 오늘 회담의 주빈은 모두 모였음이야. 각자 자기소개를 함이 어떠한지?”
“셴 타이펑 방주(??)는 왜 나오지 않죠?”
노엘이 쏘아붙였고, 신 쉬푸는 특유의 쇠를 긁는 듯한 컷컷, 하는 소리로 웃었다.
“송구한 일이로세. 셴 타이펑은 조금 후에 도착한다고 하더군. 그러니 어찌하겠나? 방주가 도착하기 전의 시간을 어떻게 해서든 유효하게 쓰는 게 서로에게 이득이 되지 않겠나?”
“애당초 라오후에서 제대로 맡은 일을 해 주셨더라면 제가 여기 앉아서 시간을 낭비할 필요도 없었을 텐데요. 그런데도 기다리게 하다니… 셴 타이펑 방주는 목이 한 서너 개라도 되는 모양이죠?”
악의는 느껴지지 않지만 서늘하게 날이 선 노엘의 발언은 신 쉬푸의 주위에 늘어선 라오후의 조직원들을 격동시키기에 충분했다. 신 쉬푸가 손을 들지 않았다면 칼이라도 뽑았을 기세였고.
“목숨이야 누구에게라도 하나지. 그래서 더더욱 귀중한 것이 아니겠나? 시간도 마찬가지. 누구에게든 공평하게 유한한 것이 시간이니, 그저 흘려보내기보단 어떻게든 가치있게 씀이 옳겠지.”
“…뭐어, 이 빚은 어차피 이 자리에서 전부 받도록 할 것이니 상관없죠.”
노엘은 보란 듯이 의자에 앉은 그대로 다리를 꼬았다.
치파오의 옆트임 사이로, 날렵하게 뻗은 맨다리가 다른 다리 위에 얹혀져서 요염한 분위기를 한껏 자아냈지만, 이 자리에서 그 각선미를 경탄할 만한 사람이 없었다는 것은 조금 유감스럽다.
“저는 동항로 회사의 대표로 이 회담에 참가했습니다. ‘노엘’로 통하고요. 이쪽은 제 호위에요. 호위의 이름까지 밝힐 필요는 없겠죠?”
“좋네. 그럼…”
신 쉬푸와 노엘이 이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노엘의 맞은편에 앉은 노기사는, 입을 다물고 눈을 굳게 닫은 채였으므로 아직 자기소개를 할 생각은 없는 것처럼 보인다.
“…마녀 로제이아에요. 특별히 어딘가를 대표해서 나온 건 아니고, 난 단지 셴 타이펑이라는 인간에게 묻고 싶은 게 있는 사람일 뿐입니다. 공교롭게도 거기 노엘이라는 사람과는 구면이네요.”
노엘이 피식 웃고는 부채를 살살 흔들면서 교태 어린 태도를 보였다. 짜증만 날 뿐이다.
고양이의 약올리기에서 눈을 돌리고, 남은 한 팀의 손님에게로 시선이 집중되었다.
“…영주성에서 나왔다. 칼 프레드릭 바츠다. 그리고 이쪽은…”
잠결에 들었던 목소리와 똑같았고, 용모도 어디에선가 본 적이 있었다.
어디에서 봤었더라. 이름은 처음 듣는데 목소리와 외모는 낯익은 기묘한 기시감으로 머릿속이 잠시 혼란했었다.
칼 프레드릭 바츠, 그렇게 이름을 밝힌 노기사는, 옆에 앉은 작은 몸집의 갑옷 기사에게로 주의를 환기시켰다. 그는 어깨를 한번 으쓱하고는 투구에 감싸인 정체불명의 얼굴로 노기사를 바라보았다. 둘이서 무슨 무언의 대화를 주고받았는지는… 알 도리가 없지.
“…교회에서 나온 성기사이네만, 묵언 기도 중이라서 내가 대신 말을 전달하겠소. 괜찮겠나?”
“흐응. 묵언 기도 중인 사람을 회담에 보내다니. 율령교회는 정말로 특이한 단체라니까요.”
노엘이 이죽거렸지만 작은 몸집의 남자는 격동하지도, 크게 반응을 보이지도 않았다.
그나저나 기묘한 기시감이 다시 한번 찾아들었다. 목소리도, 얼굴도 드러내지 않는 작은 몸집의 기사한테서도, 노기사에게 그러했듯 어딘지 낯익은 느낌을 받았다.
성기사라고? 명색이 마녀인데 성기사인 지인이 있을 리가 없건만.
“음, 오래 기다리셨군. 방주가 도착했다고 하네.”
상념은 빠르게 가라앉았다. 그 자리를 긴장이 채웠다.
빈자리의 뒤쪽, 유난히 커다란 문이 벌컥 열어젖혀지고… 가장 먼저 보인 것은 장포에 감싸인 채로 커다랗게, 올챙이처럼 부풀어 오른 뱃가죽이었다.
신 쉬푸와는 전혀 다른 느낌의… 뚱보였다.
호랑이 가죽을 어깨에 걸치고 거들먹거리는 살이 오른 양손에는 쇠사슬을 쥐고 있었다. 신 쉬푸와 그 수행원을 제외한 회담장의 참가자들이 이 순간 불쾌한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터질듯한 배. 그 탓에 짧아보이는 두꺼운 팔다리. 살이 잔뜩 올라 둥글둥글한 얼굴에 길게 기른 수염. 양손에 쥔 사슬은 족쇄로 연결되었고, 그 족쇄에는… 검은 피부의 엘프가 거의 알몸인 채로 끌려오고 있었다. 남쪽 지방의 무희 차림… 자신도 입어본 적이 있었다.
뚱보가 배를 출렁거리며 웃었다. 나름의 너스레… 라고 생각됐다. 전혀 그렇게 들리지 않았다는 게 문제라면 문제겠지. 사타구니 사이에 툭 튀어나온 고깃덩어리는 더더욱 혐오스러웠고. 지금 여기가 사창가라고 생각한 거야, 뭐야?
“어이쿠, 오래 기다리게 해서… 큭큭. 미안하구만. 나, 셴 타이펑이오.”
세상에,
목소리에까지 지방이 꼈다는 표현이 이럴 때 쓰는 말인가?
“호오…?”
살에 묻혀 자그마한 눈동자가 잽싸게 움직이며 내게 날아왔다.
전신을 훑어지는 듯한 그 시선에, 순간적으로 소름이 돋았다.
설마 이래서 눈을 마주치지 말라고 했던 건 아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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