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4화 〉 2 6 / 1년 만에 만난 너희들에게(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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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사흘쯤 되자, 슬슬 센도 귀찮아하는 표정이었다.
나라도 그럴 만하다고 생각했지만, 베어링턴에서 가장 안전한 곳이 여기인 걸 어떡하겠어.
게다가 나갈 때마다 숙박비는 섭섭지 않게 두고 가고 있으니 공짜로 재워준다는 얼굴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갔다 온 일에는 진전이 있었나?”
“어느 정도는요.”
4번가에서 있었던 일을 듣는 동안 센의 얼굴이 볼만했다.
진지하게 듣고 있다가, 날 바보취급하는 얼굴이 되었다가,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쉰다.
대체로 늑대원숭이와 반응이 비슷했다. 스승과 제자가 다른 면이 있었다면, 스승은 굳이 말을 고르지 않았다는 것이다.
“너 바보냐?”
“네, 그렇게 말해도 할 말 없다는 것 정도는 알 만큼은요.”
바보 소리를 들어도 할 말은 없지.
일대를 주름잡는 암흑가의 보스와 무턱대고 대면할 생각을 하고, 결국 억지를 써서까지 그 자리를 만들어냈으니.
센은 몹시도 담배가 고픈 얼굴이었고, 즉시 장죽을 꺼내 담배를 채워 불을 붙였다. 물부리를 무는 그의 눈썹이 거꾸로 된 팔(?)자를 그리고 있었다.
“신 쉬푸… 셴 타이펑. 라오후. 넌 대체 목숨이 몇 개쯤 되기에 칼 맞은 몸으로 그렇게 빨빨거리고 돌아다니는 게야?”
“당신도 내 입장이 되면 안다고요. 난 빨리 여기 일을 마무리 짓고 싶어요. 그러려면 조금쯤은 무리수도 써야지. 안 그러면…”
“키에리 씨가 죽는다, 뭐 그런 얘길 하려고?”
어?
뒤돌아보았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얼굴이 잔뜩 숯검정투성이 꼴로 들어오고 있었다.
얼굴까지 거뭇거뭇해서 알아보는 데 아주 잠깐 시간이 필요했다. 눈을 깜빡였을 정도는.
“카르티, 네가 왜 여기에 있어?”
“너 한 방 먹여주려고.”
뭐? 하고 반문하기 전 카르티의 주먹이 위에서 아래로 날아왔다.
너무 잽싼 주먹질에 피하지도 못하고 머리를 쥐어박혔다. 눈에 별이 튈 정도로 강렬한 한 방이었고, 으악, 하고 소리를 지르며 머리를 감싸쥐어야 했다. 눈물이 핑 도는 눈에 별이 빙글빙글 돈다…
“야, 이 씨발, 뭔 개수작…”
“하아, 이제야 속이 좀 후련하네.”
손이 아플 정도로 때렸는지 때린 손을 탈탈 털면서 카르티는 후련하다는 얼굴을 했다.
“꼬리에 불붙은 망아지마냥 돌아다니고 있다면서, 너.”
“칼 맞은 몸으로 말이지. 더 해줘라, 더.”
센까지 거들었다.
늑대원숭이가 있었다 한들 내 편을 들어주진 않았겠지.
“너 말야, 칼 맞았으면 일단 치유사부터 찾을 일이지 왜 죽지 못해서 이 야단이야? 진짜 뒈지려고 환장한 거야? 앙?”
“…치유사한테 치유 받으려면 내 신분이 노출된단 말야.”
요컨대 카르티는 내가 자기 몸 건사하는 것도 소홀한 채로 여기저기 위험한 곳에 다친 몸으로 들쑤시는 게 몹시도 마음에 들지 않은 모양이었다. 쓸데없는 참견이다… 나도 딱히 죽고 싶어 환장한 년이 아니라고.
“하지만 어떻게 해. 키에리가 오늘내일하는데. 빨리 해결해야 해독할 방법을 알아낼 수가 있단 말야.”
“…키에리 씨라면 당분간은 괜찮아.”
…이유는 모르겠지만,
카르티는 몹시도 섭섭하다는 얼굴로 한숨을 푸욱 보란 듯이 내쉬었다.
팔짱을 끼고, 날 바라보는 눈이 조금… 글썽이는 듯도 한 건 왜냐고. 나 아직 안 죽었어.
너무 애 취급하진 않았으면 좋겠다.
“네가 보낸 약을 먹고 좀 나아졌고, 잭 씨와 그 토마스라는 꼬마가 돌보고 있다고. 게다가 스승님이 묘한 기술로…”
“스승님? 스승님이라니, 케라우노스 님이라도 다녀간 거야?”
스승님은 또 누구래.
아니, 카르티는 케라우노스를 ‘영감’이라고 친근감과 존경이 한껏 넘쳐흐르는 호칭으로 불렀었는데. 대답은 엉뚱한 곳에서부터 돌아왔다. 모루에 올려둔 쇠를 망치로 두들기고 있던 센이 툭, 목소리를 내었던 것이다.
“나다.”
엥? 내가 여기에 없는 사이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카르티는 어깨를 한번 으쓱이고는 그렇게 됐어, 하고 가볍게 덧붙였다.
센은 센대로 기분이 조금 나아진 얼굴이었고.
“내 기술을 훔치려면 일단 3년은 걸릴걸.”
“3년이라니, 그 정도면 되는 거유? 바닥이 보기보다 얕구만?”
“멍청한 녀석. 3년은 일단 수습 기간이지. 철저하게 부려먹어줄 테니 그리 알아.”
그러고보면 카르티는 대장간을 소환할 수 있는 스킬을 갖고 있었지.
센도 센 나름대로 일손이 필요한 모양이었고. 잘된 건가? 하지만… 짧게나마 여행을 같이 했던 사이인데 갑자기 이렇게 되는 건 조금 허무하기도 하고.
“그런 표정 짓지 마, 너답지 않잖아? 뭐, 여기서 알브레히트는 한나절이면 도착할 테니까 일이 해결되면 독수리로 소식 보낼 수 있어.”
“조만간 거처를 옮길 계획이지만.”
카르티가 조금 발끈한 반응을 보였다.
“거 분위기에 초 좀 치지 마쇼.”
“신파극은 싫어해. 됐으니 불이나 지펴.”
센이 이죽거렸고, 제자가 된 입장인지라 카르티는 더이상 불만을 제기하진 못하고 투덜거리면서 풀무로 화로에 공기를 불어넣었다. 이글이글 타오르는 불길이 한층 거세지는 가운데 묵묵히 쇠를 두들기는 센과 카르티를 보면서, 둘은 의외로 괜찮은 사제관계를 맺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하룻밤 자고 일어나서 그… 신 쉬푸를 통해 셴 타이펑을 만난단 말이지? 가끔은 무대포가 나서야 일이 해결되는 일도 있군그래.”
“늑대원숭이는 누굴 만날 일이 있다고 갔어요.”
“그럴 테지.”
센은 이미 알고 있다는 투였다. 누굴 이야기하는지 생각해봐도, 언뜻 생각나는 건 어제 대장간에 찾아와서 제자의 검을 부탁했던 사람 정도밖에는 얼른 떠오르지 않았다.
“혹시 어제 밤늦게 왔던 그 사람이에요? 조금 목소리가 늙었던데.”
“뭐야. 깨어있었나?”
“내가 잠귀가 좀 밝아서요.”
하도 눈칫밥을 오래 먹어놔서.
완전히 잠들기 전에는 잠결에 듣는 말은 대체로 기억하는 편이다. 워낙 내 베갯머리에서 핀잔이나 안 해도 될 말을 지나치게 많이 하던 인간들이 많았어서.
어차피 죽기 전의 일이니 그건 그렇다 치고.
“꽤 높으신 분 같던데? 목소리라든지, 말투라든지요.”
“거금을 내밀면서 제자가 쓸 가능한 훌륭한 검을 만들어 달라더군.”
속세에 마냥 초연한 사람은 또 아닌 모양이다.
하긴, 돈이 없으면 대장간은 운영할 수 없다. 땅을 판다고 불이나 철이 거저 나오진 않을 테니까… 음?
“그래서 어젯밤 꼴딱 새운 다음 오늘 아침에 완성한 걸 보냈지. 제자가 어떤 녀석인지는 모르지만, 그 정도 검을 받았으니 적어도 검에 맞는 정도의 검사는 되었으면 하는구만.”
보통 명장이라고 할 만한 기술자들은 제 작품에 걸맞은 격의 상대가 아니면 상종하지 않는다는 이미지를 내세우곤 하던데, 센은 그런 의미에서는 퍽 특이했다. 흥, 하고 그는 통념을 비웃었다.
“돈으로 해결하지 못할 일은 없어. 있다면 돈이 부족해서지. 내가 뻔질나게 내 집에 기어드는 널 그냥 내버려 두는 것도 눈치 있게 성의로 두고 가는 돈 때문이지, 달리 있겠나?”
아, 그러셔요.
뭔가 고집 세고 노련한 장인 같았던 이미지가 점점 수전노 스크루지틱한 영감님으로 변하고 있다는 걸 알라나 몰라. 안다고 해도 신경도 안 쓰겠지만. 뭐, 아무튼. 그런 사람이라면 계산은 확실하게 해야지.
“…제 친구에게 뭔가 치료를 해 주신 것 같은데, 거기에 대해서도 감사드려요.”
“그에 대해선 나름의 대가를 받았으니 됐어. 어디까지나 거래라고.”
흠. 추측하자면… 키에리에게 치료를 해 주는 대가로 카르티가 센의 제자가 되기로 한 건가? 자세한 내막은 알지 못했으나 그러려니, 하고 넘겨짚는 수밖에 별 수 없지.
“그럼 키에리의 상태는 어때요?”
“잠귀가 밝다고 하니 기억할지는 모르겠는데.”
조금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내가 잠결에 들었던 센의 중얼거림에는 쉬이 흘려들을 수 없는 이야기도 섞여 있었으니까.
그 내용이 아마…
“그 처자의 몸에 남은 건 드래곤의 독이었어.”
입술을 깨물 수밖에 없었다.
드래곤과 대면한 것은 두 번.
첫 번째는… 그걸 드래곤이라고 봐야 하는지는 몰라도, 순식간에 거대한 범선을 숨결 한 번으로 불살라버리는 술라의 마법이었고 두 번째는 우루 늪지에서 쓰러뜨린, 미성숙한 드래곤으로 만들었다던 키메라였다.
어느 쪽도… 혹시 싸워보라면 그냥 전력을 다해 도망쳐야 할 상대였지.
키메라의 경우도 카르티와 즈왈트가 아니었다면 난 무조건 도망쳤을 거고.
지금 키에리는 그 드래곤의 독에 중독된 거라고, 센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도바츄의 공격으로 중독된 것이 사실은 드래곤의 독이라고 한다.
센이 거짓을 말했거나 오진일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니었으나, 이 상황에서 그렇게 말한들 그에게 이득이 될 건 뭔가.
“경위는 몰라. 하지만 그 처자를 중독시킨 건 틀림없이 드래곤의 독이야. 그 약과 약간의 치료로 독이 퍼지는 건 막아뒀지. 하지만 독을 완전히 풀지 않으면 의식을 차리지 못할 거다. 대충 계산해봐도 그 처자의 몸이 견디는 건…”
흠, 하고 센이 잠시 입을 다물었다.
머릿속으로 헤아리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말하기가 몹시 곤란한 것인지.
아마 둘 다일 것이다. 하지만 그가 다시 입을 여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는 않았다.
“한 달 정도가 한계겠군.”
한 달.
여기에서의 한 달은 4주이고, 한주가 아흐레이니 키에리에게 남은 시간은 이제 36일을 전후한 시간이었다. …머뭇거릴 시간 같은 건 없었다. 그래도… 길드에서 만났던 점쟁이는 독을 풀 방법이 있다고 확언했었다.
그렇다면 이제 거기에 걸어볼 수밖에 없다.
내일. 내일이 바로 셴 타이펑과의 자리가 마련되는 날이다.
어떻게 되든 간에, 내일의 일에 운을 걸어볼 수밖에 없다.
사태는 이미 코앞까지, 모든 것이 한꺼번에 달려들고 있었다.
하지만 할 수밖에 없잖아. 해낼 수밖에 없다.
더이상 일각의 유예도 없는 마음인 채로,
아마 이 세계에서 가장 길게 느껴질 아침이 밝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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