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커스텀 로즈-82화 (82/157)

〈 82화 〉 2 ­ 6 / 1년 만에 만난 너희들에게(1)

* * *

(1)

날이 밝은 뒤 늑대원숭이의 연락이 왔다.

독수리가 아니라 개를 한 마리 보낸 것은 확실히 그다운 방식이었다. 아무래도 독수리는 성벽에 친 결계 탓에 성안을 빙빙 돌다가 방향을 잃는 일이 많아 보내기가 어렵다나.

간단한 약도와 쪽지의 내용으로는 그는 지금 라오후의 근거지인 4번가의 술집에 숨어있는 모양이었다. 로브를 챙겨입고 문제의 약을 삼킨 다음 센의 대장간을 나섰다… 세 번째 먹는 약은 전혀 익숙해지지 못했다.

줄리아 다리에는 어제의 난동으로 인한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다리 곳곳, 그리고 그 양쪽 건너편에 핏자국이 얼룩져 있는 것이 자못 을씨년스러워 다리를 건널 마음이 전혀 들지 않았지만, 거기에 더하여 영병들이 엄중히 지키고 있어서야 건널 마음이 있다 한들 건너기가 쉽지도 않았을 것이다.

내키지 않았지만, 샛길을 이용하기로 했다.

“가만있자, 여기가 입구… 인가.”

별로 믿음직스럽지는 않은 자물쇠와 사슬이 채워진 쇠창살 문은 꽤 오랫동안 사람이 드나든 일이 없었는지 손대기 꺼려질 정도로 녹슬어있었다. 워낙 심하게 녹슬어서, 화살을 한 방 쏴주는 것만으로 간단히 끊겨 떨어졌을 정도다.

끼이이이… 마치 심령 스팟의 입구처럼 음산한 소리를 내며 열린 창살문 틈으로, 가능한 소리를 내지 않고 들어갔다.

주변에 사람은 없었고, 구불구불한 골목을 지나고 보니 낮임에도 4번가는 어쩐지 어둑어둑한데다 분위기도 조금 음침했다. 할렘가에 가 본 적은 없지만, 이미지적으로는 그런 분위기… 라고 해야 하나.

“…분위기 한번 살벌하네.”

주민들이 너나 할 것 없이 뭔가 무기가 될 만한 것을 소지하고 있었던 것은 좋다.

여기는 뭐 그런 세상이니까.

길드에서 줄리아 다리로 이동할 때, 그때 보았던 주민들의 시선도 그다지 온건하지는 않았지만 4번가의 주민들은 한층 신경이 곤두서 있었고, 독이 오른 것처럼 보였다. 아무래도 라오후와 길드 간의 갈등은 이런 식으로 악영향을 낳고 있는 모양이다.

괜스레 후드를 좀 더 깊게 눌러쓰면서 큰길로 나와 약도를 살폈다. 늑대원숭이가 지정한 술집은 한 구획을 더 지나야 했다.

“…응?”

약재상…으로 보이는 가게에서 이상한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사람들 몇이 줄을 서 있었는데, 한눈에도 그들이 나와 같은 다른 세계에서 온 사람들… 걸리버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흑인, 아시아인에 헤어스타일이 딱 그랬으니까. 레게머리라든지. 척 봐도, 여기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초짜 걸리버였다. 그런데… 뭘 하는 거지?

“읏….”

자기도 모르게, 그 다음에 펼쳐진 광경에서 숨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머리가 희도록 늙은 치유사가 흑인이 내민 팔을 칼로 그어 피를 냈다.

흑인이 눈을 찌푸렸지만 그가 저항하거나, 강제로 피를 빼앗기는 듯한 모습은 아니었고 치유사는 서둘러 팔에서 흘러내리기 시작한 피를 보존 마법이 걸린 수정 약병에 담았다.

대체 뭘 하는 거지?

조금 떨어져서 후드를 내리고 보고 있었지만, 마치 이런 일이 일상인 양 치유사는 이쪽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피가 병 입구에 찰랑찰랑하게 담기자, 흑인의 팔에 치유를 걸어 상처를 치유한 뒤 그의 검은 손바닥에 금화 한 닢과 백은화 두 닢을 놓았다.

눈을 깜빡거렸다.

1,200 탈랭이라고?

물론 마법이 보편화된 세계이니만큼 피를 매개로 주문을 사용하는 마법사들도 당연하게 받아들여졌다.

사람의 생피라는 게 생각보다 구하는 게 녹록지 않은 물건이라 더러 돈을 주고 사는 사람도 있었지만… 1,200 탈랭이라고?! 대충 50 탈랭 은화 하나를 만 원쯤으로 계산할 수 있었으니 저 조그만 병 하나를 24만 원 주고 사는 셈이다!

흑인은 당연하다는 듯 제 주머니에 1,200 탈랭을 챙겨 골목 너머로 사라졌고, 그 뒤로도 차례차례 줄을 선 이들이 피를 파는 광경은 계속되었다.

늙은 치유사의 옆에 앉은 조수가 파는 이의 용모와 인적사항, 스킬을 바쁘게 장부에 적고 있었고 더러는 자기가 걸리버라고 주장했음에도 스킬이나 장비를 증명하지 못한 자들이 덩치 큰 이들에게 끌려나가 던져지기도 했다.

…생각보다 강렬한 유혹이었다. 나도 줄 설까?

“이쪽이오.”

생각보다 조금 길게 구경하느라 넋을 놓기라도 하고 있었는지, 늑대원숭이가 등 뒤에서 톡 하고 어깨를 두드려 생각보다 소스라치게 놀라버렸다.

“…처음 보면 신기한 광경이긴 하지. 여기에서는 흔한 일이오. 너무 그렇게 신기하다는 듯이 보면 외부인이라는 걸 들킬 수 있으니 조심하는 게 좋소.”

“대체 저게 뭐 하는 거래요?”

묻지 않고 배길 수 있겠냐고.

늑대원숭이는 별일 아니라는 눈이었다.

“보다시피 걸리버의 피를 거래하는 것이오.”

“내 시력에 문제가 있나, 가격이 말도 안 되던데요.”

“다행히도 시력에는 문제가 없군.”

그치고는 드물게 내 농담 섞인 물음을 농담으로 받아치면서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웃음기 한 점 없는 얼굴을 보면 의외로 농담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나는 마법에 대해 아는 게 적지만 정상적인 가격이 아니라는 건 아오. 하지만 라오후는 걸리버의 피를 저렇게 비싼 값으로 사들이고 있소.”

약속 장소였던 술집을 향해 다시 걸음을 옮겼다.

아직도 걸리버들이 줄을 선 약재상을 지나치면서도, 무덤덤하게 사람의 팔에 칼자국을 내는 늙은 치유사를 잠시 돌아보았다. 옆 상자에는 붉은 액체가 가득 든 약병이 담겨있었다.

어디에 쓰는지는, 사실 너무 뻔했다.

“그 물약의 재료가 역시 저거… 걸리버의 피였던 거죠?”

“아무래도 그런 모양이오.”

늑대원숭이의 대답은 생각보다 시원스럽지가 않았다.

관심이 없는 건지 정말로 모르는 것인지도 분명하지가 않다.

“라오후에서 저 물약을 만들고 있던 것이 아니었어요?”

“아니오. 라오후에서는 유통과 재료 수급만을 담당하고 있소. 어딘가로 재료를 보내면 그 어딘가에서 물건이 도착하곤 했지. 그러면 그 물건을 베어링턴 내에 돌리거나 상인들에게 넘겼고.”

아마 늑대원숭이 본인도 그 유통에 관여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꽤 엄중하게 비밀에 부쳤는지 그 외의 단서는 없었다. 다만 라오후의 두령 셴 타이펑은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몰라도 물약을 유통하는 데에는 소극적이었던 것 같고.

술집의 구석진 자리에서 맥주 두 잔과 안주를 주문한 뒤 이야기를 계속했다.

너도나도 음습하고 어딜 어떻게 들어도 불법인 이야기만을 하는 손님들이 가득했던지라 역으로 우리 이야기를 누군가가 수상하게 여길 턱은 없어보였다… 이거 좋은 건가?

노간주 열매를 넣은 텁텁한 맥주를 한 모금 마셨다… 적어도 센이 준 그 환약보다는 마실 만했다.

“이 일에는 다섯 개의 세력이 얽힌 것 같아요.”

안주로 나온 호두의 껍데기를 깬 다음, 그 껍데기를 죽 늘어놓았다.

일단 베어링턴에서만 확인할 수 있었던 정보를 모아볼 시간이다.

“먼저 길드와 라오후. 길드는 걸리버를 싫어하고, 탄압받는 걸리버들이 라오후에 모이고 있죠. 맞나요?”

“대강 맞소.”

“그리고 정작 영주는 이 사태를 수수방관하면서… 은근슬쩍 오히려 라오후를 편들어주고 있고요.”

톡, 호두 껍데기 하나가 새로 놓여 꼭짓점을 이루었다. 일단 라오후 쪽에 치우쳐진 삼각형이 위태로운 균형을 이루고 있었다.

“영주의 묵인하에 서로 대놓고 항쟁을 벌이는 통에… 길드도 라오후도 베어링턴에서 점점 인심을 잃어가고 있소. 단지 라오후는 원래부터가 인심을 별로 신경 쓰지 않는 집단이니 일방적으로 길드가 손해를 보는 구도로군.”

“거기에….”

새 호두 껍데기가 놓였다.

그 어느 쪽 편이라고 할 수 없는 미묘한 위치에 놓여 일그러진 사각형이 되었다.

이건 동항로 회사. 추측하건대, 라오후나 길드… 어느 쪽에든 자금줄 역할을 하고 있을 것이다. 한쪽만일 수도 있고, 양쪽 모두일 수도 있다.

현재로서는 알 수 없지만… 1,200 탈랭이나 되는 피를 사들이고 있는 게 라오후 측이라면, 적어도 라오후에는 어떤 식으로든 동항로 회사의 자금이 관여되고 있긴 할 것이다.

“답답하네… 그 녀석이 있으면 물어볼 텐데.”

“누구 말이오?”

“…동항로 회사와 관련된 일을 하는 지인이 한 명 있어요.”

그 녀석이 관여되지 않았기를 바라고 있다.

옳고 그르고를 떠나서… 이건 정말 위험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고 있으니까.

전직 창녀 출신인 일개 마녀와 왕자가 세상을 보는 시선은 물론 다르겠지만 어쨌든 등이나 가슴팍에 칼을 맞으면 죽는 건 매한가지가 아니던가.

“아직 하나가 남았소.”

“남은 하나는… 정말 정체불명이에요.”

마지막 남은 호두 껍데기를, 얽혀서 사각형을 만드는 네 개의 호두 껍데기에서 떼어놓았다.

마치 먼 곳에서 이 모든 것을 관망하고 있는 듯한, 이 세력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알고 있는 거라곤 확실하지 않은 정황뿐.

로젤라이를 죽음으로 몰아넣고,

루시탄을 원하지 않는 왕위에 앉히려 했고,

니이냐를 파견해서 그 일련의 계획을 실행했고,

발스턴의 충성심을 충동질해서 폭주하게 만든 데다,

노엘을 통해 지금은 베어링턴에 영향력을 행사하게 하는.

뿐만이 아니다.

우루 늪지의 키메라… 그걸 만들어낸 것도 어쩌면.

비약이라고 언뜻 생각했지만, 그런 실행력을 가진 배후를 달리 생각할 수가 없었다.

혹시 늑대원숭이는 뭔가를 아는 건 아닐까.

“미안하오만 나는 그에 대해 아는 바가 없소.”

“센 씨는요? 센 씨는 여기저기를 떠돌아다닌 모양이던데.”

“스승님께도 들은 적이 없소. 그대도 알다시피 세상사엔 도통 관심이 없는 분이시라.”

그랬죠.

별로 기대를 하지 않아 배신당하지 않은 게 다행입니다.

한숨을 푹 쉬고는 맥주를 한 모금 더 삼킨 다음 바닥에 늘어놓은 호두 껍데기를 바라보았다. 저마다 자리를 지키고 있는 호두 껍데기들은 위태로운 균형을 이루고 있었다.

하지만 저 위에서 상황을 관망하고 있던 노엘은 이런 교착상태가 마음에 들지 않아, 방법을 달리할 생각이겠다. 더욱 이 약을 적극적으로 퍼뜨릴 방법을.

…그렇다면 대체 목적은 뭐란 말이지?

걸리버의 능력을 널리 퍼뜨려서 그들이 얻는 건 대체 뭐야?

“모르겠어….”

동기를 알지 못해서야 어떻게 이후의 그들의 행동을 예측할까.

자신의 머리가 나쁘다고 생각한 적은… 많았지만 어떻게든 지금까지는 해결해왔는데, 지금은 벽에 부딪힌 기분이었다. 도시 하나, 아니 어쩌면… 좀 더 큰 음모를 진행 중인 흑막의 편린조차 잡아낼 수 없다니.

“루시탄….”

너라면 이럴 때 어떻게 했겠어?

너나 나나, 결국 무모한 짓만 잔뜩 했었지. 그리고 서로 그 값을 비싸게 치렀었고.

난 몸을, 넌 마음을 다쳤어. 내 눈 하나는 다시 돌아올 수 없지만 네 상심은 조금이나마 나아졌을까. 이럴 때 네 빈정거림을 한마디 들을 수 있으면 그것만으로 마음이 좀 가벼워질 텐데.

녀석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폰도, 룩도, 나이트도, 비숍도 움직일 수 없는 체스판.

너라면 뒤집어엎으려 했겠지. 1년 전에 날 처음 찾아왔을 때처럼.

혼자 힘으로는 뒤엎을 수 없는 판을, 자기가 할 수 있는 수를 짜내서.

“…그럼 나도 뒤엎어줘야지.”

“무슨 방도라도 있소?”

“들으면 날 바보 취급할 거라는 데 50탈랭 걸죠. 어때요?”

상황을 뒤엎을 수 있는 사람을 직접 찾아갔던 너. 그 때는 그게 나였다.

그럼 나도, 똑같이 이 상황을 뒤엎을 단서를 가진 사람을 찾아가야 했다.

그게 누구인지는 말할 필요조차 없다.

“셴 타이펑을 만나봐야겠어요.”

아무 말도 덧붙이지 않고, 늑대원숭이는 내게 50탈랭짜리 은화를 내밀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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