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0화 〉 2 5 / 늙은 늑대와 젊은 대장장이에게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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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와장창.
이건 내 각오가 처음부터 아주 박살이 나는 소리다. 그래… 눈치챘어야 했다. 눈치챘어야 했다고. 돌벽에 왜 화살표 같은 게 붙어있는지를 조금 곰곰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었는데.
돌벽의 화살표를 따라 조심조심 한 바퀴를 돌았다. 그랬더니 보란 듯이 화살표 모양 표지판이 벽에 붙은 문을 가리키고 있더란다. 반신반의하면서 문고리를 돌려보니 시원스레 열려서 더 황당한 거 있지.
문틈으로 들여다본 건물 안쪽은 어두컴컴했다.
[침묵이여Sàmhchair / 나의 그림자를sgàil /숨겨다오Falaich]
그래도 이때까지만 해도 잔뜩 긴장한 채 최대한 발소리를 죽이는 주문을 입에 담은 채 문을 조심스레 열고 건물 안으로 발을 들였더란다. 조금이라도 수상한 기척이 느껴진다면, 바로 공격 마법을 쏠 만반의 준비를 해놓고서.
“…!”
짧은 지팡이 끝이 하얗게 점멸하는 것이 보였다!
화염 마법? 전격 마법? 그것도 아니면 단순한 마력탄? 이를 악물고는 일단 방어 주문을 서둘러 외우려 했지만, 그보다도 짧은 지팡이 끝에서 일어난 주문이 발동하는 게 더 빨랐다.
시야가 갑작스레 빛으로 가득 찼다.
눈부심으로 기선을 잡으려는 게 목적인가? 눈을 감은 채 오감을 집중해서 억지로라도 상대의 위치를 파악하려 애썼는데…
…다음 공격은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았다.
서서히 눈부심이 가라앉아 질끈 감았던 눈꺼풀을 주저주저하며 뜨자… 재밌다는 듯이 고양이 웃음을 짓고 있는 고양이귀 접수원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손에 든 완드를 허공에 원을 그리듯 살살 흔들다가 내려놓고는 키득키득 웃었다.
“놀래셨나요?”
“…뭐, 적당히는 놀랬지만.”
의도를 읽을 수가 없잖아. 저쪽은 완드를 내렸지만, 이쪽은 여전히 지팡이를 그녀에게 겨눈 그대로 약간 거리를 두었다. 생글생글 웃는 낯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저히 모르겠다.
“그야 제 뒤를 계속 따라오셨잖아요? 이 정도 장난은 웃어넘겨주셔야죠.”
“알고 있었구나.”
“그야, 그렇게 서투른 미행이다 보니. 본의 아니게.”
마치 그루밍을 하듯 손등을 핥는 혀가 까끌까끌해보였다.
서투른 미행이라 참 미안하네. 고양이귀 여자는 마치 가슴에서 우러나온 말을 그대로 뱉었기에 무례하다고 생각하지도 않는 모양이었고, 그런 상대에게 따지는 건 별로 의미 있는 일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노엘이에요. 이름은 들으셨을 것 같은데, 이미 까먹으셨죠?”
“내 이름은 봤으니 안 까먹었을 것이고.”
“네에, 뭐어… 서류상의 이름은 기억하죠. 그게 본명일 리가 없다는 것도요.”
고양이답게 눈치는 제법 빨랐다.
본명을 소개해야 하는 수고를 더는 것은 좋은 일이지. 마법사에게 이름이란 상당한 무게를 갖는다. 분명 저쪽도 마법사이니만큼 처음 본 상대에게 본명을 가르쳐주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나저나…
“카트시 마법사라….”
카트시는 셈에 밝고 반짝이는 걸 좋아해서 주로 은행이나 상단에서 일하곤 하는데. 카트시 마법사라니, 실제로 만난 적은 거의 없었다. 아니, 카트시 자체를 만나는 것 자체가 사실 드물다면 드문 일이지.
“…페리링이 좋아하겠네.”
중얼거리고는, 일단 겨눴던 지팡이를 세웠다.
그제야 이야기를 할 준비가 되었다는 양 노엘은 턱짓으로 근처의 테이블과 의자를 가리켰고, 조금 찜찜한 기분으로 그 의자에 앉자 가정용 골렘이 차와 케이크를 가져와 테이블에 놓았다. 홍차였다.
“마법 결투로도 상관없겠지만 가능한 한 온건하게 이야기로 풀고 싶어서요.”
“꽤 친절하네. 미행하는 사람을 대하는 것 치고는.”
“친절하지 않으면 그 거칠고 험한 모험가들의 뒤치다꺼리를 할 수 있겠어요? 가끔 달콤한 디저트가 맛있는 가게를 알려주는 건 고맙지만요. 그것도 모험가 분들이 알려준 가게에서 사온 거랍니다.”
말끝에 생긋 웃어 보이면서 케이크를 권하는 노엘.
권하는 방식이 꽤 능숙하네. 조금 반신반의했고 맛있어는 보였지만 그렇다고 적인지 아군인지 모를 상대가 주는 음식을 넙죽 의심없이 받아먹기엔 난 조금 많이 굴렀다고.
“그나저나 길드의 접수원이 이렇게 미행자 접대나 하면서 태평하게 있어도 되는 거야? 그 어디지…. 아무튼 거기 다리에서 크게 붙은 거잖아.”
“줄리아 다리.”
“…아 뭐, 여하튼.”
괜히 이름을 콕 집어 알려주지 않아도 되거든.
노엘은 자기 몫의 케이크를 포크로 콕콕 찌른 뒤 한입 행복하게 베어물면서 우물거렸다. 마치 지금 일어나는 일이 자신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일이거나… 아니면 이 정도 일에 일희일비하지 않는 듯한 태도였다.
“물론 전사장… 돌프 씨였나요? 돌아가신 건 유감스러운 일이긴 하지만… 그 정도로 길드가 어떻게 되지는 않을 거니까요. 저쪽도 마찬가지고.”
“그 정도 유혈사태는 아무것도 아니다, 이렇게 얘기하고 싶은 거야?”
노엘이 빙긋이 웃었다.
…케이크의 생크림이 묻은 입으로 웃어도 별로 흑막다운 분위기는 살지 않지만.
“두 세력이 상당한 전력을 소모하고 나서야 비로소 본격적인 일을 시작할 수가 있거든요.”
“…설마, 이거 말야?”
품에서 약병을 꺼냈다.
노엘이 밝혀둔 마법 조명의 빛이 닿는 곳마다 무지개색으로 번져가는 수상한 물약을, 그녀는 잘 안다는 듯 한숨짓고는 제 몫의 홍차를 홀짝였다.
“셴 타이펑이 생각보다 거북이처럼 멍청하고 눈앞의 이득밖에는 보지 못하는 근시안적인 속물이라 일이 도무지 진척되지 않아 조금 짜증 나던 참이에요.”
“그런 말을 내게 해 주는 이유가 대체 뭔데?”
“알아도 아무 소용 없으니까.”
콰당탕.
요란한 소리를 내며 의자가 뒤로 넘어갔다.
이 정도 말에 이렇게 갑자기 화가 끓어오를 줄은 스스로도 생각하지 못했다.
하지만 노엘은 그렇지도 않은 듯 카벙클색 눈을 깜빡이고는 지팡이를 겨누는 이쪽을 재미있지도 않다는 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사실이 그렇잖아요? 길드에 절 고발하셔봐야 아무도 당신 말을 믿지 않겠죠. 늑대원숭이와 함께 라오후를 들이쳐봐야 늑대원숭이는 몰라도 당신은 셴 타이펑의 얼굴조차 보지 못하고 제압당할 게 뻔하고요.”
…어디부터 알고 있는 건지, 생각할 필요도 없다.
이 녀석은 나에 대한 것을 알고 있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지팡이 끝의 마력핵이 불길한 빛을 띠면서 바들거렸다.
“너, 설마 니이냐, 발스턴과 같은 패거리의…!”
“정말 오랜만에 들어보는 이름이네요.”
히죽, 웃음 짓고는 노엘은 빈 찻잔을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그러나 그녀의 눈은 조금도 웃고 있지 않았다. 처음으로, 마녀가 된 이래…
이 여자에게서 마담 윕, 카테르네에게서 느꼈던 것 같은 압박감을 느꼈다.
“하지만 니이냐 따위와 같은 급으로 취급당하는 건 그다지 즐겁지 않은걸요. 한 패거리… 그렇게 품위 없는 소속감으로 묶이는 것도 사양이고요.”
더는 어울려줄 수 없다.
안면을 노려 ‘화살’을 쏘았다. 죽이지는 못하더라도 상당한 피해를 받을 정도로 위력을…
“무르네요.”
내쏜 화살이 빨려들었다. 아니, 가라앉았다… 라고 말해야 하나.
마치 수면에 돌멩이를 던진 것처럼 파문이 번져가면서 빛의 화살이 삼켜지며 옅어지다가… 이내 사라졌다.
“죽일 각오로 쐈어도 무리였을 것을, 그렇게 살인을 두려워해서야 여기에서 살아갈 수 없다고요. 여기는 그런 세계니까.”
“충고 고마워.”
그럼 최대한 마력을 때려 넣어 쏴주도록 하겠어.
지팡이의 마력핵과 몸의 마력맥이 비명을 지를 정도로 응축된 화살을 단 한 점에 모아 발사했다. 보이지 않는 물이 가로막으면 그 물 자체를 증발시킬 거라고 이미지하면서.
팔짱을 낀 채로 선 노엘의 안면에 날아드는 마법 화살은, 먼젓번과 마찬가지로 보이지 않는 수면과 접촉했고, 회오리치면서 마력을 빨리고 끌어당겨지기 시작했다.
무슨 원리지? 주문? 사역마? 그것도 아니면 스킬?
아마 스킬은 아닐 것이다. 「노신왕의 각인안(Odin’s Sphere)」이 반응하지 않고 있으니.
[터져라Spreadhadh]!
주문을 입에 담자, 점점 수면 아래로 가라앉던 마법 화살이 품고 있던 마력을 폭발시켰다. 마력반응을 쥐어 짜낸 섬광이 온 방은 물론… 창문 너머로도 커다랗게 빛을 확산시켰다.
이것만은 눈치채지 못했다고, 노엘의 놀라는 얼굴이 빛에 먹혀들어갔다.
“…일종의 복수, 같은 건가요? 꽤 스케일이 크네요.”
하지만 그녀와 마찬가지로 나는 그 뒤를 잇는 후속 공격을 쏘지 못했다.
아니, 노엘은 쏘지 않은 거라면 나는 못 쏘는 것에 가깝지. 방금 전의 화살에 가지고 있는 마력을 전부 쏟아부었으니까.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했다.
노엘의 얼굴이 한 번 더 당혹으로 일그러졌다. 건물 벽을 그대로 발로 차 부수고, 건물 자재와 먼지를 끌며 들어온 사내가 그녀의 머리를 향해…
“흡!”
지체없이 칼날을 휘둘렀으니.
초승달 같은 궤도를 그리면서 휘둘러진 일섬이 노엘의 몸을 통과했다.
그러나 늑대원숭이의 얼굴에 살짝 의혹이 스쳤다.
마치 칼날로 물을 벤 듯한 반응이었다. 수면에 비친 그림자를 벤 듯이 허공에 일렁이던 노엘의 모습이 흐릿해졌다.
“…과연. 이는 요괴로다.”
선이 아니라면 점을 노리겠다고, 늑대원숭이는 칼끝을 세웠다.
똑바로 내뻗은 칼날이 노엘의 목을 관통했지만, 이번에도 똑같았다. 거둬들이는 칼끝에도 피 한 방울 묻어있지 않았다.
“성질들도 급하시긴.”
노엘은 마치 보란 듯이 손톱을 다듬으면서 눈동자를 굴려 나와 늑대원숭이를 바라보았다. 날 보호하려는 양 내 앞으로 나서는 늑대원숭이를 보고는 피식 비웃는 것과 동시에 짧은 지팡이를 꺼내서, 겨누었다.
“조심해요!”
피융.
짧고 빠른 주문이 내쏘아졌다. 그의 살갗에 닿기 전 마치 내 방금 주문을 흉내 낸 것처럼 확 하고 터져 빛이 또다시 사방에 퍼졌다. 또냐고!
“오늘은 인사차 온 것이니까, 이쯤에서 물러나도록 하죠. 그럼 가까운 시일 내에 또다시. 이번엔 조금 느긋하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으면 좋겠네요. 그 때는 케이크도 좀 드셔주시고.”
“기다…!”
빛 너머에서 몸을 돌리는 노엘을 향해 지팡이를 겨눴지만, 마력이 떨어진 몸으로는 아무 주문도 짜낼 수가 없었다.
…다시 빛이 사그라지고 나자, 노엘이 서 있던 자리에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녀가 거기에 있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은 오로지 깨끗하게 비워진 접시와 찻잔 뿐.
귀신에 홀린 기분이라는 게 이런 걸까.
조금 분한 기분을 입술을 깨물어 표하면서 테이블을 쾅, 걷어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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