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6화 〉 2 5 / 늙은 늑대와 젊은 대장장이에게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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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자, 컨셉은 간단하다.
세상 물정 모르고 무작정 도시로 나온 초보 모험가. 아무 생각 없이 큰 도시의 커다란 길드에 찾아온 얼뜨기. 절대 헐값에 나온 가죽 갑옷이 눈에 띄었기 때문은… 아니다.
일단 쓰다 버린 넝마가 아니라 갑옷이라는 것을 어필하려는 듯 가슴팍에 금속판이 덧대어져있는 게 마음이 쓰인 건 사실이다. 아무래도 가슴팍에 칼 맞은 게 어제이고보니.
조금 품이 크긴 했지만, 치수야 뭐 내 스킬로 알아서 조정할 수 있으니까 별 상관은 없다.
그렇게 가죽 갑옷과 각반, 장갑을 끼고 허리에 숏소드까지 한 자루 차서 무장하고 나니 영락없는, 센의 표현을 빌자면 ‘하릅강아지’ 모험가가 탄생했더란다. 어제와는 용모도 다르니 의심하진 않겠다 싶어서, 그대로 길드로 향했다.
다시 길드의 문고리를 잡을 때는 조금 긴장했지만, 긴장한 티를 내지는 않으려고 애썼다. 끼이이익… 바닥에 나무 끌리는 소리와 함께 별로 향기롭지는 않은 냄새들이 코를 찔러서 얼굴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별반 어제와 다를 게 없는 모습이었다. 모험가들이 삼삼오오 모여서 술이나 식사를 곁들인 무용담을 자랑스럽게 떠벌리고, 심심찮게 도박판도 벌이는 모습에서는 기시감까지 느꼈다.
어제에 이어 또 새 얼굴이군.
베어링턴 모험가 길드의 접수 담당인 듯한 알림판 옆의 머리가 벗겨진 남자가 그런 표정으로 눈짓을 하는 것이 보였다. 눈짓을 받은 쪽은… 낯이 익었다. 자기도 모르게 눈이 가늘어졌다.
“어서 오세요. 처음 오신 분이신가요? 못 보던 얼굴인데…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어제 이 길드에 처음 발을 들였을 때와 같았다.
요염하고 사근사근한 태도로, 윗가슴과 배꼽을 아낌없이 드러낸 대담한 복장의 여급이 노골적으로 교태 가득한 고양이 발걸음으로 소리 없이 다가왔다. 호기심 가득해 보이는 고양이 귀를 쫑긋 세우고, 거기에 더해 꼬리를 살랑거리면서.
앗차. 수상해보이는 기색을 내면 안 되지…. 아니, 여기서는 조금 더 당황해야 제대로 초보 모험가다운 처신일까. 머릿속이 소리를 내며 바쁘게 돌아가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침을 꼴깍 삼키고 뒷걸음질을 했다. 자연스럽게 보여야 했는데.
“너무 그렇게 긴장하진 않아도 되세요. 호호. 어디에서 오셨어요?”
“아, 랑게스텔에서 왔어요.”
예상한 범위의 질문이었고, 미리 생각해둔 대로 대답할 수 있었다.
근처 계곡에 자리를 잡았다는 작은 마을의 이름을 대자 고양이귀 여자는 조금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고는, 잠시 살랑거리는 꼬리를 멈췄다. …수염이가 저럴 때 무슨 반응이었는지를 조금 더 봐뒀어야 했는데.
“랑게스텔… 네, 꽤 멀리서 오셨네요.”
“네에, 뭐어… 거기서 나온 것도 처음이라서요. 보시다시피.”
허리에 찬 숏소드를 톡톡 두드리면서 일부러 조금 초조한 기색을 내보였다.
저쪽에서 이야기를 주도한 채 오래 끌려다니게 되면 즉석에서 거짓말을 지어내야 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면 틈이 보이게 된다고.
“앗차차. 얼른 절차부터 처리해드릴게요. 모험가 등록이시죠? 이쪽으로 오세요.”
잠깐의 침묵이 무엇을 의미한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일단 수상한 사람 보는 눈이 아니라는 점은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 발랄하게 걸어가는 뒷모습을 조금 머릿속에 집어넣었다. 약간 탄 갈색 피부, 짧게 자른 밝은 다갈색 머리카락과 같은 색의 귀와 꼬리. 키는 150cm쯤에서 조금 안 되고. 대강의 특징을 머릿속에 집어 넣어두고…
“그럼… 랑게스텔에서 오신. 성함은?”
“리제에요. 성은….”
조금 끝을 흐리자 여급은 눈치껏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모습으로 성을 대는 것도 우스운 노릇이지. 로즈라는 이름은 흔하디흔한 이름이긴 했지만, 나름대로 흑마법 협회에 속한 몸인지라 만에 하나라는 게 있기도 하고.
“랑게스텔에서 오신 리제 씨… 네에. 여기에 서명해주시겠어요?”
양피지에 서명하고 나자 수속은 일단 끝났다. 여급은 접객용 웃음을 발랄하게 지어 보이더니 양피지를 돌돌 말아 밀납으로 봉했다. …뭔가 수상한 행동은 안 했겠지?
“이제 마악 활동을 시작한 모험가이시니만큼 위험성이 높은 의뢰는 알선해드리기 어렵네요. 그래도 단순한 일도 많이 있으니까, 저쪽 알림판에서 의뢰를 수주하셔서 이쪽에 알려주시면 된답니다.”
그 어느 때보다 밝은 웃음을 지으며 한 마디를 보탰다.
“그때마다 소정의 수수료가 든다는 것도 알아두시고요. 그리고 이건 베어링턴 모험가 길드 소속임을 알려주는 배지랍니다.”
나무로 만들어 위조하기 별로 어려워 보이지 않는 배지를 받아들곤 뚱한 표정으로 들여다보니, 그다지 반갑지 않은 목소리가 따라왔다.
“등록 수수료는 20탈랭입니다.”
…벗겨먹는 거, 되게 능숙하잖아. 만면에 가득히 담은 웃음에 조금 질려하면서도 그 앞에 10탈랭짜리 동화 2개를 놓았다. 젠장, 금방 부자 되겠네.
“아, 네…. 저어. 한 가지 물어봐도 괜찮을까요?”
“네에, 괜찮고말고요. 무엇인가요?”
어차피 초보 모험가 코스프레를 오래 할 생각은 없다.
알아볼 것부터 알아보고 얼른 바깥에서 감시하고 있을 늑대원숭이와 합류해야 해.
어떻게 접근하는 게 좋을까. 일단 한숨 한 번 쉬고…
“실은 성문에서 수상한 사람들을 보았는데요. 자기네도 여기 길드랑 별로 다르지 않다고 자기들 패거리에 들어오라는 사람들이 있었거든요. 이름이….”
여기서 한번 말을 끊고, 조금 안색을 살폈다.
여전히 방실방실 웃는 낯은 그다지 변하지 않았다. 적어도 내 눈에는 그렇게밖에 보이지 않았다.
“라오후… 라고 했었나?”
“저런, 큰일 날 뻔하셨네요.”
웃는 낯에서 걱정스러운 낯으로, 그리고 분개가 조금 뒤섞인 낯으로.
가면을 갈아쓰듯 자연스럽게 바뀌는 표정에서 적어도 어색함을 느낄 수는 없었다.
“이 베어링턴에서 나쁜 짓만 일삼는 사람들이라고요. 살인, 강도, 납치, 부녀자를 희롱하고…”
그거, 비교적 최근에 내가 바로 요 앞마당에서 겪을 뻔한 일이었는데.
하지만 그런 얘기를 대놓고 할 수 있을 리도 없어 그런가요, 하고 대충 넘기면서도 쓸만한 단서가 나오지 않을지 귀를 기울이는 와중이었다.
“그 큰일, 지금 나려고 하는 것 같다만. 끼어도 되겠나?”
“앗. 전사장님? 무슨 일이세요?”
타이밍 한번 최악으로 좋네.
어쩐지 등 뒤가 묵직하게 어두워진다 싶었더니 드리워지는 그림자에 딱 맞는 굵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적어도 어제 나와 한바탕 했던 세 양아치와는 다른 목소리라는 것에 조금 안도했다.
“별로 좋지 않은 때에 베어링턴에 왔군, 신입.”
돌아보았다.
기분이 나빠졌다. 오래 묵은 나무껍질 같은 짙은 갈색 머리카락과 수염을 가진 중년의 남자는 어딘지 그 자식을 떠올리게 했다.
무의식적으로 표정에 적개심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한참 위에 있는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다행히 그는 날 보고 있지 않았다. 대신 묵직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여급에게 말 그대로 지시를 내렸다.
“노엘. 길드원들에게 소집령을 내려라. 줄리아 다리에서 또 라오후 놈들이 도발을 해오고 있다.”
“또인가요… 이번이 대체 몇 번째인지….”
노엘, 그런 이름이었나. 고양이귀 여급은 질렸다는 듯 한숨을 내쉬고는 건물 한쪽에 있는 종을 울렸다. 줄로 연결된 종들이 일제히 울려대서, 식사나 음주, 도박을 즐기고 있던 모험가들이 각기 하던 일을 멈추고 일어섰다. 그들이 짜증은 낼지언정 놀라는 반응이 옅었던 것으로 보아… 이런 일은 노엘의 말마따나 별로 드물지도 않은 일이었던 모양이다.
“신입. 라오후에 대해 궁금해했었지? 그 한심한 무장상태를 보니 막 상경한 햇병아리군. 숏소드 한 자루만 달랑 들고 길드에 찾아오다니, 노엘이 등록 절차를 밟아준 것도 이상한 노릇이야. 뭐, 아무튼 검을 쥐었다는 건 내 관할이라는 뜻이니 내 지시를 따르도록. 난 전사장 돌프다.”
“리제에요.”
아니, 또 제멋대로… 속이 부글부글 끓었지만 남자, 돌프의 말에 대꾸하기에는 분위기며 상황이 영 좋지가 않았다. 웅성거리며 모여드는 모험가들의 시선이 그에게로 쏠려있었기도 했고.
“리제 씨, 리제 씨.”
속삭이면서 부르는 소리에 시선을 돌리니 노엘이 손짓을 보내고 있었다.
그제서야 돌프의 옆에 서 있는 내 존재가 모여든 모험가들에게 짜증을 일으키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거 참 실례… 근데 내가 먼저 왔었거든.
조금 물러서는 날 돌프라는 남자가 잠시 위아래로 훑어보면서 눈썹을 씰룩거리는 것도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라면 말고는 마음에 드는 구석이 없는 도시네, 진짜로.
내가 물러서고 나자 돌프는 모험가들에게로 고개를 돌린 뒤 마치 작전을 앞둔 군인처럼 행세하기 시작했다. 목소리부터 그렇고 꽉 막힌 놈이 분명해.
“그럼 현재 상황을 말하겠다. 라오후 놈들이 이번에도 제 놈들이 웅크린 4번가 구획에서 이쪽으로 넘어오려고 줄리아 다리를 두고 우리 선발대와 대치 중이다. 특히 이번에는 양측에 부상자까지 나왔으니 유혈 사태로 번질 가능성도 있다. 긴장하고 임무에 임하도록.”
손을 드는 이가 나왔다. 돌프가 고개를 끄덕이자 억눌렀던 분노가 고함이 되어 터져나왔다.
“전사장님, 이번에야말로 우리가 줄리아 다리를 건너가서 놈들이 차지한 4번가를 쳐야 합니다! 언제까지 놈들이 다리 건너편에서 도발하는 걸 지켜봐야만 한단 겁니까?”
“옳소!”
“이참에 그냥 밀고 들어갑시다! 아예 쳐서 끝장내버리자고요!”
동조하는 이들이 너나 할 것 없이 분개를 터뜨리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들었을 정도로, 그들은 무엇인가에, 크게 질려 있었다. 이쪽까지 무심코 동조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돌프는 잠시 소란이 가라앉기를 기다린 뒤, 다시 말을 이어갔다.
“제군들의 마음을 모르는 바는 아니나 쉽게 정할 수는 없는 일이다. 영주의 중재를 무시할 수는 없고, 4번가를 치면 민간인 피해가 발생할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사태가 커지겠지. 결코 경거망동하지 말도록.”
…이상한 이야기가 있었다. 영주의 중재?
이제껏 들은 말로는 라오후는 베어링턴에 있어 암적 존재에 불과했는데.
당연히 행정을 담당하는 영주라면 그런 불법 무장 조직을 근절하려 드는 것이 일반적일 텐데. 오히려 돌프의 말에는 영주가 양자를 중재하여 구역을 암묵적으로 길드와 라오후, 양측에 나눴다는 인상마저 풍겼다.
대체 왜?
“1, 2분대는 날 따라서 간다. 나머지는 빌랭의 통제에 따른다. 그리고 만약을 대비해서 치유사 협회에도 연락을 넣어서 가능한 치유사들을 많이 지원해달라고 요청할 것. 10분 후에 출발한다. 신입.”
돌프가 고개를 돌려서 이쪽을 바라보자, 자기도 모르게 네, 하고 대답하면서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뭐지, 뭔가 들켰나?
“위험한 일이다. 넌 나를 따라와라. 듣자 하니 라오후 놈들이 어떤 놈들인지 궁금해했었지? 이 기회에 확실하게 자기 눈과 귀로 깨닫도록.”
“네, 네….”
아, 뭔가 일이 대차게 꼬이는 것 같은데…
알력다툼에 낄 예정은 없었는데, 이미 발을 빼기엔 너무 늦었다.
허리까지 차오른 늪에서 무사히 기어나갈 방법이나 생각해볼밖에. 긴장에 입술을 깨물고 주먹을 꽉 쥐면서 숨을 깊이 내쉬었다. 아, 너무 긴장해서 상처가 욱신거리는 것 같아.
그래서였을지도 모르겠다.
별로 듣고 싶지 않은 말이, 또렷하게 귀를 파고든 건.
“…이게 다 걸리버 놈들 때문이야. 그놈들만 아니었어도…”
“씨발, 누가 아니래. 빌어먹을… 남의 세상에 기어 들어왔으면 염치를 알고 조용히 대가리 숙이고 조용히 살 일이지. 이놈이고 저놈이고 젠장… 걸리버 놈들은 죄다 죽어버리라지.”
…그제야, 어렴풋이 깨달았다. 이 세상은 결코 우리(걸리버)를 환영하지 않는다.
누군가에게 우리는, 그저 이물질에 불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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