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3화 〉 2 4 / 걸리버들의 도시, 베어링턴에서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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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칼끝이 폐를 건드렸는지, 마치 구멍난 타이어에서 힘없이 공기가 새어나가는 것처럼 호흡이 턱턱 걸렸다.
겨우겨우 내뱉는 숨에서는 그나마 피맛이 짙어졌고, 손으로 꾹 누른 상처부위가 들끓는 것처럼 뜨거웠다. 그에 반해 손은 오히려 스스로도 알 수 있을 정도로 점점 차가워져만 갔다.
죽을 것 같아.
형체를 이루지 않은 생각이 점점 산소가 희박해져 가는 머릿속에서 거푸 울려댔다. 카학, 하고 목 안에서 굳어가는 핏덩어리를 뱉어내는 사이 바들거리는 눈앞이 한층 어두워졌다.
내 가슴팍을 칼로 찌른 도적이 불쾌한 얼굴로 내려다본다.
검사는 여전히 제 갑옷을 붙든 넝쿨에서 빠져나오려 애쓰고 있고.
“어이, 길드가 코앞인데 이렇게 사고를 쳐도 되는 거야?”
“흥, 수상한 년이 아닌 이상에야 그 점쟁이 근처를 어슬렁거릴 리가 있겠냐고. 설령 아니라도 그렇다고 하면 돼. 얼른 죽여버리고… 아니, 이 년 숨 붙어있는 동안 어디 으슥한 곳에 끌고 가서 한 번 따먹을까? 꽤 반반하게 생겼어.”
“하여튼 성벽 한번 고약한 놈이야. 빨리 끝…”
순간 눈이 번쩍 뜨였다. 지금만큼은 귀가 제 역할을 하고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곧 죽어도 사양이다! 피에 젖은 입술을 꾹 깨물면서 손을 들어 아무데나, 닥치는대로 붙잡았다. 어딜 붙잡았는지 모를 물컹한 감각이 손에 달라붙었다.
“엿이나학, 처… 먹, 어… 이, 빌어먹을 시체성애자, 새꺄…!”
끄아아악! 어디를 붙잡았는지 눈이 가물거렸지만 아무튼 당장 뿌리치려 하거나 칼이 날아오지 않는 것은 다행한 일이다. 그대로 생명력 흡수를 시전한 순간, 도적의 사지가 고통스럽고 빳빳하게 굳었다.
“이 쌍년이!”
묶인 놈은 그대로 묶여있으시고.
그대로 뒤로 넘어가는 순간에도 주문을 멈추지 않고 빨아들이는 생명력이, 지금은 겨우겨우 내 목숨을 이어주는 구명줄이라는 사실은 어지러운 머리로도 그다지 달갑지 않았다. 사시나무 떠는 듯이 떨리긴 했지만 다른 쪽 손도 일단 움직였다… 무엇인가 지금 상황에 도움이 되는 것을 갖고 있었던가.
있다.
무한의 주머니를 뒤진 끝에 손가락에 씨앗의 감촉이 잡혔다. 입술을 꾹 깨물었다. 분명 이 기생식물의 씨앗은 이럴 때를 위해 준비해둔 것이긴 하지만… 약간의 망설임 끝에 이를 악물고 씨앗을 끄집어냈다.
“끅. 윽… 끄우…!”
바들거리는 손끝이 제 가슴께에 닿았다. 아직도 입을 크게 벌린 채 울컥거리는 출혈이 번져나오는 살점에서 슬슬 뜨거움에 이어 쓰라림이 퍼져나가 머릿속을 어지럽게 달구었다. 그 상처에, 제 손으로… 씨앗을 천천히 밀어 넣는 찐득한 감촉에 토악질이 나올 정도의 역겨움이 뒤따랐다.
꾹.
가장 깊은 곳까지 씨앗을 밀어 넣은 순간, 눈앞이 노랗게 물들었다. 핑 돌았다. 찢긴 혈관에서부터 피냄새를 맡은 씨앗이 순식간에 발아해 뿌리를 내렸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혈관에서 피와 함께 비어져 나오는 마나를 게걸스럽게 집어삼키면서 씨앗이 맥동하는 것이 느껴졌다. 그 이물감은 참으로, 참기 어려운 것이었다.
“학, 학, 학… 끅, 후으… 씹, 하윽….”
제 몸속에 기생식물을 박아넣고 찢긴 혈관과 조직에 뿌리를 내리는 느낌을 하나하나 섬세하게 고틍으로 느끼면서 이가 으스러지도록 악물었다. 정신마저 아득하게 마비시키는 통각을 견딘 성과는… 있었다. 턱턱 걸리며 쉬어지지 않던 숨이 다시 트이고, 뭉친 호흡이 기침이 되어 침과 함께 질펀하게 흐르면서 겨우겨우 몸에 힘이 돌았다.
“살았다….”
겨우 목숨을 건졌을 뿐 칼 맞은 곳은 여전히 욱신거리고, 뜨겁고 지지는 듯 아픈 데다가 저리기까지 하다. 왼쪽 어깨까지 시큰하게 만드는 고통을 겨우겨우 이로 입술을 깨물어 억누르면서 몸을 일으켰다. 칼침이 제대로 들어간 듯 왼팔이 축 늘어졌다. 제대로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순간 열이 뻗쳤다. 깔짝거리는 숨을 내쉬는 도적을 내려다보고 발을 들었다가 고간을 용서없이 힘껏 쾅, 소리가 나도록 내리찍었다. 구두 아래에서 질펀하게 뭔가 우그러지는 소리가 났지만, 알 게 뭐야. 사람 뒈질 뻔 했으니 너도 한 번 뒈져봐라.
개구리 밟히는 소리같이 도적이 눈깔이 뒤집어져서는 부르르 몸을 떨고는 혼절했다. 생명력을 착실하게 쥐어 짜낸 터라 비명은커녕 미약한 숨 터지는 소리만 울렸을 뿐이다. 이럴 때만큼은 회복 마법을 제대로 부리지 못하는 흑마법을 배운 것이 참 후회스러웠다.
“네년… 얼굴 봐 뒀어, 이… 마녀 년. 네년도 걸리버지? 이 베어링턴에서 뻔뻔하게 얼굴 들고 다닐 수 있을 거라고 생각 마, 알아들었어?! 비겁한 걸리버 놈들…!”
아직도 장미 여왕의 포옹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낑낑거리던 검사가 이를 부드득 갈면서 저주 같은 말을 퍼부어댔다.
…어쩐지, 그의 말에서 걸리버에 대한 적개심이 가득히 느껴졌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적의와 오해를 한 몸에 받는 기분은 굉장히 더러웠지만, 그렇다고 저 입을 당장 닥치게 할 정도의 배짱은… 내게는 없었다. 유감스럽게도.
골목을 벗어나 큰길로 나가는 발이 갈지자로 비틀거렸다.
도적놈에게서 뽑아낸 생명력으로 땜빵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는데, 역시 피를 좀 많이 흘린 머리에서 현기증이 스멀거렸다. 키에리에게… 약을 전해야 하는, 데… 머리가 조금 무거워졌다. 목뼈가 헐거워진 것처럼.
어라,
왜 이렇게 바닥이 가깝지?
아하. 지금 나 넘어지고 있구나. 하고 조금 각오를 굳혔다.
이렇게 정면으로 바닥에 머리를 박으면 죽… 지는 않아도 피는 좀 나겠지. 그런 어이없는 생각을 하며 눈을 꽉 감았지만, 어째서인지 바닥에 이마가 부딪히는 둔통은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았다.
마치 새끼고양이가 어미 고양이에게 목덜미를 붙잡힌 것처럼, 로브 뒷덜미를 커다란 손이 붙잡았다. 누군지도 모르겠고, 떨쳐내지도 못하겠다. 그저 몸을 부르르 떨면서 잠시 비틀거렸다. 넘어질 뻔한 걸 붙잡아준 것에는 조금 감사하지만…
“…호오, 이것도 또한 인연인가.”
어쩐지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귀에 조금 익은 목소리가 들렸지만, 그 목소리가 누구의 것인지를 금새 떠올리기엔 머릿속에 피가 부족했다. 잡아먹든 삶아먹든 알아서 하쇼, 같은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자신이 넓은 어깨에 마치 포대처럼 실렸다는 것도, 조금 때를 놓치고서야 깨달았다.
저벅, 저벅, 저벅…
실시간으로 납치당하고 있지만 저항할 정신도 기력도 없은 게 몇 분… 아니, 도중에 정신을 놓았으니 몇 시간이 지났을지도 모르겠다.
겨우겨우 눈을 뜨고 나니, 몸에 사슴 가죽이 덮여있는 것을 느꼈다. 훈기가 조금 떨어진 곳에서 살갗을 간질여왔다. 치이익… 그 소리가 뜨겁게 달아오른 무엇인가를 갑자기 찬물에 집어넣을 때 나는 소리라는 것을 눈치채는 데도 약간의 시간이 필요했다.
“여긴, 어디야… 웬즈데…”
아, 웬즈데이도 즈왈트도 지금은 뻗어있지.
얼마나 더 뻗어있을지 모르는 두 사역마의 빈자리가 꽤 컸다는 것을 느끼며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
“움직이지 마라.”
이번에는 낯선 목소리였다. 게다가 꽤 젊은 목소리였고.
움직일 힘도 없는 참에 움직이지 말라고까지 하니, 구태여 움직이지는 않기로 했다.
어쩐지 몸이 나른하고 감각도 옅었다. 눈동자만 느리게 움직여 목소리가 들려온 쪽을 보면, 작지만 다부진 몸의… 남자가 등을 돌린 채 이쪽을 향해 시선만을 두고 있었다.
두건으로 머리를 질끈 동여맨 사이로 드러난 검은 머리카락은 짧았다.
붙임성이라곤 말라붙은 듯이 없는, 마치 여분의 객기를 전부 털어낸 듯한 청년은 이쪽을 검은 눈동자로 흘깃 보았다가 다시 작업으로 돌아갔다.
“이봐, 넌 대체 뭐 하는 계집이기에 누가 봐도 죽을 자리에 칼을 맞았지?”
“그건… 내가 묻고 싶은데….”
이렇게 인심이 사나운 동네인 줄 알았다면 카르티라도 데리고 왔겠지.
끙끙거리는 앓는 소리를 내뱉으면서 거의 반사적으로 짚어본 가슴께의 흉터 위에는 깨끗한 붕대가 감겨있었다. 의식하고 나자 상처 위에 이물감이 느껴졌다. 뭔가 고약이나 습포 같은 걸 댄 것이라도 되나?
“…그, 구해주신 것은 감사합니다. 사례라면….”
“틀려.”
청년은 간단히 말을 잘랐다.
“이녁을 구해준 건 내가 아니야. 내 제자놈이지.”
제자라고?
청년은 젊어보였다. 얼핏 봐도 자신과 나이 차이가 그다지 나지는 않아보이는 용모였다. 오히려 자신이 더 나이가 많았으면 많았지, 더 적지는 않을 것이다.
“정신이 드셨소?”
“…아,”
방 안으로 들어오는 덩치가 큰 남자.
그 늑대 같은 얼굴을 본 순간 드디어 그 얼굴을 기억해낼 수 있었다.
‘늑대원숭이’인가 하는 기묘한 이름으로 불리던 남자는 음, 하고 한번 침음하고는 청년의 옆에 꿇어앉았다. 그리고 머리를 깊이 조아렸다. 겉으로 보면 아버지와 아들뻘로 보이는 두 사람의 입장은… 어째서인지 정반대였던 모양이다.
“스승이시여. 잠시 저 사람의 편의를 봐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네가 하면 되잖아.”
‘스승’은 귀찮은 기색이 역력했다. 늑대원숭이는 귀찮아하는 청년의 말에 섣부르게 말을 보태거나 수긍하지 않고 조금 기다렸고, ‘스승’은 두건을 묶은 머리를 북북 긁었다.
그의 입에서 의외의 이름이 튀어나왔다.
“셴 타이펑… 이라.”
순간 귀가 확 뜨였다. 몸을 움직이기 어려울 정도로 나른했지만 귀만큼은 그들의 대화에 집중했다. 청년은 물에서 꺼낸 쇳덩어리를 들여다보고는 눈을 한 번 찌푸리곤 모루에 올려놓았다.
“이 세상에 되먹지 않은 놈들 가운데에서도 돈을 떼먹으려는 놈이 제일 빌어 처먹을 놈이지. 하지만 신중하게 움직여. 그놈이 거느린 병졸만 백 명이 넘는다고 들었다. 뭐, 죽어서 내가 송장 치르는 일은 없게 해.”
“명심하겠사옵니다.”
한번 더 고개를 깊이 숙이고는, 바닥에 끌러놓은 검을 쥐고 일어서려는 ‘늑대원숭이’, 어쩐지 이 순간 그 점쟁이가 했던 말이 떠오른 것이,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잠깐 기다려요!”
순간 늑대원숭이와, 그 ‘스승’이라는 청년의 눈이 이쪽으로 쏠렸다.
몸을 반쯤 일으킨 채, 학학거리면서 가슴께를 짚은 그대로, 바들거리는 웃음을 지었다.
“그 얘기, 좀 자세히 들을 수 있을까요?”
체스판 위의 폰.
아니, 이 경우에는 장기판 위의 졸이 되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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