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2화 〉 2 4 / 걸리버들의 도시, 베어링턴에서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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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셴 타이펑?”
들어본 적이 없는 이름이다. 여자는 조금 곤란하다는 듯 관자놀이에 손을 얹었다가, 그 손을 다시 수정구에 얹었다. 기묘한 필담은 계속되려는 모양이다.
[이 베어링턴은 ‘걸리버 도시’라고 불릴 만큼 걸리버들이 많이 모여 사는 곳이에요. 그리고 그중… ‘셴 타이펑’이라는 걸리버가 ‘라오후(?虎)’라는 조직을 꾸려 조금… 점잖지 못한 이들을 모았죠.]
쉽게 말해… 깡패?
아니, 영주가 보낸 관리보다도 더 직접적으로 이 도시를 지배한다는 표현까지 썼으니 흔하디흔한 뒷골목 불량배는 아닐 것이다. 마피아나 갱에 더 가까우려나…. 이야기에서 불법적인 냄새가 풍기기 시작했다.
[워낙 많은 걸리버가 모여서 영주가 보낸 관리조차도 손쓸 틈이 없을 정도로요.]
“그렇게 걸리버가 많아요? 여기에?”
[거기에는 조금 내막이 있답니다. 하지만 제가 직접 말씀드릴 수는 없네요.]
조금 짜증이 치밀었다. 시원하게 말해주라고, 좀.
[아무튼.]
여자는 슬슬 말을 맺고 싶은 눈치였다.
[조직이 거대해지고 강고해지자 셴 타이펑은 욕심을 부리기 시작했어요. 자신을 따르는 이들을 부려… 망상을 부풀리기 시작했지요. 그러기 위해서는 제가 조금… 필요하다고 생각한 모양이고요.]
귀찮은 사람과 얽혀서, 귀찮은 일에 말려드는 것에도 슬슬 진절머리가 났다.
그나마 지금은 선택의 여지라도 두고 있다는 게 다행인가. 여자는 얼굴을 가린 그대로 다소곳이 앉은 채 이쪽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일단 조금 입장을 유보하자.
단언하는 순간 결국 입이 뱉은 말이 올가미가 되어 발목을 얽어매는 것을 숱하게도, 지겹게도 겪어오지 않았나.
“그렇게 대단한 상대라면 어떻게 당신을 이 도시에서 빼낼 수 있다는 말이에요? 뭔가 계획이라도 있어요?”
여자는 이 질문을 예상했다는 듯이 고개를 슬그머니 끄덕였다.
수정구를 느릿하게 더듬는 손에는 그다지 초조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사자 몸속의 벌레라는 말이 있죠. 혹은, 트로이의 목마라던가.]
“이 상황에 적절한 비유인지는 모르겠는데요….”
내부의 적을 만들자는 의미인 모양이지만, 당연하게도 내게 그런 지인은 없다.
키에리나 잭 단장, 카르티에게도 없을지는 모르겠지만.
[셴 타이펑은 그다지 계약을 잘 지키지 않는 편이에요. 그로 인해 곤란해하거나 분개하는 이들은 언제나 있죠. 그걸 잘 이용하시면 길이 보일 겁니다.]
…진짜, 속시원하게 말해줄 순 없나.
상대에게서 곤혹스러운 기색이 엿보였다. 점쟁이들은 다 그렇게 닥치고 나서야 알아들을 말을 먼저 해 주고 내 말이 맞지? 라고 하는 것을 즐기는 모양이다. 그것이 취미든 세일즈 전략이든, 당하는 쪽의 기분은 꽤 고약했다. 진짜.
[그러려면 이게 필요하실 거고요.]
여자가 테이블에 주머니 하나를 내려놓자 옆에 선 수습생의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내용물은 대충 짐작이 가지만… 여자는 다시 한번, 당부의 말을 남기는 것을 잊지 않았다.
[정말로 필요하다고 여기실 때까지, 그 안의 내용물을 절대 허투루 쓰셔서는 안 됩니다. 아셨죠?]
“…저기요, 내가 이런 말 하긴 뭐하긴 한데 내가 약이랑 이거… 돈 맞죠? 들고 튀면 진짜 어쩌려고 그래요?”
[그러지 않으실걸요.]
“오지랖이 넓어서?”
쿡쿡쿡… 처음으로 여자가 소리다운 소리를 냈다. 하지만 그다지 유쾌하지만은 않았다.
잠시 머리를 숙이고 어깨를 들썩이던 여자가 손을 다시금 수정구 위에 올려두었다.
[그것도 있지만… 길드를 나가고 나시면 제 말뜻을 아시게 되실 거에요.]
불길한 플래그 세웠겠다?!
등골에 오싹하게 퍼지는 예감에 부르르 떠는 이쪽의 반응을 즐기듯 면사포 안의 시선이 뺨에 닿는 것이 느껴졌다. 여자는 할 말을 마쳤다는 듯,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러다가, 뭔가 깜빡했다는 듯 마지막으로 수정구에 손을 얹었다.
[저 방문 열 때 조심하시구요.]
여자는 떠나갔고, 이쪽도 더이상 이 으스스한 방에는 더 있고 싶지 않아 몸을 돌려 문으로 다가갔다. …방문을 열 때 조심하라니, 대체 무슨 소리래. 그녀의 말을 조금은 의식하긴 했지만, 문을 여는 데 대체 뭘 어떻게 조심하라는 건지는 감도 잡히지 않았다.
“꺄악!”
…조금 조심할걸.
어째서인지 문을 열자마자 넘어져 바닥에 주저앉은 고양이귀 점원과 눈이 마주쳤다.
청소 중이었던 것인지, 대걸레와 물걸레통이 얌전히 옆에 놓여있는 채로.
조금 겸연쩍은 듯 웃으며 올려다보는 점원이 에헤헤, 하고 웃음을 지으면서 엉덩이가 얼얼해진 눈치였다. 손을 내밀어 일으켜주자, 고양이귀 점원은 꾸벅 인사했다.
“에헤헷. 감사해요, 손님.”
“아뇨, 뭐어. 괜찮으세요? 엉덩이 꽤 세게 찧은 것 같던데.”
“아, 네. 멀쩡해요!”
엉덩방아를 거하게 찧는 모습을 보인 부끄러움만 빼면.
씩씩하게 몸을 일으킨 점원이 부리나케 반대 방향으로 달려가는 것을 보곤 머리를 긁적였다.
마른 복도를 걸어 길드홀로 천천히 나왔다. 여전히 웅성거리는 홀에서 몇몇 흘깃거림에 괜스레 의식이 쏠렸다. 마치 주변 모험가들의 시선이 이쪽을 묘하게 주시하는 것 같단 말이지… 물론 마녀의 복색이 다소 주위로부터 경계의 시선을 사는 건 어쩔 수 없지만.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태연하게 홀을 통과하는 등에도 시선이 따갑게 꽂히며 따라왔다. 보통 이럴 때는 터무니없는 오해를 산 경우가 왕왕 있던데. 아무래도 그냥 기우는 아니었나보다. 몇 명이 테이블에서 일어서는 것이 보였다. 입술을 조금 깨물고, 손에 쥔 지팡이를 꾹 쥐었다.
아니나다를까.
길드를 나서자마자, 감출 생각도 없다는 듯 몇 명의 모험가가, 뒤따라나와 내 앞을 가로막았다. 그들 모두, 이유 모를 적의와 갈무리되지 않은 초조감을 내게 드러내고 있었다. 대화의 여지가 없어보인다는 것이 유감스러울 정도로.
“이봐, 거기 너. 마녀!”
대뜸 시비조였기에 성질이 욱하고 올라왔지만, 애써 목소리에 노기를 드러내진 않았다.
하지만 언제라도 전투태세에 들어갈 수 있게 마력을 끌어올리고, 가브롤의 지팡이에 그 마력을 돌렸다. 대거를 쥔 조그마한 도적, 갑옷을 차려입은 성질 급해 보이는 검사, 그리고 손목을 덮는 건틀릿을 낀… 격투가?
“…용무라도?”
저쪽부터 하대로 나왔으니, 이쪽이 공대로 맞아줄 필요는 없다.
하다못해 즈왈트라도 무사했다면 조금 마음이 편했겠지만, 즈왈트도 웬즈데이도 그 죽음의 여신을 다녀온 뒤부터 기절이라도 한 것처럼 아무 반응이 없었다. 내 몸에 깃들여있는 것만은 확실한데.
“못 보던 얼굴인데, 점쟁이는 왜 찾았지? 무슨 얘기를 했고?”
“그걸 왜 당신에게 말해야 하는데?”
반토막 밀로 구운 빵만 처먹었나. 사람을 보자마자 반말부터 지껄이고 지랄이야.
성질이 뻗친 건 뻗친 거고, 이 상황이 내게 불리한 것 또한 사실이었다. 일 대 삼. 게다가 저쪽은 내 말을 들을 생각이 전혀 없어보였다.
“저 년, 역시 라오후에서 온 년이 틀림없어, 조져!”
오해도 이런 터무니없는 오해가 없다. 난 그 당사자로부터 라오후인지 라디오인지에서부터 빼돌려달라는 부탁을 받았다고!
“씨발…!”
욕을 한바탕 내뱉어주곤 가장 먼저 달려든 검사를 향해 미리 영창을 마쳐둔 주문, ‘장미여왕의 포옹’을 풀어놓았다. 전신갑옷을 입고 있는 만큼 이 정도로 크게 다치진 않을 것이다.
“우와아악!”
예상대로, 가시가 흉악스럽게 비죽비죽 돋아난 넝쿨이 땅에서 솟구쳐올라 검사의 팔다리에 휘감겼지만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불행이라고 해야 할지, 철갑을 뚫지는 못했다. 그래도 성기게 감겨붙은 넝쿨이 단단하여, 쉽게 빠져나오지도 못할걸!
“이 마녀년이! 당장 이거 안 풀어?!”
“뒈지실래?! 마녀 자격 따는 데 참고서 사라고 돈 한 푼이나 보태줬냐고!”
하나는 처리했고. 이제 남은 건 둘. 그렇게 생각하고 고개를 돌린 순간, 어째서인지 어? 하는 사이 시선이 하늘을 향해 있었다. 전혀 의도하지 않은 시점 변경의 이유가, 날렵하게 격투가가 발을 걸었던 탓이라는 걸 깨달은 것과 동시에 뒤통수가 바닥에 쿵 하고 부딪혔다. 찌릿한 둔통이 이마까지 얼얼하게 했다. 으, 눈물까지 핑 고일 정도로 아파.
“으랴아아앗!”
힘차게 기합을 넣는 소리에 눈이 번쩍 뜨였다. 격투가는 내 위를 점하고는 주먹을 뒤쪽으로 크게 당겨 힘을 불어넣었다. 맞았다간 뇌진탕으로 끝나지는 않을 게 분명했다.
이렇게 되면 이판사판이다…! 손을 뻗어서 격투가의 반대쪽 팔을 붙잡고 흡, 숨을 삼켰다.
지난번 도바츄에게서 사용한 흑마법인 ‘생명력 흡수’로, 격투가의 생기가 접촉한 손을 통해 빨려들어왔다.
끅, 하고 격투가가 당혹한 듯 잠시 비틀거렸다가, 제 팔에 힘을 주고 버텼다. 별로 사람 말을 잘 들을 것 같지 않은 얼굴에 완고한 자존심이 울렁거리고 있었다.
“그런 어설픈 주문 따위로 내 투기를 어찌할 수 있…!”
습니다.
아무리 몸을 단련한 격투가라고 해도 뒤통수에 크게 후리는 골렘의 바위 주먹질 한 방에는 버틸 재간은 없을 것이다, 보통은.
일단 죽지 않을 만큼, 이라고 생각해두긴 했지만 먼저 덤빈 녀석이 잘못한 거지. 끙, 하고 가브롤의 지팡이를 짚고 일어서서 주위를 둘러봤는데, 어디 갔는지… 남은 한 명의 도적은 보이지 않았다. 동료를 두고 도망이라도 간 건가…? 뭐, 도망쳐줬으면 다행이다. 주먹 형태로 임시로 불러낸 골렘을, 원래의 자갈무더기로 되돌렸다.
일단 옷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고, 고개를 돌려 여전히 ‘장미여왕의 포옹’에서부터 빠져나오려 용쓰는 검사에게로 다가갔다. …조금 다리가 후들거리는 게 힘이 잘 들어가지 않았다.
“이봐, 내 질문에 대답하면 풀어주겠어.”
“이 더러운 라오후 마녀년, 네년의 불결한 흑마법으로 내 입을 열지 못한다!”
“이미 열려서 나불나불 잘 지껄이고 있구만.”
입가를 일그러뜨리며 웃고는 일단 그 여자가 답해주지 않았던 궁금증을 풀어보기로 했다.
아는 게 있다면 좋겠는데.
“대답해. 왜 셴 타이펑이라는 자식이 그 점쟁이 여자를 노리는 거냐?”
“…크크, 그런 식으로 나오시겠다? 내가 그런 수작에 속을 것 같냐?! 아무것도 모르는 척 하면 내가 입을 열 거라고 생가가가가가가가각…!”
녀석의 말이 마치 고장난 메트로놈처럼 늘어진 것은, 녀석의 투구를 붙잡은 내가 그대로 생명력 흡수를 써버렸기 때문이었다. 활기를 주욱 빼앗긴 검사의 움직임이 둔해졌고, 넝쿨에서 빠져나오려는 움직임도 더뎌졌다.
“난 성질이 좀 급해. 내 질문을 좆깔 때마다 존나 뼈가 삭을 정도로 정기가 쭉쭉 빨릴 거야. 쓸데없이 펄펄 뛰는 활기를 좀 뽑아내면 현자타임 와서 얘기가 잘 통하겠지?”
“젠장… 이, 빌어먹을 마녀 같으니…!”
네, 오답.
오답을 말했으니 벌칙을 받아야지. 끄아아악, 하고 처량한 목소리가 골목 여기저기에 울려퍼졌다가 사라졌다. 이거 좀… 재밌는데.
“한번만 더 묻겠어. 딱 한 번이야. 셴 타이펑이라는 새끼가 그 점쟁이 여자를 노리는 이유가 뭐냐고.”
“하아, 하아, 하아… 그 사람이… 셴 타이펑이 알고 싶어하는 것의… 위치를 안다. 내가 아는 건, 그것뿐이야!”
“씁. 이봐요, 대가리가 잘 안돌아가세요? 구체적으로 말하라고. 셴 타이펑인지 타이어 펑크인지가 알고 싶어하는 게 뭔지까지 말하란 말야, 이 고자 후보 자식아. 골렘 불러내서 돌로 거기 찍어버리전에 말 안 해?”
“그건…”
검사가 고개를 푹 수그리고, 낮게 뭔가를 읊조렸다.
짜증과 초조함을 동시에 느끼며, 그의 투구 사이로 얼굴을 가까이 가져가자… 투구의 슬릿 사이로, 놈의 눈이 번뜩이며 빛났다.
“바로 너 같은 마녀 년의 시체가 어디에 버려졌는지를 알고 싶어하겠지…!”
오싹한 살기가 등 뒤에서 예리하게 섬뜩했다. 바로 지금까지 숨기고 있던 기척이 갑자기 폭발하듯, 솟구쳐올랐다. 도망쳤다고 생각했던 도적이었다.
“이런 ㅆ…!”
몸을 돌렸다. 가브롤의 지팡이를 앞으로 뻗으면서 무엇인가, 아무 것이라도 좋았다. 주문을 외우려고 했다. 마력탄이든, 골렘이든, 식물이든…
푸욱.
가슴팍에, 날카로운 감촉이 살을 비집으며 파고들었다.
아프기보다는 뜨겁고, 그 뜨거움에 한 조각 서늘함이 함께 스며들었다. 출혈이 그 뒤를 따라 튀어 올랐다.
꺽, 찢긴 폐부에서 공기가 새어나가면 숨을 쉴 수 없어 죽을 듯이 답답하다는 것을 깨달으며, 그대로 자신의 몸에서 뿜어나온 피보라에 잠겨 바닥에 쓰러졌다.
눈앞이 캄캄해져간다.
씨발, 그 점쟁이가 한 말뜻이 이거였냐고. 다시 만나기만 해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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