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1화 〉 2 4 / 걸리버들의 도시, 베어링턴에서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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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자칭 ‘죽음의 여신’이라고 말한 그 여자의… 신탁을 믿어도 좋은 걸까.
그래도 발길을 돌려 베어링턴의 모험가 길드를 서둘러 찾은 것은 그래도 명색이 신이라고 한 주제에 대놓고 거짓말을 치진 않겠지, 하는 스스로 생각해도 참 못 미더운 판단에 따라서였다.
키에리를 치유마법사에게만 맡겨둬도 좋을까 고민했지만, 어차피 흑마법사인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옆에서 초조하게 지켜보는 정도일 테고. 아무튼 지금은 손에 잡힌 게 지푸라기든 썩은 동아줄이든 당기고 볼 수밖에.
걸리버들의 도시답게, 모험가 길드도 북적이고 있었다.
테이블마다 사람들이 이리저리 들어앉아서는 누군가는 식사를 하고, 누군가는 초저녁부터 술을 몇 잔 거하게 걸친 것 같았다. 돈이 급해보이는 남자는 초조한 눈으로 의뢰를 알선해주는 열람판을 들여다보면서 자신에게 맞는 일을 찾기도 했다.
“어서 오세요~”
손님, 그것도 주로 남성 손님을 유혹하듯 윗가슴을 대담하게 드러낸 여급이 살가운 태도로 다가왓다… 혹시 자신이 또 아는 얼굴은 아니겠지, 하고 바라보았지만, 응. 적어도 고양이귀가 달린 지인은 없었으니까. 꼬리를 살랑거리는 지인은 더더욱.
“사람을 찾고 있는데요.”
“아하, 수색 의뢰이신가요~? 의뢰 접수라면, 저쪽 창구에….”
“아니, 아니, 그게 아니라. 이 길드에 자주 오는 사람이라던데.”
“아아, 모험가 지명이신가요~? 초저녁인데, 손님도 차암. 야·릇·해.”
…여기 창관이었나? 모험가 길드 아니었나?
은근하게 바라보면서 고양이귀를 쫑긋거리는 여급과는 대화가 되지 않을 것 같아서, 어흠 하고 헛기침을 하곤 지나치려고 했다. 좀 더 말이 통하는 사람을 찾…
덥썩, 손목이 붙잡혔다. 끈질겨!
“손니임~? 그러지 마시고오. 누굴 찾으시는지 말씀이라도 한번 해 보시는 건 어떨까요~? 혹시 모르죠, 제가 잽싸게 도와드릴 수 있을지도…?”
고양이귀의 눈에는 고양이답게, 한번 노린 먹잇감을 쉽게 놓아주지 않겠다는 정념이 이글거리고 있었다… 접객이 수익으로 직결되는 구조라도 되는 모양인가? 쉽게 놓아줄 것 같지 않아서 한숨을 푹 내쉬곤 포기했다.
“이 길드에 자주 찾아온다는 점쟁이를 찾아왔어요.”
“음? 아~ 있죠, 그런 사람.”
잠시 생각하다가 손가락을 딱 튕기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초조해졌다.
이쪽은 지금 사람이 죽네사네 하는 판국이라고.
“안내해줄 수 있어요?”
만면에 웃음이 가득. 말 그대로 체셔 고양이 웃음이었다.
스마일과 함께 손을 내민다면 무엇을 원하는지는 뻔할 뻔 자. 한숨 한번 푹 내쉬고 50탈랭 은화 한 닢을 내자 조금 더 고양이귀 점원의 태도가 곰살궂어졌다.
“이쪽으로 오세요~”
짧은 스커트 아래로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면서 앞서가는 고양이귀 점원의 뒤를 따랐다.
…솔직해지자. 꼬리에서 조금 눈을 뗄 수 없었다. 수염이 생각도 나고. 아, 수염이는 과실에서 기르던 코숏이다. 전에 얘기했었지?
모험가가 웅성거리는 홀을 지나 조금 안쪽 복도를 거쳐 문 앞에 다다랐다. 모험가가 들락거리는 곳이다보니 숙소를 겸하는 것은 크게 이상할 일도 아니다.
이 방에 묵는 투숙객이 나 마법사요, 하고 광고하는 듯 문에는 커다란 별과 눈동자가 기괴한 그림이 한 장 붙어있었다… 사이키델릭한데, 조금.
“이 방이에요~”
“악취미네요….”
“그렇죠?”
고양이귀 점원이 시원하게 긍정하면서 통통, 방문을 노크했고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는 문을 열었다. 눈에 확 들어온 것은 테이블과 커다란 수정구. 그야 방에 불도 안 밝혀두고 테이블에만 촛불이 타고 있으면 그것부터 보일 수밖에.
“훗, 훗, 훗, 훗, 훗.”
거기다가 일부러 그러는 듯한 음산한 웃음까지 더해지고 나면, 괜히 다시 방문을 닫고 나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졌다.
창문까지도 커튼으로 막아둔 탓에 별로 신비롭지는 않은 어둠 속에서 우중충한 로브를 입고, 챙이 넓은 모자를 쓴 인물의 몸집은 조그마했다. 작달막한 손은 수정구 위에서 수상한 손짓을 하고 있었다… 돌팔이는 아니겠지?
“그대, 길을 잃고 헤매면서 망설이는 자여… 그 고독한 순례를… 어, 음. 아니. 아니. 그 고독한 순례의 이정표를 찾아, 여기에까지 왔느뇨?”
내 인명사전에 또 한 명의 이상한 녀석이 추가되었다.
아니, 아직 이름도 뭣도 모르니 추가는 조금 미뤄두도록 할까. 한숨 한번 푹 내쉬고 그… 점쟁이의 맞은편 의자를 끌어당겨 마주 앉아 팔짱을 꼈다. 설마, 나도 다른 사람들한테 이 점쟁이처럼 보이는 건 아니겠지?
“자아자아자아. 무슨 점을 보시겠어요? 수정 점을 봐 드릴까요? 아니면 카드 점? 그것도 아니면 운이 좋아지는 매직 아이템이라도 조금 사시려고 오셨을까요? 아니면 순간적으로 스테이터스가 올라가는 물약도 있는데요!”
이상한 점쟁이는 순식간에 잡상인으로 잡체인지를 했다.
자칭 죽음의 여신, 정말 제대로 된 신탁을 내린 것 맞아?
그나저나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하나.
“저기, 내 친구가 지금 도바츄의 독에 중독됐거든. 누가 그러던데 당신이 그 독을 풀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왔어.”
“네? 어… 잘못 아신 것 아니에요? 전 점쟁이지 치유사나 드루이드가 아닌데요?”
젠장. 그 죽음의 여신, 진짜로 거짓말을 치…
“아, 스승님!”
점쟁이의 자그마한 등 뒤로 누군가가 다가왔다. 얼굴은 면사포로 가렸고, 상복 같은 검은 드레스를 입은 여자는 얼굴을 일절 드러내지 않은 채 손을 들어 제 입술 부근에 갖다 대어 쉿, 하고 신호를 보냈다.
점쟁이는 즉시 자리를 지켜 옆으로 물러섰고, 그 자리에 대신 앉은… 수수께끼의 여자는 여전히 얼굴을 보이지 않은 채 수정구에 손을 짚었다. 순간 조금 더 빛을 머금은 수정구 속에서 문자가 하나하나 떠오르는 게, 이걸 필담… 이라고 해야 하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기다리고 있었다…고?
눈을 깜빡이면서 연사포에 가려진 여자의 얼굴… 부근을 바라보았다. 어쩐지 살풋 웃는 것 같기도 한 미세한 공기가 전해져왔다.
“기다리고 있었다니, 날 알아요?”
끄덕. 고개가 움직이면서 긍정의 뜻을 표했다.
…날 안다고 해도, 난 이런 분위기 있는 여자에 대해 짚이는 바가 전혀 없었다. 아무리 머릿속 인명록을 뒤져봐도 이런 지인은 없다.
[걱정마세요. 저도 이렇게 실제로 뵙는 것은 처음이니까요.]
“…그건… 다행이네요.”
알쏭달쏭한 기분이지만, 아무튼 죽음의 여신의 신탁이 가리킨 대상은 이 여자인 모양이다. 눈을 조금 가늘게 뜨고 미심쩍은 눈으로 바라보노라니, 수정구에 새로운 문자열이 떠올랐다. 눈동자만 굴려, 그 문자열을 바라보았다.
[당신이 찾고 있는 해독제는 제가 드리겠습니다. 대신 조건이 있어요.]
아, 언제 조건을 내세울지 궁금해하고 있었지.
뭐든 쉽게 안 가네 정말. 한숨을 푹 내쉬고 침묵을 지킨 채 여자를 바라보았다.
[물론 시간이 급하니만큼 해독제는 먼저 드리겠습니다. 제 조건을 들어주시면 해독제를 드리겠다고 하지는 않겠어요.]
“아니, 내가 그럼 먹튀할지도 모르잖아요?”
[그러지 않으실걸요.]
…찜찜하다. 어째서 그렇게 단언할 수 있어?
[오지랖이 넓은 분이시니까요.]
웬즈데이나 즈왈트도 아니고, 키에리나 카르티도 아닌데 대체 내가 오지랖이 넓다고 말할 수 있는 이 인간은 대체 누구야! 여자는 마치 웃음짓듯 손으로 입가를 가리고 조금 고개를 숙인 채 어깨를 살짝 달싹였다.
여자는 이내 웃음을 멈추곤 제 바로 옆에 놔두고 있던 상자를 끌어와 내 앞에 내밀었다. 얼핏 보면 보석상자처럼 보이는 그 상자를 열자 안에는 흰 알약이 하나 들어있었다.
[친구분에게는 이걸 먹이시면 지금 당장은 독이 가라앉을 거에요. 하지만 완전히 해독할 수 있는 방법은… 나중에 알려드리지요.]
“조건을 들어주면 알려주겠다, 뭐 그런 거예요?”
[그게 아니에요. 더 정확히는 지금은 알려드려도… 어찌할 도리가 없습니다. 제가 감히 말씀드리건대 지금은 이게 최선입니다. 절 믿어주세요.]
처음 만난 사람인데 믿고 말고가 있으랴만… 일단 급한 건 이쪽이니 하는 수 없지. 조그마한 약상자를 챙기고는 조건을 들어보겠다는 듯 조금 진지한 표정으로 앉았다.
[조건은 간단합니다. 이 도시에서 절 빼내주셨으면 합니다.]
“갇혀있는 것으론 안 보이는데?”
[갇힌 것이나 마찬가지지요.]
이번엔 한숨을 내쉬는 것 같다.
얼굴 하나 보이지 않는데 감정표현은 꽤 풍부한 별난 여자였다.
[이 도시는 표면적으로는 영주가 보낸 관리가 다스리지만 실은 어… 조금 거친 걸리버 무리를 규합한… ‘셴 타이펑’이라고 하는 인물이 지배하고 있어요. 그리고 그들은 저를 혈안이 되어서 찾고 있고요. 이 모험가 길드까지는 건드리지 못하지만, 길드에서 나가는 즉시 절 납치하려 들 거에요.]
예상이나 했을까. 예상은 했지.
골치 아픈 일에 얽히리라는 것을.
[하지만 저는 오늘 저를 이 도시에서 나가게 해 주실 수 있는 분이 오시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답니다. 그리고 그분 또한 제 도움을 필요로 하신다는 것도요. 좋은 관계가 될 것 같지 않나요?]
우리는 그걸 악연이라고 부르기로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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