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0화 〉 2 4 / 걸리버들의 도시, 베어링턴에서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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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평평한 지면을 골라 원을 그리고, 원을 따라 오검(Ogham)문자를 적어넣었다.
그 안으로 그보다는 작은 원을 그리고, 도형과 수식을 짜 넣었다.
원의 가운데에는 이 세계의 모든 것을 굽어살피는 여신, 라에라드의 상징인 태양이 있다.
여신을 따르는 아홉 명의 신족, 우르(Ur)의 상징을 하나하나 새겨넣고, 그 중에서도 죽음과 전사의 여신 발 헬, 마법과 불의 신 말로키르, 대지와 생명의 여신 피요르의 상징을 동심원의 세 귀퉁이에 배치했다.
이는 죽음으로부터 마법을 통해 다시 대지에 불러들이는 의식인 강령술의 개념을 상징하는 마법진이다.
헤카이트 당주가 무엇을 걱정했는지는 사실 잘 모르겠지만… 그 걱정이 기우에 그치길 바랄 수밖에. 지금은 이 방법이, 자신이 떠올릴 수 있는 최선이었다.
“좋아. 시작해볼까.”
“장미 씨… 조금 다시 생각해보는 게 어때요?”
“그래. 주인의 스승이 하지 말라고 했다면 이유가 있을 터이다. 곧 베어링턴에서 치유사가 온다고 하지 않나.”
“그때까지 못 기다려.”
이 급한 성질 때문에 피 본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저쪽에서도, 이쪽에서도 여러 가지로 고생을 하게 된 데에는 이 성질머리가 단단히 한몫했다는 건 알지만, 천성이라는 게 어디 그렇게 쉽게 고쳐지나?
“시작할 테니까 물러나 있어. 둘 다.”
반론이나 설득에 시간을 들이는 것도 아깝다.
조금 단호하게 말하자, 둘은 어찌됐든 걱정스럽다는 듯이 물러났다. 한숨을 내쉬고 조금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원으로 다가갔다.
강령술이 골렘에게 어떻게 작용할지, 솔직히 잘 모르겠다.
즈왈트를 소환했던 것도 의식적으로 불러낸 게 아니라… 어… 사고였고.
필요한 주문은 바닥에 전부 새겨두었기에 새삼스럽게 영창을 더할 필요는 없었다.
짜놓은 회로에 전원을 켜듯이 마력을 흘려 넣어 작동시키는 원리라고 생각하면 이해는 그리 어렵지 않다.
그 전원 스위치에 해당하는 곳에 서서 천천히 마력을 끌어올리자, 마나맥에서부터 들끓은 마력이 제 몸이 아니라 바닥의 진에 새어나갔다. 탈력감이 어깨를 짓눌렀다.
“장미 씨!”
“주인!”
뭐야, 왜…
웬즈데이와 즈왈트가 다급하게 불러대는 목소리가 처음에는 날카롭게, 끄트머리는 어쩐지 물속에서 들려오는 것처럼 뭉개져서 이리저리 울렸다. 정신을 집중하느라 감고 있던 눈을 떴는데…
발목 아래가, 사라져 있었다.
“뭐, 무ㅅ…!”
발목 아래가 사라졌는데도 넘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제 몸이 빛이 퍼져나가는 마법진 안 허공에 붕 떴다는 것을 겨우 깨달았을 때 손에 들고 있던 지팡이가 땅에 툭 떨어졌다. 들어올린 손가락이 하나하나 끄트머리에서부터 가루가 되어 흩어졌다.
“즈왈트, 웬즈데이, 오지 마!”
물론 내 말을 들을 골렘들은 아니었지만.
즈왈트가 어깨를, 웬즈데이가 허리를 붙잡았다. 당기는 힘도 무색하게 오히려 확 당겨져서 그들이 마법진 안쪽으로 끌려온 순간 바닥에서 사라져가는 발목, 무릎, 허벅지를 붙잡는 단단한 손들이 느껴졌다.
“욱…!”
욕지기가 치밀었다.
뼈마디만으로 이루어진 손들이 생전의 미련을 붙잡듯이 날 붙잡았지만 그때의 나는 이제는 비명조차 지를 수 없는 상황에 빠졌다.. 그야 코 아래가 사라졌으니 비명을 지를 수 있을 리가.
붕괴는 점점 빨라져 눈가에까지 이르고, 마침내 눈꺼풀까지 덮치고 난 뒤, 난 아직도 내가 눈을 뜰 수 있고 또 깜빡일 수도 있다는 것에 조금 놀랐다.
“아, 아… 어, 윽… 속이 안 좋아.”
목소리도 나왔다. 목을 만져보니 제대로 붙어있었다… 숨도 제대로 쉬어지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잊어버릴까봐 이렇게 다시 깨닫게 해 주네.
그나저나… 처음에는 또 그 반반 여자의 영역에 왔나 하고 생각했지만 이번엔 아니었다. 이간의 마녀 라타토스크… 라고 했던가. 그녀의 영역에는 아무것도 없는 텅 빈 공간에 그 여자 혼자 앉아있었을 뿐이었지만, 여기는 분위기가 완전히 달랐다.
“여긴 대체… 웬즈데이, 즈왈트!”
분명 그 둘도 같이… 말려들었을 텐데.
전이라고 해야 하나, 소환이라고 해야 하나. 하지만 그 어디에도 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모습이 보이지 않는 둘의 대답이 똑똑히 울려왔다.
머릿속에서.
[장미 씨, 괜찮으세요? 어디 팔이 떨어졌다든가, 다리가 하나 없다든가… 귀가 한짝 없어서 짝귀가 되셨다던가….]
“팔다리에 귀까지 두 개씩 멀쩡하거든. 걱정이 아니라 저주를 해라, 그냥.”
[무사한 것 같군. 일단 다행이다. 그러나 여기는 대체 어디지?]
…골렘 둘이 내 머릿속에서 웅웅거리며 떠들어대니 정신이 오래 버티질 못하겠다.
여기에는 오래 있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은 했지만, 대체 어디인지 어떻게 해야 돌아갈 수 있을지는 감도 잡히지 않았다.
“하아… 사고를 크게 친 것 같은데, 대체 여기 어디냐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사방에는 야트막한 언덕조차 없이 평평했고, 바닥에는 쌓인 눈이 하늘에서부터도 계속 떨어지고 있었다. 묘하게 살갗에 닿아도 차갑지가 않아서, 추위를 느끼거나 하지 않은 것은 다행이었다. 그때였다.
까앙, 까앙, 까앙, 까앙…
이질적인 소리가 들려왔다. 쇠를 두드리는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누군가가 있었다. 그쪽으로 향하자고 생각한 순간 자신의 몸이 그 앞에 이미 다다라 있는, 신기한 체험에 몸이 움찔거렸다.
검은 머리카락이 등을 덮은 채, 뼈마디가 단단한 손이 연신 움켜쥔 망치를 모루에 내려쳐댔다. 망치와 모루가 부딪힐 때마다 불과 번개가 튀었다.
이상한 광경이었다. 다른 손에는 집게를 쥐고 있었지만, 그 집게에는 아무것도 잡혀있지 않은 채로… 노에서 회색 불길이 일렁거렸다. 뒤늦게, 자신의 몸이나 이 세계의 어디에도 채도라곤 없는 회색빛 광경인 것을 깨달았다.
“…저기.”
부르자, 망치질이 멎었다.
여자는 망치와 집게를 놓고 천천히 일어서면서 뒤돌아보았다. 방금 이 세계의 어디에도 채도가 없다고 말했지만 단 한 곳… 이 여자의 눈만큼은, 황황하게 타오르는 황금색이었다.
“끅…!”
비슷한 느낌을 겪어보았다.
눈이 마주친 순간, 저주스럽게도 그 빌어먹을 발스턴과 마주했던 기억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마치 보이지 않는 손이 숨통을 억죄고 어깨를 짓누르는 것 같았던, 다시는 떠올리고 싶지 않았던 기억이었다. 이런 식으로 여기에서 다시 느낄 줄은 몰랐다.
조금도 의도하지 않았는데, 무릎이 후들거리다가 꿇려지기 일보 직전, 무엇인가가 어깨를 붙들고 버텨주는 기분이 들었다. 진짜, 이럴 때는 도움이 되는 녀석들이라니까… 학, 하고 겨우겨우 버텨선 채로 숨을 내뱉자, 여자의 단정한 얼굴에 흥미가 맴돌았다.
“…당신, 누구야.”
아무튼, 그런 첫만남이니 첫인상이 좋을 리가 없었다.
대뜸 시비조로 내뱉은 것에 순간 흠칫했지만, 여자는 특별히 탓할 생각은 없어 보였다.
그 여자가 눈을 가늘게 뜬 것은, 아마 다른 이유에서였을 것이다.
“날 불러놓고 내가 누구냐고 묻다니. 조금 어이가 없는데.”
“…뭐?”
조금 이해가 가지 않아서 눈을 깜빡인 순간, 풍경이 달라졌다.
마치 어딘가의 고성 안 응접실 같았다. 그걸 인식하고 나니 자신이 푹신한 소파에 앉아있다는 것도 아울러 깨달았다. 손에 찻잔을 들고 있는 것도. 벽난로에서는 모닥불이 소리없이 타고 있었다. 여전히, 회색이었다.
“식사는?”
“…필요 없어.”
이런 데서 식사 대접을 받아봤자 회색 요리가 나오겠지.
다이어트에는 좋겠다. 입맛이 뚝 떨어질 테니까.
“그보다 난 당신이 누군지도 몰라. 부르지 않았다고. 내가 부른 건…”
“‘노래하는 성녀’ 로젤라이, 맞지?”
여자는 당연하다는 듯이 그 이름을 말하고는 제 손에 담긴 차를 한 모금 마셨다. …근 1년 동안 들은 적 없었던 이름을, 누군지도 모르는 여자에게 듣는 것은 생경한 기분이었다.
“설마, 당신….”
“넌 어디 가서 눈치 빠르다는 소리는 못 듣겠구만. 나는 ‘발 헬’이라고 불리고 있다. 죽음의 여신인지 뭔지 으스스한 녀석들이 좋아하는 자리에 다소 억지로 앉혀져서 말야.”
…여자는 툴툴거렸다. 어지간히 제 처지에 불만스러운 모양이다.
하긴 이런 회색뿐인 공간에서 살다 보면 정신이 어디 한 군데 맛이 가도 이상하지 않겠지.
“아니, 난 불러내려고는 했지만 불려올 줄은 몰랐는데…요. 그, 여신님.”
“집어치워.”
여자는 질색했다.
송충이가 다리를 기어오르는 느낌이라도 받았나 보다.
“여기에 온 녀석들한테 그런 취급을 받는 건 슬슬 넌더리가 날 것 같으니까. 왜 다른 좋은 자리 놔두고 하필이면 죽음의 여신이냐고, 씨발.”
어지간히 제 처지에 불만이 많은 게 마치 블랙기업에 입사한 신입사원 같은데.
어흠, 하고 여자는 되알지게 욕설을 내뱉은 뒤 다리를 바꿔꼬았다.
“…뭐 그럼 됐고. 왜 날 여기로 불렀어요?”
“내가 부른 적 없어.”
여자가 손을 들었다. 손가락 하나를 뻗었는데, 그 손가락은 안대에 가려진 내 왼쪽 눈을 가리키고 있었다. 아마 처음 봤을 때 나에게… 적개심 같은 걸 느낀 건 이 눈알 때문이었나보다.
“그 눈알이 여기로 널 끌고 온 거지. 어지간히 이 자리가 그리웠나 본데, 그 빌어먹을 반역자 노친네가.”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못 알아듣겠는데.”
“나도 딱히 지금 알아들으라고 한 말은 아냐. 아무튼 로젤라이…를 불렀단 말이지.”
휴우, 여자는 조금 곤란하다는 듯 숨을 내쉬었다.
뜻모를 소리를 하는 것도 여전하다. 하긴, 이런 데서 혼자 살면 혼잣말이 느는 것도 이해해줘야지.
“이게 너희들 배교자들이 오면서 꼬인 건데…. 뭐 내가 자초한 것이긴 하지만.”
“뭐라고요?”
…어쩐지 지금 불순물 취급당한 것 같아서 기분이 더러운데. 자초 어쩌고는 무슨 소리고?
그러거나 말거나 여자… 인지 여신인지 모를 눈앞의 상대는 잘도 떠들어댔다.
“너희 배교자들이 죽는 건 내 관할이 아냐. 미련이 있어서 세상을 배회하는 녀석들은 모를까, 미련 털고 여신에게 돌아간… 그러니까, 라에라드. 아무튼, 거기로 돌아간 녀석들은 내 손을 떠난다고.”
즉, 걸리버는… 죽은 뒤 해탈? 성불? 아무튼, 미련을 다 풀고 나면 더이상 불러낼 수가 없다는 건가? 그게 꼬이고, 이 눈이 뭔가 일을 벌여서 여기에 왔다… 고 생각하면, 엉망진창이라고밖에는 말할 수 없다.
단순한 행정착오라면 종종 있는 일이지. 하지만 그걸 관대하게 넘어가는 건 다른 문제다.
“그럼 얼른 돌려보내 줘요. 여기서 노닥거리고 있을 시간 없으니까.”
“다시 말하지만 내가 부른 게 아니야.”
“내 친구가 죽고 있다고요!”
친구, 라는 말에 여자의 표정이 조금 굳었다.
다시 한번 한숨 비슷한 것을 내쉬고는 눈을 잠시 감았다가 다시 눈꺼풀을 들어올려 황금색 눈동자를 보이는 그 행동에서 어쩐지 씁쓸한 감정이 전해져왔다.
“…씁. 아무튼, 하필 여기에 왔으니까 담당자로서 선심 좀 쓰겠어. 네 친구라는 그 여자가 당장 죽을 운명은 아니니까 내가 혼잣말 좀 할 건데, 알아듣든 말든 그건 네 맘이야.”
뭔가 변명조로 중얼거리는 것이 대놓고 신탁을 주기가 미묘한 사안인 모양이다.
죽음의 여신의 신탁이라는 건 꽤나… 불길함밖에는 느껴지지 않지만.
“모험가 길드에 죽치고 있는 점쟁이를 찾아가 봐. 내가 말할 수 있는 건 여기까지.”
손에 들고 있는 잔에 담긴 차를 마저 쭉, 마치 소주라도 마시는 것처럼 입에 털어넣은 다음, 여자는 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째앵. 맑은 소리와 함께…
“…?!”
풍경은 다시 원래대로 돌아와 있었다.
르누레르 숲 어귀, 지팡이를 짚고 선 그대로. 선잠에 꿈이라도 꾼 건가, 하고 생각했지만… 곧 자신의 짐작이 틀렸다는 것은 깨달을 수 있었다.
내 좌우 양옆에, 흙더미와 ‘가브롤의 지팡이’가 아무렇게나 팽개쳐져 있었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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