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6화 〉 2 4 / 걸리버들의 도시, 베어링턴에서 (1)
* * *
(1)
외벽 밖에서도 보일 정도로 거대한 시계탑이 인상적이었다.
도착한 베어링턴은 제법 번화한 도시였다.
오른쪽을 둘러봐도 사람, 왼쪽을 둘러봐도 사람. 건물들도 말끔했고, 도시 전체가 마치 거대한 시장 같은 인상을 주었다.
왕도에 비견될 정도는 아니었지만, 제법 남쪽으로 내려왔던 것을 생각하면 사람이 북적이는 도시에 오니 새삼 기분이 조금은 나아졌다. 르누레르 숲에서는 기묘…라는 말만으로는 전모를 표현하기에 다소 부족함이 있는 일이 있었긴 했지만.
“제법 북적이네….”
“남부의 길목 중 한 곳이니까. 남쪽에서 걷히는 세금이 여기를 통과해서 왕도로 올라가니 그야말로 돈이 여기저기 깔린 곳이라고.”
“게다가 어쩐지 뭔가 위화감이 느껴지는데요?”
“위화감이라니?”
잭 단장과 즈왈트가 차례로 내 물음에 반응했지만, 어떤 위화감인지는 콕 집어 말할 수가 없었다. 이걸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하나…
“…뭐 그냥 착각이었을지도 모르니까. 그것보다, 이제부터 어쩔 거에요?”
“일단 정비를 맡길만한 업자를 구해보고, 구해지면 독수리를 보내서 우리 배를 이쪽으로 오게 해야겠지.”
조금 부지런히 걸어야 할걸, 하고 잭 단장이 뻐근해진 목 관절을 두둑두둑 풀었다.
그런 업자를 쉽게 찾을 수 있을 것 같지는 않긴 한데. 거리를 지나면서도 어쩐지 뭔가 말하기 어려운 위화감이 계속 켜켜이 쌓여만 갔다.
“일단 식사를 할까? 제대로 된 식사부터 해야 돌아다닐 기운이 나겠지.”
“찬성이에요.”
일단 밥을 든든히 먹어둬야 무슨 일을 해도 할 테니까.
적당해 보이는 식당과 술집을 겸한 선술집에 들어갔다. 각양각색의 장비를 갖춘 이들이 테이블 하나씩 차지하고 이른 술이나 식사를 하며 수군거리는 게 누가 봐도 모험가들이었다.
음… 시장기가 돌아서 그런지, 훅 하고 끼쳐오는 음식 냄새를 참기가 힘들었다. 어쩐지 조금 익숙한 것 같은 맵싸한 냄새가 돌아다니기도 하고. 누가 매운 음식이라도 시켰나…?
평범한 시민들과 무장한 모험가들이 자연스레 뒤엉킨 것을 보면 이쪽에서도 이런 건 일상적인 풍경인 모양이다.
뭐, 잭 단장과 즈왈트, 그리고 자신도 그렇게 보일 게 뻔하니까.
괜히 주변의 이목을 끌지 않아도 된다는 건 좋은 일이지. 귀여운 의상을 입은 웨이트리스에게 메뉴를 받아들고, 적당히 음료와 식사를 주문했다.
어라, 그런데 메뉴가…
어디서 많이 본 것들. 잭 단장은 눈썹을 찡그리며 고심하다가, 메뉴의 한가운데쯤 있는 것을 골랐다.
“음…, 여기 이 ‘싸고 양 많은’ 머스터드 핫도그라는 것으로.”
분명 싸고 양 많은, 이라는 대목에서 마음이 끌린 것 같다.
늘 적자를 걱정하는 눈치였지만, 밥값까지 쪼들릴 정도인가…? 아무튼, 슬슬 이 도시에 와서 느꼈던 위화감의 정체가 슬슬 분명해지려는 찰나였다.
“…라면.”
라면!
왜 이세계의 식당에 라면 같은 게 있습니까?! 하지만 있다고 한다면 먹지 않을 수가 없다.
솔직히 말하자면 저쪽에 살았을 때는 라면이라면 지긋지긋하게 먹었던 데다 죽기 직전 마지막으로 먹었던 것조차 컵라면이어서 라면이라면 치를 떨 만도 했지만…
그것도 이제는 마치 남의 일인 것 같은 기억이어서, 오히려 2년 만에 본 라면이라는 게 반갑지 않을 수가 없었다. 돈을 조금 더 내면 토핑을 추가할 수 있는 점도 고마운 일이다. 계란, 파, 햄을 추가하고 주문을 마쳤다. 기대감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잭 씨, 여기는 혹시 걸리버가 많이 사는 곳이에요?”
아까부터 느껴지던 기묘한 위화감은 아무래도 그 때문이었던 모양이다.
음식이 나오기 전 조금 알아두고 싶어서 물어보니 흠, 하고 주위를 둘러보고는 잭 단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드모아젤도 들은 적 있지? 걸리버 보호 법령.”
이전에 루시탄이 말해줬던 기억이 났다.
이 나라, 알트슈타인에서 실시하고 있는 법령으로, 나와 같이 다른 세계에서 온 사람들… 그러니까 걸리버들을 보호하고 나라 차원에서 유용하게 써먹기 위해 만들어졌다고 얼핏 들은 것 같다.
“베어링턴은 그 법령에 기초해서 세워진 도시라고. 걸리버들이 모여 사는 일종의… 음… 에트루사 같은 자유도시와 비슷하지. 물론 그 정도로 완전히 독립적인 위치는 아니지만, 아무튼 걸리버들이 주축을 이루는 곳인 것은 맞아.”
“그래서 라면 같은 걸 먹을 수 있는 거네요.”
이야기가 오가는 사이 머스터드 핫도그와 사기그릇에 담긴 라면이 날라져 왔다.
…냄새는 합격이다. 빠알간 국물에 야들야들하게 녹아 노른자가 툭 하고 불거진 계란. 토핑으로 추가한 햄에도 국물이 잘 스며들어 먹음직한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잘 먹겠습니다…!”
아, 못 참겠다… 아주 자연스럽게 딸려 나온 젓가락이 반갑다. 살짝 어색하게 느껴지는 젓가락을 손에 쥐고, 2년 만에 맛보는 라면을 영접했다! 아, 조금 눈물 나오려고 해.
젓가락으로 면을 큼지막하게 쥐고 후루룩, 경쾌한 소리를 내며 입안으로 빨아들였다. 흔히 먹던 꼬불꼬불한 인스턴트 면이 아니지만, 충분히 꼬들꼬들하고 탱글탱글한 식감이 입안을 여기저기 튕겨오르며 춤추었다.
언제 삼켰는지도 모르게 면을 목 너머로 넘겨버리고는, 그릇을 들어서 국물을 꼴깍꼴깍 마셨다. 혀를 아릿하게 달구는 매운맛, 그리고… 마늘의 향과 맛이 강하게 느껴져서 코로 훅 스며 올라왔다. 후아… 볼이 발갛게 달아올라선 표정이 헤실헤실 풀렸다.
“그렇게 맛있나?”
즈왈트가 어딘지 조금 불쌍하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이런. 너무 라면 맛에 취해있었나. 조금 부끄러워져서 볼을 붉히곤 이번에는 맵싸한 국물에 계란을 터뜨려 휘저어 풀면서 어흠, 헛기침했다.
“평생 못 먹을 거라고 생각했단 말야. 넌 이 기분 몰라.”
라면 국물과 면발이 줄어드는 게 아깝다고 생각하면서도 먹는 걸 멈추질 못하겠어.
국물 몇 방울 정도만 바닥에 남을 정도로 순식간에 해치워버린 뒤 휴우… 하고 만족한 숨을 내쉬었다. 요플레 뚜껑 핥듯 핥아먹고 싶은 욕구가 들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거기까지 자존심을 내려놓을 수는 없었다.
“하아, 잘 먹었다….”
만족, 만족.
라면 정도로 이만큼 행복을 느낄 수 있다니.
아니, 분명 손으로 뽑은 면에 라면 스프 같은 게 공산품으로 있을 리 없는 이세계에서 이 레벨의 라면을 만들기 위해… 이 주방의 걸리버는 얼마나 많은 시행착오를 반복했을지 생각하면 그런 말은 실례일 수도 있겠다. 이런 라면이기에 이런 행복을 느낄 수 있었다! 로 정정.
“자아, 그럼.”
잭 단장도 일어섰다. ‘싸고 양 많은’이라는 수식어도 괜히 붙은 게 아니었는지 그도 꽤 배를 채운 모양이었다. 아무것도 먹지 않았을 때조차 댄디즘을 고집하던 그였지만 지금은… 한층 더 빛나고 있다고 해야 하나?
뭐, 아무튼. 먹었으면 할 일을 해야겠지.
잭 단장은 옷깃을 단정히 여미고는 천천히 웨이트리스에게로 다가갔다. 이보쇼, 설마 할 일이라는 게 그런 일은 아니겠지?
“실례. 맥와트 마공학 정비소를 찾고 있는데.”
“아, 마공학 정비소로군요. 거기라면 큰길을 따라가다가 두 번째 골목에서…”
웨이트리스는 서글서글한 영업용 스마일로 길을 안내해주고 약도까지 그려주었다. 오랜만에 반가운 음식을 먹고 배도 부르고 하니 별 것 아닌 친절에도 마음이 막 훈훈해지고.
“그럼 우리는 마을을 좀 돌아볼게요. 걸리버 도시라니 구경할 것도 있을 것 같은데.”
“오, 그럼 한 4시쯤 광장에서 만나기로 할까?”
1시간 반 정도의 자유시간인가. 그러고 보니 마을 광장에 커다란 시계탑이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집합 장소는 거기면 되겠지.
“…내가 말 꺼내놓고 말하긴 뭐한데, 난 일단 인질 취급 아니었어요?”
“인제 와서 따지기는 늦었다고 생각하지 않아?”
“그것도 그렇네요…. 뭐 아무튼. 그럼 이따 봐요.”
…왜 자연스럽게 이따 보자고 말이 나온 거지? 스스로도 고개가 갸우뚱 움직였다.
이게 그 뭐라더라. 스톡홀름 증후군…? 잭 단장이 멀어지면서 손을 흔들어주다가, 일단 아무도 없는 골목길로 들어갔다. 제 생각으론 아무도 없을 법한 뒷골목이었지만, 만일을 대비해서.
“즈왈트, 주위에 누군가 있어?”
“아니, 아무도 없다.”
주위에 이목이 없는 것을 한 번 더 확인하고… 지팡이를 원래의 골렘 모습으로 되돌리자, 웬즈데이가 나타나자마자 부루퉁한 표정이었다.
“장미 씨, 너무해요!”
“…나 뭔가 했던가?”
가끔 자기 사역마의 생각을 따라가지 못할 때가 있다.
아니, 더 정확하게는 이 사역마들, 너무 제멋대로 굴 정도로 자의식 강하지 않아?
그건 그거고. 시간이 그리 많지 않으니 해야 할 일부터 둘에게 일러주기로 했다.
“…그건 조금 괜한 참견인 게 아닌가?”
내 얘기를 듣고 난 뒤 별로 내키지 않는다는 얼굴로 즈왈트가 눈을 가늘게 떴다. 웬즈데이도 가타부타 뒷말을 붙이지 않았을 뿐 즈왈트와 그다지 의견이 달라 보이지는 않았다.
“어쨌든 헛걸음을 하더라도 조금 알아봐. 즈왈트는 모험가 길드로 가고, 웬즈데이는 상점가에서 정보를 모아봐.”
웬즈데이에게는 동전 주머니를 맡겼지만, 조금 아쉽게도 웬즈데이는 골렘이라 뭔가를 먹을 수가 없었다. 과자나 사탕을 먹을 수 없다는 데 조금 유감스러워하는 눈치였지만… 나중에 한 번, 그쪽으로 개량할 방법이 없는지 연구해볼 필요는 있을 것 같다. 적어도 맛은 느낄 수 있도록.
“장미 씨는 어떻게 하실 생각이세요?”
“나는….”
입가를 씩 일그러뜨리면서 눈을 가늘게 뜨고 스스로 생각해도 조금 사악하다 싶은 웃음을 지은 채 눈을 깜빡이는 둘에게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오랜만에 솜씨 발휘를 좀 해 봐야지.”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