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9화 〉 2 3 / 세상 무서운 줄 모르는 꼬맹이에게(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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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행상인 크라수스는 도망쳤다.
…혹시나 하는 걱정은 했지만 설마 정말로 실행에 옮겼을 줄이야. 신용을 목숨처럼 여기는 행상인이 화물… 그러니까 우리까지 버리고 도망쳤다고는 선뜻 생각하기 어려웠다.
카르티도 마찬가지로 생각하고 있었는지 눈을 찌푸리곤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애당초, 여기에 올 때는 모두 눈을 가리고 나귀를 타고 왔는데 어떻게 길을 되짚어 산속으로 도망갈 생각을 한단 말인가.
하지만 키에리의 생각은 달랐다.
“아냐. 그 행상인, 아무리 생각해봐도 도망간 거야.”
“어째서 그렇게 확신할 수 있어?”
“산채를 지키고 있던 녀석들이 쥐도 새도 모르게 기절해 있었으니까.”
…어째 으스스한 생각이 들었다.
마음만 먹었다면 그 보초는 아무도 모르게 죽었을지도 모른단 얘기가 아닌가.
키에리의 얼굴에는 분한 기색이 떠 있었다. 그들이 죽지 않은 것은 다행이지만, 명색이 도적단인 자신들을 따돌리고 아무도 모르게 유령처럼 빠져나간 크라수스의 신출귀몰함에 자존심이 상하기라도 한 모양이지.
“혹시라고 생각하지만… 몸값을 못 낸다고 우리를 잡아둘 생각 같은 건 아니지?”
그렇게 나오면 매우 곤란합니다.
흑마법 학회의 정식 마녀가 도적단에게 붙잡혀서 몸값이 없어 억류되어있다고 하면 키르케와 헤카이트 당주가 얼마나 웃어댈지는 뻔하다. 케라우노스도 배를 잡고 웃어대겠지.
상상하니 굉장히… 싫다. 카르티도 똑같은 상상을 했는지 얼굴이 쭉 죽상이었다.
“워어워어. 그런 파렴치한 짓을 해서야 세간에서 우리 래핑 크로우 단을 일개 도적 무리라고 알지 않겠나?”
제3의, 경박하고 쾌활한 목소리가 시원스럽게 그 걱정을 깨끗이 부정했다.
모래사장에 불어닥치는 소금기 어린 바닷바람 같은 목소리였다. 누가 들어도 뱃고동을 떠올릴 것 같은 목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굳이 말하자면 그 남자에게서는 네 가지의 풍모가 동시에 드러났다.
뱃사람, 도박꾼, 술꾼, 그리고 배우. 키르티가 일어서면서 한숨을 지었다.
“글쎄, 이미 반쯤은 도적단이나 다름없게 되어버렸잖아.”
“오, 키르. 너무 그렇게 비관할 건 없어. 파도와 바람이 바뀌면 배가 닿는 곳도 바뀌어야 하는 법이니까.”
“…그래서야 어디 가서 뱃사람으로 밥 벌어 먹고살겠어? 단장.”
청년에서 장년으로 넘어가는 정도의 나이로 보이는 남자는 댄디즘을 체현한 듯한 표정을 얼굴이라는 무대에 연출하면서 무대의상처럼 다소 과장된 검은 의상으로 호리호리한 몸을 감고 있었다.
허리에는 보란 듯이 보석으로 과하게 장식된 황금 자루의 커틀러스를 한 자루 차고, 그 폼멜에 얹은 단단한 손가락 사이에서 소금 냄새가 옅게 풍겼다.
“핫핫. 일감이야 얼마든지 있지 않나. 이 세상의 바다와 하늘에 할 수 있는 일은 얼마든지 있다고.”
“그중 절대다수는 밥벌이가 되지 못 하는 일이고 말이야.”
“대신 낭만만은 구름만큼이나 넘치는 일들이지.”
…뭐야, 저 대화는.
우리 넷을 완전히 청중으로 만들어놓고 제 철학을 설파하는 단장이라는 남자의 기세에 잠시 황당해하고 있다가 핫, 하고 정신을 차렸다.
“댁들의 운영 방침이야 아무래도 좋거든?! 우리는 어떻게 할 거야, 우리는!”
“오, 레이디는 꽤 성격이 바이올런스하군. 우리 키르와도 꽤 성격이 잘 맞겠어.”
그 ‘키르’, 즉 키에리하곤 이미 구면입니다만.
키에리조차도 질색하는 표정을 짓고 있으니 제발 이야기를 좀 진행해주세요.
“일단 단원들을 풀어서 산을 뒤지게 해 놓았으니까 어떻게 된 것인지는 그리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을 거고. 뭣보다 그들의 짐마차를 철저하게 감시하도록 지시해뒀지!”
“단장이 말하니 불길해지는 건 내가 너무 당한 게 많아서 생긴 피해망상인가…?”
전문용어로는 플래그라고 하지, 그거.
뒤통수가 찜찜해지는 와중, 천막 바깥에서 높이 우는 새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오, 하고 남자가 반색했다… 이 세계에서는 ‘헤르모드’라는 종의 독수리를 통신용으로 쓰곤 했지. 전서구 같은 느낌으로.
밖에 나가보니 독수리가 천막 바로 위의 깃대에 앉아 주인을 부르듯 삐이익, 하고 울음소리를 냈다. 삐익, 삐익, 삐익… 몇 번 반복적으로 짧은 울음소리를 내자, 처음으로 남자의 얼굴에서 쾌활한 웃음기가 사라졌다.
“이거 참. 별로 좋지 않은 소식이군.”
“무슨 일인데 그래요?”
남자가 한숨을 쉬었다. 아마 스스로는 수심과 애수, 그리고 댄디즘이 가득하다고 생각하는 듯한 태도였지만 자신이 보기엔 그냥 웃기는 아저씨일 뿐이었다. 유감스럽게도, 그 다음으로 이어진 남자의 말에는 웃을 수가 없었지만.
“아무래도 그 크라수스라는 친구가 안타까운 일에 휘말린 것 같아.”
“…네?”
남자의 손가락이 동그라미를 먼저 그리고 그 안에 십자가를 그렸다.
태양의 여신 라에라드를 가리키는 제스처였다.
두꺼운 가죽장갑을 낀 팔에 독수리를 앉히고는 독수리가 삐익삐익 하는 소리를 유심히 듣더니 손가락을 입에 넣고, 휘파람을 불었다.
다그닥, 다그닥, 다그닥…
기운 넘치는 말발굽소리와 함께 지면을 박차고 달려오는 말은… 전혀 멈출 기세가 아닌 그대로 남자에게로 달려오고 있었다.
씨익. 입가에 자신만만한 웃음을 띤 남자는 들이받을 기세로 달려오는 말을 응시하고 있다가… 높이, 뛰쳐올랐다!
“우왓?!”
순간 사람이 아니라 개구리라고 착각할 뻔했다. 그 자리에서 다리힘만으로 펄쩍 뛰쳐오른 남자의 몸이 잽싸게 안장 위에 올라앉았을 때는 마치 서부 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것 같았다… 저게 댄디즘…?
“좋아, 내 친구가 그 불행한 행상인에게로 안내해 줄 거야. 그럼 잽싸게 가 보자고.”
안장에 올라탄 채 손을 높이 한번 휘두르듯이 들어 올리자 푸드득, 날갯짓을 한 독수리가 높이 날아올라 활공했다. 이랴, 하고 구령을 넣은 뒤 날아가는 새의 뒤를 쫓아갔지만…
“…저걸 무슨 수로 쫓아가?”
공교롭게도 말도 새도 없는 우리가 제풀에 신나서 달려가 버린 새와 말과 기수를 따라갈 재간이 없다… 아니, 애초에 따라가긴 해야 하는 건가?
하는 수 없지. 간만에 마녀다운 모습을 보이기로 할까.
“웬즈데이, 이리 와.”
“네? 아, 네…. 아, 설마 그거 하시려구요? 저 그거 좀 그런…”
…우리 집 골렘들은 너무 말이 많아.
투덜거리면서 웬즈데이의 어깨에 손을 짚고 튜닝했다. 인간형의 골렘에서 지팡이 형태로 바뀌는 것을 웬즈데이는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지만…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하는 수 없잖아.
지팡이 비행술이라면 나름대로 다른 마녀만큼은 한다. 공기로 쿠션을 만든 뒤 지팡이…의 형태가 된 웬즈데이에 올라탔다.
“즈왈트는 카르티를 업고 와.”
“어? 나, 나도 가야 하는 거야?”
“그럼 그냥 놀고 있으려고? 먼저 갈게.”
부우웅, 경쾌한 소리와 함께 지팡이가 떠올랐다.
처음에 지팡이를 타고 날아봤을 때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 같은 두려움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 몸이 하늘을 날고 있다는 고양감을 동시에 느꼈다.
“저쪽으로!”
그래서 조금 방향을 지시하는 소리에도 힘이 들어갔다.
마치 이 세상에서 나는 자유다, 라고 말하고 있는 듯한 비행.
다리 아래로 숲이 깔리고, 내 앞으로 불어닥치는 바람에 머리카락이 흩날리는 기분마저 상쾌했다. 조금 앞서간 말과 새를 발견해 고도를 낮춰서 따라붙었다. 말은 이 좁고 가파른 산길에서도 용케 평지처럼 내달리고 있었다. 마치 이 산의 길은 속속들이 알고 있는 것처럼.
“어디까지 가야 하는 거에요?!”
워낙에 요란스럽게 달리고 있어 말발굽소리가 높았다. 그에 지지 않게 목소리를 높이면서 가까이 다가붙자, 남자가 옆으로 고개를 돌리고 씩 웃었다.
“그건내 파트너에게 물어보라구, 마드모아젤!”
그런 호칭은 처음 듣는데.
그러고 보니 서로 이름도 모른다는 사실을 이제야 깨달았다.
“나는 잭. 흔한 이름이라고 실망하진 말아주게, 마드모아젤. 일단 래핑 크로우 유적단의 단장을 맡고 있지.”
“내 이름도 흔하니까 상관없어요. 난 로즈라고 부르면 되니까.”
참으로 미묘한 상황에서 주고받는 통성명이었다.
잭, 그렇게 제 이름을 밝힌 남자는 거칠기 그지없는 산길을 한없이 혹사에 가까운 기마술로 말을 몰아가다가 이윽고 머리 위에서 독수리가 천천히 내려앉자 고삐를 당겨 말의 속도를 떨어뜨렸다.
킁킁,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코끝에서 비릿한 쇳내가 맡아졌다. 독수리가 천천히 내려앉은 나무에 끔찍한 참상이 펼쳐져 있었다.
자기도 모르게 입을 막았다. 마녀라고 해도 이런 광경에는 좀 약하다고.
나무에 기대어 있는 남자가 있었다. 그가 단순히 낮잠을 즐기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은 주변을 새빨갛게 물들이고 있는 유혈이 증명하고 있었다.
아래턱 위가 커다랗게 으깨어져 치아와 늘어진 혀만 삐져나와있는 참혹한 꼴에, 윽 하고 자기도 모르게 이맛살을 찌푸리며 입을 막았다. 비록 얼굴을 알아보는 것은 불가능했지만… 일단 그 옷만은 본 적이 있었다.
행상인 크라수스는 죽어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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