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커스텀 로즈-58화 (58/157)

〈 58화 〉 2 ­ 3 / 세상 무서운 줄 모르는 꼬맹이에게(3)

* * *

(3)

“이게 얼마 만이야… 대충 1년만인가? 이렇게 보게 될 줄은 몰랐어. 잘 있었어, 내 사랑?”

“키에리?!”

붉은 기가 도는 갈색 머리카락을 묶은 고양이상의 여자는, 항구도시 레짐에서 한창 창녀로 구를 때 동고동락했던 이들 중 한 명인 키에리였다. 잠시 자신이 잘못 본 건가 싶어 눈을 깜빡거렸지만 아무리 봐도 자신을 알아보는 녀석 중 이런 얼굴을 가진 여자는 키에리밖에 없었다.

“엄청 오랜만이네! 너… 어쩌다가 이런 웃기는 서커스단에 끼어있는 거야?!”

“웃기는 서커스단… 변함없이 신랄하네, 로즈 넌.”

아차. 나도 모르게 본심을 그대로 드러내버리고.

피식 웃고는 가볍게 서로 손바닥을 기분 좋게 짝 부딪혔다.

“넌 여전히 틱틱거리는 거 좋아하고.”

“저기이이이이.”

꿔다놓은 보릿자루 취급이 되어버린 나머지 셋 중 카르티가 손을 들고 발언권을 요구했다.

말씀하시지요, 카르티 내무장관.

“둘이 대체 무슨 사이야? 로제의 친구?”

“로제? 흐응. 마법사 되더니 이름도 뜯어고쳤어?”

“그렇게 됐네.”

조금 쓴웃음을 지으면서 어깨를 으쓱이자 흐으응, 하고 재밌다는 듯 키에리가 턱을 손으로 슥 쓰다듬었다가 짓궂은 웃음을 지었다. …조금 불길한데.

“서로 엉덩이 때려대던 사이?”

“야.”

아니, 틀린 건 아니지만. 틀린 건 아니지만 뭔가 오해 살 만한 발언은 적당히 하는 게 어떨까! 카르티는 어째서인지 눈을 동그랗게 뜬 그대로 굳어져 버렸다. 왜 저렇게 충격을 받았는지는 모르겠지만…

“네 얘기나 해 봐. 이… 래핑 크로우라든가 하는 도적단은 대체 뭐 하는 곳이고 왜 넌 여기에 있는 거냐고.”

“말하자면 좀 기니까 지금 당장은 좀 어렵네. 너만큼 이런저런 일이 있었어.”

나만큼이라니, 마치 내가 지난 1년간 어떤 일을 겪었는지 알기라도 하는 듯한 말투다. 오른쪽 뺨을 살짝 일그러뜨리면서 웃음을 짓고는 의미심장하게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나오면 불안해진단 말야.

아무튼, 아는 얼굴이 나타났으니 일이 좀 더 쉽게 풀려주려나?

“그럼 슬슬 우린 보내줘. 알브레히트로 가던 길이었단 말야.”

“알아. 나도 얼른 보내주고 싶지만 음… 우리도 이게 나름대로 비즈니스거든. 불편하게 하지 않을 테니 조금 느긋하게 있어 줘.”

어째 조금 수상한데.

이 녀석 못 본 사이 정말 어디 수상한 범죄단체에 연루된 거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생각해보면 지금 여기부터가 수상하기 이를 데 없는 도적단이었지.

“그럼 설명을 제대로 하든가. 1년이나 살았는지 죽었는지도 모르던 녀석이 갑자기 도적단의 일원이 되어서 나타났는데 아 그래, 하고 넘길 수 있을 것 같아?”

그러고 보면 이래저래 다들 소식을 주고받으며 살았었는데 유독 이 녀석만 소식을 모르고 살았었더란다. 특히 ‘5월 튤립처럼 싱그러운’ 미카 씨가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고.

완고하게 나오는 내 태도에 곤혹스럽다는 듯 머리를 긁적이고는 하는 수 없다는 양 키에리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하아… 이거 말하면 안 되는데. 비밀 지켜줄거야?”

“그럼, 그럼.”

난 의리 빼면 시체라구.

하지만 이미 시체였던 적이 있습니다. 너무 신용하지 않기를.

다소 의혹이 가득한 눈으로 이쪽을 봤지만… 내 두 눈을 똑똑히 봐! 이 눈을 보고도 날 믿지 못하겠어?!

“아니, 눈 하나밖에 안 보이는구만.”

“사소한 건 넘어가고.”

내 입은 그렇다 치고, 남은 세 명의 입을 염려하는 모양이었다.

뭐 둘은 내 골렘이니 괜찮다고 생각하지만… 어째 키에리에게 뭔가 묻고 싶은 게 참 많아보이는 카르티의 입을 막으려면 고생 좀 할 것 같은데.

어쩐지 조금 예상한 그대로, 카르티는 이유 모를 도끼눈을 뜨고 키에리와 눈싸움이라도 거는 듯 눈에 힘을 잔뜩 준 채였다.

“…저기 로즈? 이쪽 분이 날 엄청나게 째려보고 있는데 이유 좀 물어봐 줄래? 좀 무섭다.”

“나도 모르니까 알아서 해결해.”

냉담하게 선을 딱 긋자 키에리가 1년 전에는 참 많이 보았던 골난 얼굴을 했다. 그러다가 다시 카르티에게로 얼굴을 돌리고 생긋, 손님들에게 자주 보이면서 애간장을 살살 녹이던 영업용 스마일을 얼굴에 건재하게 붙였다.

“저기, 우리는 초면인 것 같은데 그렇게 너무 노려보지 않아도 되는 게….”

“인질이 인질범한테 이러는 건 딱히 이상하거나 한 게 아닌 것 같은데.”

뭔가 역할이 뒤바뀌지 않았어?

곤혹스러워하는 키에리와 잡아먹을 듯 눈을 부릅뜬 카르티. 이렇게만 보면 대체 누가 인질이고 누가 인질범인지 모르겠네, 정말로.

결국 키에리가 버티지 못하고 내 등 뒤로 물러났다.

“…카르티, 조금 진정하고. 얘는 내 친구니까 그렇게 경계하지 않아도 돼.”

“아니아니. 로제이아. 멀쩡해보여도 그 웃기지도 않던 꼬마랑 한패거리의 도적이라고. 방심하지 마. 네 등 뒤에서 갑자기 칼로 목을 겨누거나 할지도 몰라.”

이 자리에서 그래 봤자 특별히 이득 볼 것도 없을 텐데.

한숨쉬곤 둘을 번갈아 바라보면서 어째서인지 모를 피로감을 느꼈다. 아아, 일이 본격적으로 귀찮아질 것 같은 예감.

“…뭐, 사이는 나중에라도 돈독하게 될 기회가 있겠지. 아무튼, 뭔가 할 말이 있었잖아?”

“휴우… 말 돌리는 것도 안 통하고.”

그러니 카르티에게 신용을 받질 못하는 거야.

잠시 구시렁거리다가 키에리가 결국 팔짱을 끼곤 말을 꺼냈다.

“너희, 오는 동안 뭔가 이상한 걸 보지 못했어?”

“이상한 거라니?”

특별히 이상한 낌새는 없었다.

네 대나 되는 마차가 깡촌으로 짐을 잔뜩 싣고 가는 것도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충분히 그럴 수도 있는 일이 아닌가 말이야. 뭐, 예를 들면 축제라서 물건이 잔뜩 필요하다거나. …응?

“일단 정확하게 밝힐 순 없지만 말야. 우리 단은 어떤 의뢰인의 의뢰를 받고 이 나라 각지에 은밀하게 돌고 있는… 어떤 밀수품을 빼돌리고 있어.”

난다, 난다.

범죄의 수상한 냄새가 난다.

얽히면 귀찮아질 것 같은 냄새가 난다.

“우리도 드러내놓고 활동할 수만은 없는 처지라서 어쩔 수 없이 도적단을 꾸려서…”

“잠깐, 잠깐만 기다려.”

이런 일에는 끼어들지 않는 게 상책입죠.

난 이제 시골에 가서 느긋한 슬로우 라이프를 만끽할 단꿈에 젖어있었단 말야. 황급히 입을 막으려고 했지만… 키에리의 눈에 불온한 즐거움이 번쩍였다.

“…이렇게 우리 눈에 띄는 짐마차라든지 상단 행렬을 은근슬쩍 뒤지면서 그 밀수품을 찾고 있었던 거야.”

아아, 들으려고 하지나 말걸!

웬즈데이, 즈왈트! 흥미롭다는 얼굴로 저 말을 듣지 마! 귀찮아진다고!

카르티마저 조금 전의 으르렁거리던 태도를 버리고 귀를 팔랑거리고 있고!

“그 밀수품이라는 게 뭔데?”

“미안, 그건 말할 수 없어. 우리 두목이 단단히 못 박아놓았거든. 실수로라도 발설하지 말라고.”

“이미 충분히 발설한 거 아니냐…?”

힘없이 울리는 내 딴지는 아무도 받아주지 않는 가운데 이런저런 잡담으로 화제가 옮겨갔고, 시간이 빈틈없이 흘러가고 있었다. 그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어떤 불길한 예감이 자꾸 목 뒤에서 근질거렸다.

“…그런데 너무 오래 걸리는데? 몸값 협상치곤….”

“그러게…. 보통 짐을 슬쩍 뒤지는 정도의 시간만 끄는데 말야. 무슨 일이 있나? 잠깐 보고 올게. 먹을 거라도 좀 넣어달라고 할까?”

그러고보니 배고프다.

든든하게 배를 채울 만한 게 있으면 넣어달라고 부탁하자 키에리가 뒤로 묶은 머리카락을 흔들면서 막사를 나섰다.

“많이 변한 건지 하나도 안 변한 건지 헷갈린다니까.”

“…로제!”

부르는 소리에 응? 하고 돌아보자 원래의 도끼눈으로 돌아간 카르티가 내 어깨를 양손으로 텁 붙잡았다. 도끼눈으로 돌아간 눈이 한 바퀴 더 돌아갈 것 같은 표정으로 어깨를 꽈아악 붙든 게 슬슬 아파지려고 하는데.

“대체 방금 그 여자랑… 아니, 아니아니. 그 여자는 아무튼 멀리하는 게 좋아. 뭐라고 해야 하나, 흑심으로 가득해보이는 그런 여자였다고!”

“도적이니까 흑심이 가득한 건 맞지 않아?”

어깨를 꽈악 쥔 채로 흔들지는 말아줘.

머리가 울리려고 하니까. 카르티의 우악스러운 힘에 어깨가 흔들려대고 그 흔들림이 머리에까지 옮겨가 엇박자가 움직여댔다. 목뼈랑 뱃속이 슬슬 저릿저릿해오기 시작했습니다만.

“아무트으은! 나야, 아니면 저 여…”

“너무 갔어요, 카르티 씨.”

이럴 때 웬즈데이가 냉정하게 굴어준다는 건 다행한 일이다.

가늘게 뜬 채 마치 체셔 고양이처럼 짓궂은 웃음을 짓고 있는 건 조금 마음에 걸리지만.

“주인님은 이 세계에 처음 오셨을 때부터 저 웬즈데이의 것이…”

“아니니까, 더 상황을 복잡하게 꼬지 말아 줄래?!”

즈왈트가 한숨을 쉬었다. 죄 많은 여자로군, 이라고 해 봐야 다들 왜 이렇게 날 놀리는 데 혈안이 된 거람?!

조금 초조한 마음을 겨우 가라앉히고 래핑 크로우 유적단원이 식사로 내어준 양고기 저민 햄을 하나씩 하나씩 먹어가던 와중, 바깥이 소란스러워졌다. 자리를 비웠다가 한참 만에 돌아온 키에리가, 숨을 학학 내쉬면서 얼굴에 웃음기가 사라진 상태였다.

무지 귀찮아질 것 같은 예감.

“…왜 그래?”

“그 크라수스라는 행상인… 여기 오지 않았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고개를 가로젓자 쯧, 하고 키에리의 땀에 젖은 얼굴에서 짜증이 울컥 솟아올랐다.

"그 자식, 사라졌어. 아무래도 잠시 자리를 뜬 사이에 도망쳤나본데.”

아아, 그럼 그렇지.

가끔은 이 날카로운 예감이 좀 빗나갔으면 좋겠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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