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5화 〉 2 2 / 기억을 잃어버린 갑옷 즈왈트에게(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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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1년간 머무른 자기 방을 내일이면 비운다는 사실은 조금… 아니 꽤 쓸쓸함을 느끼게 했다.
자신의 물건들도 있고, 키르케나 헤카이트 당주의 물건도 여기저기 놓여있다.
“휴우…. 아, 기분 참 더럽네.”
대답하는 소리 없는 내 목소리가 방 여기저기를 떠돌다가 가라앉았다.
키르케도 오늘은 다른 곳에 볼일이 있는 모양. 덕분에 저택에는 아무도 없어서 오늘따라 2층짜리 헤카이트 당주의 저택이 왜 이렇게 크고 넓게 느껴지는지 모르겠다… 사실 안쪽의 공간을 비틀어놔서 단순한 2층 저택이 아니라 실제로는 탑이나 다름없긴 하다지만.
상관없잖아. 난 2층 이상으로 올라가는 통로도 못 찾았는데.
“…생각해보면 아는 것도 하나도 없고.”
1년 동안 이 저택의 구조조차 전부 알지 못했다.
키르케와도 이래저래 일방적으로 경쟁심이 쌓였고 헤카이트 당주에게는 부채의식도 있다.
하지만 알브레히트로 떠난 다음 여기로 돌아오기까지 과연 얼마나 걸릴까.
살짝 착잡한 기분으로 천천히 실험대를 쓸어보니 키메라 토벌로 며칠쯤 자리를 비운 탓에 조금 먼지가 쌓였다. 키르케가 대신 청소를 해 놓았을 리도 만무하고.
뭐, 그냥 두는 것도 꽤 꿀꿀하고. 떠나기 전에 청소라도 해 놓기로 할까. 소매를 딱 걷어붙이고 빗자루와 물걸레를 내왔다. 스스로 움직이면서 먼지를 쓸어내는 빗자루… 같은 로망은 어차피 내 수준으론 일일이 조작을 해 줘야 해서 노동량은 거기서 거기다.
적어도 이 저택에서 빚은 어느 정도는 갚고 떠나야 할 테니까… 음, 그러고 보니 굳이 나 혼자 끙끙댈 필요는 없잖아?
“부르셨어요? 장미 씨.”
[불렀는가.]
일단 적어도 노동력이 둘은 있잖아.
웬즈데이와 즈왈트를 올려다보고는 음, 하고 의욕을 한껏 불어넣었다.
“좋아. 둘 다 아무 것도 묻지 말고 이거 입어.”
웬즈데이에게는 메이드복을. 즈왈트에게는… 그냥 특대 앞치마를.
즈왈트는 덤덤히 받아들이면서 앞치마를 찼지만 웬즈데이는 눈을 가늘게 뜨고 이쪽을 보면서 게슴츠레하게 좁힌 눈망울에 의혹을 가득 품었다. …리얼하게 만들었네. 내가 봐도.
“이번엔 또 무슨 플레이인가요?”
“…….”
이 녀석, 좀 주인을 공경할 수는 없나?
최근 들어 좀 드세진 것 같은 기분이 든단 말야. 즈왈트는 갑옷 주제에 한숨을 쉬었다.
…생각해보니 즈왈트가 처음 소환되었을 때가… 으악! 잊고 싶었던 기억이 떠올랐잖아!
“오늘은 그냥 청소라고!”
“정말일까요….”
나중에 두고 봐.
조금 속이 끓었지만, 지금은 잠시 분개를 가라앉히고 일단 메이드복으로 갈아입기로 했다… 뭐, 이런 일은 일단 기분이 중요하니까.
블랙과 화이트, 투톤으로 이루어진 자못 금욕적인 디자인의 메이드복. 헤카이트 당주가 부리는 오토마타들이 입는 것인데… 치수라든지는 얼추 조절할 수 있다. 스킬은 이럴 때 쓰라고 있는 것이기도 하고.
입은 제 모습을 거울에 비춰보자 조금 성질이 더러워보이는 메이드가 비춰졌다… 아무리 커스터마이징을 해도 어쩐지 인상만은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아무튼 복장까지 갖춰 입고 나니 이제야 뭔가 제대로 된 것 같은 기분이 드는걸.
“좋아, 시작하자! 웬즈데이는 빗자루질. 즈왈트는 무거운 것을 옮겨줘.”
[이의는 없다. 하지만…]
즈왈트가 손을 들고 발언을 요구했다.
그답지 않게 드물게도 곤혹스러운 눈치였다.
[나는 육신 대신 전투용 갑옷을 쓰고 있다. 이런 갑옷으로는 주인의 명령을 제대로 수행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만.]
“듣고 보니….”
전신갑주를 차려입고 집 안 청소를 한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도 없다.
여기저기 돌아다니다가 오히려 집기를 부수거나 하지 않으면 다행이겠지. 게다가 야외라면 모를까 쇳소리를 철그럭거리며 돌아다니면 오히려 정신 사나울 게 틀림없기도 하고.
“뭐 좋아. 그러잖아도 한 번쯤 시험해보고 싶었어. 웬즈데이, 여길 좀 치워 줘. 깨끗하게. 즈왈트는 여기 적힌 걸 창고에 가서 가져오고.”
“네.”
[알겠다.]
지난번 키메라 토벌에서 이런저런 영감을 얻은 게 있었다구.
사람과 거의 하나도 다른 바 없는 헤카이트 당주의 오토마타만은 못하더라도…
웬즈데이가 방 한가운데를 깨끗하게 비우자 바닥에 분필로 원을 크게 그리고 주문식을 바깥쪽에서 안쪽으로 써넣어갔다. …어디 보자. 여기는 뭐였더라. 일단 연구일지를 뒤적여가면서 신중하게.
“좋아. 다 됐어.”
“이건 처음 보는 주문식이네요….”
“나도 실제로 쓰긴 처음이니까.”
몇 분쯤 지난 뒤, 몇 개의 원을 겹친 진의 안쪽에 빼곡하게 주문식과 도형을 연결한 간이회로가 만들어졌다. 이거 꼭 공순이 된 것 같네. 여긴 이세계니까… 마순이?
때맞춰 즈왈트도 양어깨에 몇 포대의 자루를 메고 돌아왔다. 일단 밑준비는 마쳤다.
“그걸 풀어서 전부 다 이 위에 쏟아.”
[…주인이 하는 일이니 불안함부터 드는 건 내가 예민한 건가?]
“아뇨, 정상이라고 생각해요.”
…내 사역마들은 왜 하나같이 주인 알기를 무슨 철부지 딸내미처럼 생각하는 거지?
즈왈트는 투덜거리긴 했지만 일단 내가 시킨 대로 자루의 내용물을 쏟아부었다. 진흙과 철가루, 뼛가루, 바싹 말린 씨앗 등등. 간이 주문 회로를 전부 덮어버릴만큼의 양이 쏟아부어지자, 웬즈데이가 내 등 뒤에서 기웃거렸다.
“골렘의 제조에는 핵이 필요한데. 핵은 어떻게 하실 생각이세요?”
“핵이라면 여기에 근사한 게 있어.”
텅, 하고 즈왈트의 갑옷을 두들겼다. 씩 웃고는 즈왈트의 갑옷 표면에 말라붙은 핏자국을 보았다. 전신에 피를 뒤집어썼으니 이 정도면 핵으로서도 충분히 기능할 것이다.
[…내가 뒤집어쓴 용의 피를 촉매로 쓸 생각인가?]
“뭐, 미성숙하다고 해도 결국 용은 용이니까. 이론상으로는 아무 문제도 없을 거야.”
[이론상… 이라는 건 해보지 않고는 모른다는 얘기군.]
“…늬들은 좀 주인을 믿어주는 마음이라는 게 아예 없어요?”
어째 말할 때마다 득득 긁어대는 사역마들이라니. 아무튼 즈왈트를 간이 주문 회로와 질료가 쌓인 위에 서도록 명령한 뒤 웬즈데이에게 의식을 집중했다. 정확하게는 웬즈데이의 일부가 되어있는 가브롤의 지팡이 쪽에.
“그럼 시작한다.”
천천히 마나맥을 예열하고 끌어올린 마력을 웬즈데이를 경유하여 바닥의 간이회로에 흘려보냈다. 차오른 마나가 회로를 지나면서 주문을 자아내기 시작했고, 그 위를 덮다시피한 질료에 마력이 투사되었다.
“주문 공정… 진행율. 8…%.”
가브롤의 지팡이에서부터의 메시지겠지.
웬즈데이의 기계 같은, 높낮이 없는 억양이 조금 낯설었다.
“재료 합성 개시.”
아직까지는 딱 예상한 대로 잘 되어가고 있다.
다만 내 마나맥에서 잡아먹는 마나의 양이 생각보다… 내가 예상한 것보다 더 많았다는 게 문제지만.
아무렇게나 쏟아부었던 재료들이 유령의 장난처럼 떠올랐다.
즈왈트의 갑옷에 녹처럼 달라붙었던 핏덩어리가 표면에서부터 녹듯이 떼어져나와 서로 뭉쳐드는 재료 사이에 섞여들었고, 즈왈트의 몸 대신 쓰이던 갑옷이 바닥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졌다. 즈왈트의 혼백도, 아마 저 사이에 함께 섞여든 모양이다.
저거다. 저것 때문에 예상한 것보다 더 마력이 소모되고 있었다.
그렇다고 지금 중단하면 즈왈트가 위험했고.
“공정 진행율…. 43%.”
핏덩어리가 심장 모양으로 뭉쳐지고, 말라붙었던 씨앗에서 돋아난 줄기가 일종의… 신경을 형성했다. 그 위를 진흙덩어리가 단단한 살점이 되어 들러붙었다. 길게 돋아난 머리카락이 얼기설기 형태를 갖춘 얼굴 위를 덮었다.
“내부 구조 구축 중.”
“조금 서두를 수 없어…?! 슬슬, 마력이 한계….”
볼멘소리를 해 봐야 어차피 웬즈데이는 해야 할 일을 할 뿐이라는 건 알고 있지만 그래도 볼멘소리를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손발이 부들부들 떨리고 숨이 턱에 닿았다. 뺨에서 도드라진 땀이 주륵, 턱을 타고 흘러내렸다.
외장은 완성. 거뭇거뭇한 구릿빛 피부를 가진 위남자가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러고보면 즈왈트는 ‘검정’이라는 뜻이랬던가.
한참을 올려다보아야 얼굴을 볼 수 있는 거한은, 바닥에 흩어진 검은 갑옷에 딱 맞는 몸집을 갖고 있었다.
육중하면서도 둔중함은 털끝만큼도 느껴지지 않는 근육이 탄탄한 몸을 이루었다.
“…골렘 카드몬(Golem Kadmon) 공정 완료.”
“하아…. 어찌어찌 성공. 즈왈트, 기분은 어때?”
어떻게든 됐다.
…난 사서 고생하는 팔자인 모양이다. 청소 좀 돕게 하자고 오히려 청소거리를 늘려놓은데다. 으… 이 뒤는, 말 안 할래.
어두운 톤의 구릿빛 피부를 가진 즈왈트가 호쾌하게 목을 꺾고,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면서 몸의 감각을 시험하듯 이리저리 움직여보고 있었다.
“더할 나위 없다. 감사한다, 주인이여.”
낯선 얼굴에 곧 만족스러운 기색이 엿보였다. 아마 저 얼굴이 그의 생전의 모습이려나. 파편화된 기억을 엿보았을 때 저런 용모였던 것 같기도 했다. 휴우우.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부들거리는 몸을 일으켜 그의 넓은 어깨를 툭, 두들겼다. 이 상황에서 그에게 첫 명령을 내리고자 한다면, 그건….
“먼저 옷부터 좀 입어줘.”
“…알았다.”
"앞치마 말고 갑옷을 입으라고 일단! 그리고 멀쩡한 옷으로 갈아입어!"
이 녀석하곤 왜 매번 이렇게 되지?
주섬주섬 바닥에 흩어진 갑옷을 민망하다는 듯이 챙겨입는 즈왈트를 조금 식은 눈으로 보면서 한숨지었다.
자, 청소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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