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4화 〉 2 2 / 기억을 잃어버린 갑옷 즈왈트에게(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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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ㅣㄴ 것까지는 분명히 기억이 나는데.
아, 머리야… 지끈거리는 머리를 짚은 채로, 바닥이 푹신한 침대라서 조금 당황했다.
여긴 대체 어디야. 얼마나 마셨길래 속이 뒤집힐 것 같고. 후우, 숨을 내쉬면서 조금 머리를 떨구고 그 머리를 잠시 긁적이다가 바들거리는 눈꺼풀을 열었다.
“…어?”
지금 자신이 몸에 걸치고 있는 거라곤,
흑마법 협회 소속이라는 상징인 로켓과 목에 둘러진 마녀의 문신 뿐이었다.
“뭐, 뭐, 뭐…”
뭐야, 대체?!
심장이 튀어나올 듯이 놀라서 이불을 가슴께까지 확 끌어당겼다. 대, 대체 지난 밤에 뭔 일이 있었는데?! 머릿속으로 의식을 집중해봐도, 즈왈트는 이미 내 몸에서 나간 상태라 물어볼 수도 없다! 아아, 침착하자 침착. 일단 여기가 어딘지부터…
“으응….”
…에?
부자연스럽게 뻣뻣한 동작으로 옆으로 얼굴을 돌렸다. …등이 보였다. 나와 마찬가지로 아무것도 입지 않은 등이 이불을 빼앗겨 조그마한 엉덩이를 드러낸 채 웅크려있었다. 옅은 갈색 등에는 커다랗게 날개를 펼친 공작 문신이 화려했지만…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야, 야… 너 누구야. 여긴 어디고, 지난 밤에 무….”
“우으으, 깨우지 마아.”
칭얼거리는 소리를 낼 때가 아니라고! 여기 어디야, 대체 간밤에 뭔 일이 있어서 둘 다 알몸이 되놔서 자빠져 정신줄 놓고 있었던 거냐고!
어깨를 흔들다가, 확 이쪽으로 당기니 옆자리의 사람이 이쪽으로 돌아누웠다.
…여자였다. 뭐 그건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이쪽에 오고 나서 여자랑도 섹스 했었으니 남자든 여자든 그게 중요한 건 아니다. 아니긴 한데, 대체 뭐냐고 이 상황!
“야, 카르티! 적당히 하고 일어나라고!”
한참을 그렇게 흔들어도 이렇다할 반응이 없는 가운데 결국 손을 써야 하나? 하고 고민하던 찰나, 가물거리던 눈이 천천히 뜨였다. 심봉사 눈 뜬 것만큼 반가운 가운데 늘어지게 하품을 한 카르티가 부스스한 머리카락을 긁적이며 몸을 일으켰다.
“…아음. 좋은 아침. 뭐야, 벌써… 후아암. 밥 먹게?”
“태평한 소리 하지 말고 정신 챙겨.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도 설명하고! 서, 서, 설마. 어제 나랑 네가…”
“섹스했냐고? 아니.”
…휴우. 조금 다행이다 싶었다. 카르티가 눈을 부빗거리면서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아무렇게나 벗어놓은 제 옷을 찾아 입었다. …알몸 여자가 팬티 입는 광경은 오랜만에 보지만 별로 보고 싶지 않았다…. 한숨쉬며 내 팬티도 찾아입었다.
“야, 로제. 너 꽤 야한 속옷 입더라.”
“아씁, 머리야… 닥치고. 왜 우리가 알몸으로 자고 있었는지부터 좀 설명해봐.”
“네가 덥다고 벗었잖아. 나도 더워서 따라 벗고.”
…정말인가? 아, 머리가 지끈지끈하고 하나도 기억이 안 나.
몸이 욱신욱신한 거야 당연하지만 마나맥은 의외로 얌전하게 가라앉은 상태였다…. 술이 좀 받았나. 끄응, 하고 허리를 툭툭 두들기면서 따라놓은 물을 한 모금 마셨다. 차가운 물이 조금 정신을 맑게 해 줬다.
“아휴… 간밤에 굉장히 쪽팔리는 꿈을 꾼 것 같은데.”
“그런 것 같더라고. 꽤 성대하게 잠꼬대하더라, 너.”
브래지어까지 착용하고, 리넨 겉옷 위에 가벼운 레더아머까지 갖춰입은 뒤, 카르티가 끙끙 앓는 소리를 내며 허리를 툭툭 두들겼다.
“으그그, 허리야… 야, 넌 괜찮아?”
“나도 근육통 때문에 좀 죽겠어… 먼저 내려가.”
“…그렇겠지.”
뭐가?
눈을 깜빡이니 아무것도 아니라고 얼버무리면서 카르티가 조금 서두르는 발걸음으로 방을 나섰다. 싱거운 녀석 같으니라고. 끙끙거리면서 잠시 침대에 누워서 유난히 쑤시는 허리를 붙들고 잠시 앓는 소리를 내다가 겨우겨우 몸을 일으켰다. 페리링한테 치유받고 싶당, 하고 속편하게 생각하면서.
“여어, 아가씨. 술은 좀 깼냐.”
“좋은 아침이에요. 끙.”
허리를 짚고 끙끙거리며 겨우겨우 내려가 보니 벌써 케르 씨와 카르티가 스프 하나를 시켜서 각자 접시에 담아 먹고 있었다. …아, 레짐에서 시즈닝 아줌마가 끓여준 포타지가 진짜 그립다. 밍밍한 콩 스프를 한 접시 떠서 빵에 찍어먹어봐도 맛 같은 게 느껴질 리가 없었다.
“즈왈트… 술맛은 내 몸으로 다 느껴놓곤 숙취는 나 몰라라 하고 있단 말이지. 어디 두고 봐.”
“그거 좀 핀트가 빗나간 거 아니냐…?”
카르티도 똑같이 빵을 스프에 적셔먹으면서 뜨악한 얼굴을 했다.
내 사역마 어떻게 다루든 내 마음이거든. 케르 씨도 하품을 늘어지게 한 다음 가슴을 북북 긁었다.
“어제 나도 술 잔뜩 푸고 자긴 했지만 너희들은… 참, 술 세더라? 여기 방 들어와서도 한 잔 더 하는 눈치던데.”
“…전혀 기억 없는데요.”
“그야 넌 기억 없겠지.”
빵을 다 먹고 손에 묻은 스프를 쪽쪽 빨아먹으면서 카르티가 스프 아래에 가라앉은 건더기를 포크로 푹 찍어 꺼냈다. 콩 스프인 줄 알았는데, 어제 우리가 먹다 남긴 오리를 집어넣고 끓인 일종의 잡탕이었나보다.
더 남은 거 없나 뒤적이고 있으려니 케르 씨가 내게 뭔가를 내밀었다. 서류에 금박 인장의 봉인. 앗, 설마.
“길드에 볼일이 있어서 다녀오는 길에 아가씨 얘기를 했더니 서류가 준비가 된 모양이더군. 알브레히트 남작령 길드 사무장에게 보여주면 절차를 밟아줄 거야.”
“휴우… 꽤 오래 걸릴 거라고 생각했는데. 케르 씨에게 신세졌네요.”
역시 아는 사람 찬스가 최고다.
이제 준비가 끝나는 대로 알브레히트로 출발할 수 있겠다.
“알브레히트로는 언제 출발할 생각이야, 아가씨?”
“그건 카르티한테 물어보세요. 얼마나 걸릴지는 쟤가 작업을 얼마나 빨리 하느냐에 따라 달렸죠.”
즈왈트의 무기를 만들어주기로 했었고. 실력은 잘 모르겠지만 카르티의 스킬이라면 좋은 무기가 나오지 않겠나, 하고 어제 술자리에서 즈왈트가 그런 말을 했던 기억이 나긴 한다. 뭐, 잘 하겠지.
“…그게 말야, 로제.”
어흠, 하고 어쩐지 헛기침을 하는 카르티의 얼굴이 조금 붉었다.
왜 저래. 감기기운 있나?
“……나도 이번에 알브레히트에 볼일이 생겨서 가려고 하는데. 같이 가서 만들어도 돼?”
“어?”
눈을 깜빡였다. 알브레히트 남작령은… 깡촌이라며? 갑자기 거기에 볼일이 왜 생겼대.
뭐 저쪽은 저쪽대로 내가 모르는 뭔가 사정이 있을 수도 있으니 빵을 크게 한입 물면서 대충 고개를 끄덕거렸다.
“마음대로 해. 나도 일행이 생기면 좋지.”
“아, 응. 그럼 난 당장이라도 갈 수 있어.”
“…저기요, 케르 씨. 뭐 좋은 일 있으세요? 왜 그렇게 히죽히죽.”
어쩐지 수상쩍게 히죽대고 있는 케르 씨의 표정이 걸려서 한 마디 쿡 찌르니 입가를 비릿하게 말아올리면서 어깨를 으쓱인다. 뭐냐고요 대체. 가족 사이에 뭔가 있어요?
“그럼 기왕 출발하는 거 빨리 가는 게 좋겠네요. 어, 그나저나 소재는 어떻게 하지. 그거 해체하려면 좀 기다려서 가야 하는 거 아니에요?”
“아, 그거라면 내가 알브레히트로 보내주면 될 일이지. 동항로 회사 편으로 보내면 아가씨보다 먼저 도착할지도 몰라.”
“그래주시면 참 감사한데, 갑자기 왜 그렇게 과잉 친절을 베푸신대요.”
시를 읊듯이 가슴을 쫙 펴고 의문모를 손동작을 취하면서 케르 씨의 목소리가 그윽하게… 어디까지나 본인 입장에서 그윽하게 우러러졌다.
“여행은 길동무. 세상은 인연. 인연이 이어지면 노래와 술. 인생이란 그런 게 아니겠어?”
“전혀 뜻모를 소리를… 뭐 아무튼 해주신다니 감사히 호의를 받을게요. 그럼 전 슬슬 돌아가서 준비할 테니까 내일 이 시간에 마차역에서 만나죠.”
…뭔가 수상하니, 나중에 뒷말 얹기 전에 이 자리를 뜨는 게 상책일 것 같다.
갑자기 일이 술술 풀리니 오히려 찜찜하게 느껴지는 건 내가 너무 인생에 찌들어 피해망상에 빠진 덕인가? 사람의 호의라는 것을 좀 솔직하게 믿어도 좋으려나, 슬슬.
“뭐, 그런 사람 없겠지만.”
아무튼 일이 술술 풀리는 건 당장은 나쁠 일이 없다.
호사다마(????)라고 했지만 눈앞에 닥친 일도 아니고, 가끔은 쉬운 길로도 가야 인생에서 큰 숨 한번 시원하게 내쉬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어쩐지 슬금슬금 괜찮은 기분에 콧노래를 보태면서 헤카이트 당주의 숲 속 저택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
“…뭐, 그건 그렇다치고.”
“응? 뭔데, 영감.”
“어제 일 말야. 아가씨한테 얘기하지 않아도 되는 거야?”
“……얼른 죽어. 아니면 그냥 얌전히 은거하쇼, 영감.”
“라이벌이 만만치 않아 뵈는 눈치던데? 뭐, 나도 저 아가씨가 거물이 될 거란 예감은 들지만 말야, 침 발라놓고 아닌 체해봐야 아무 소용 없는 거 아니냐.”
“……아씨, 그래서 그런 거… 아니라고! 그냥 좀 뒈져, 아니면 좀 닥쳐주세요 제발.영감!”
“뭐야. 그럼 어젯밤에 그건 대체 뭔데?”
“…씁. 걔가 밤새 끙끙거려서 잠을 잘 수가 있어야지. 그래서 그런 거야, 그래서. 딱히 그것 말곤 아무 것도 아니라고.”
“…….”
“왜, 왜, 왜요. 뭔 말이 하고싶어서 그런 얼굴인데.”
“빨개졌는데.”
“그냥 죽어! 죽어서 제발 여신에게로 좀 돌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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