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3화 〉 2 2 / 기억을 잃어버린 갑옷 즈왈트에게(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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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키메라 토벌의 뒤처리에는 며칠의 시간이 필요했다.
독수리를 모험가 길드에 보내 연락하고, 길드의 사무관이 꼼꼼히 살핀 끝에 의뢰 완수의 증서에 도장을 찍어주었다. 자신의 이름이 가장 위에 찍힌 증서를 받고 나니 기분이 참, 묘했다. 입꼬리가 자꾸만 바들거리는 게.
아무튼, 죽은 키메라의 운송은 길드에서 전담하기로 했고 왕도로 돌아온 날 보수 정산에 뒤풀이를 겸해서 케라우노스, 카르티와 왕도의 술집에서 만났다. 물론 즈왈트도 동석했다… 내 몸에. 맛 들이면 안 되는데.
[갑옷인 채로는 술맛을 전혀 즐길 수 없잖나.]
타당한 지적이다.
일단 내 몸에 들어앉은 채로는 감각을 공유하는 것 같으니 내가 마시는 술맛 정도는 느낄 수 있는 모양이다. 편리하다고 해야 할지, 불편하다고 해야 할지.
“여기 맥주 주세요.”
“그리고 와인도. 이 가게에서 제일 좋은 놈으로. 값은 여기 아가씨한테 달아놓고.”
이봐요.
하는 수 없지. 며칠 전 보았던 케라우노스의 마법은 정말 눈이 돌아갈 것 같았으니 구경 값으로 비싼 와인을 사는 정도는 감수해야겠고.
그때 키메라가 하필이면 카르티를 삼켜버리지만 않았다면, 케르 씨 혼자서도 놈을 충분히 상대, 아니 구워버릴 수도 있었을 것이다. 거의 확신이었다.
맥주와 비싼 와인을 시키니 안주도 딸려나왔다.
오리의 뱃속에 노간주 열매를 채워서 노릇하게 구운 안주가 나오자 오오, 하고 카르티가 반색했다. …이 안주, 나중에 돈 내라고 하진 않겠지?
“…휴우우. 정말. 그 때를 생각하면 로제에게 아무리 고맙다는 말을 해도 부족해.”
맥주를 채운 나무잔을 기세 좋게 한 모금 삼킨 뒤 휴우, 하고 카르티가 만족스럽게 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고마우면 술값 좀 나눠 내면 되는데 말야. 야, 눈 돌리지 마. 못들은 척 하지 말라고.
“걸리버 여행기의 끝이 ‘그리고 토착 생물에게 잡아먹혔습니다.’로 끝나면 너무 허무하잖아. 안 그래?”
“그렇지, 그렇지. 카르티, 널 주운 본전도 아직 못 찾았으니까 벌써 골로 가버리면 곤란해. 무사히 임무를 완수한 것에 대해서 먼저 건배.”
탕, 하고 나무잔 세 개가 부딪혔다. 점원이 말하길 맥주에도 노간주 열매를 넣었다던가. 첫 맛은 달고 끝맛은 씁쓰레한 맥주였다. 생각보다 여기 술도 꽤, 먹을만하다.
“그래서 결국 그 키메라에 대해서는 뭔가 알아낸 게 있대요?”
“글쎄. 마법사 협회에서 나름 해부를 하고 있긴 하다지만 역시 미성숙한 드래곤의 시체로 만들어냈다는 정도만 겨우 밝혀낸 모양이더라고.”
케르 씨가 곤혹스럽다는 듯 나무잔을 가장 먼저 비우곤 호기롭게 오리고기를 뜯었다. 기름 냄새가 좔좔 흘러서 으, 사람 미치게 하네.
얼른 날개 하나를 붙잡아 몸통에서 뜯어내어 입에 물었다… 며칠 동안 말린 고기나 과일 같은 보존식만 먹어와서, 육즙이 오동통한 살점에 배인 고기 맛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그리고 맥주 한 모금. 아, 치맥 땡긴다.
휴우우… 살짝 맥주의 도수가 셌는지 몇 모금 마시지 않았는데 기분 좋게 취기가 올라왔다.
“1,200탈랭 주고 산 무기가 잿더미가 되어버렸지만… 목숨값치곤 싸게 먹혔죠. 끙, 그런데 그 괴물, 쓸만한 소재가 나오긴 할까요?”
그러고보면 즈왈트에게 무기를 만들 재료가 필요해서 토벌 의뢰를 받아들인 거였지. 하지만 키르케가 물어온 것과는 너무 달라서 제대로 소재가 나왔을지 어땠을지 모르겠다. 게다가 그 소재, 계약상으로는 자신이 쓸 것만 빼면 전부 케라우노스에게 주기로 했는데.
“뭐얼. 구석구석 뜯어보면 쓸 수 있는 구석이라면 얼마든지 있을 거라고 아가씨. 드래곤이라는 게… 어디 하나 쓸모가 없는 구석이 없거든.”
“그 모양이어도요?”
“…뭐, 확답은 못 하겠구만.”
그렇게 심각하게 뒤틀리고 기형처럼 되어버린 드래곤의 소재 같은 걸 써도 괜찮을지 모르겠다. 분명 저주받을 것 같은데. 하지만 일단 호언장담하는 케르 씨의 낯을 봐서 이 화제는 대충 뭉개고 넘어가는 게 낫겠다.
“그러고 보니 영감한테 얘기는 듣긴 했는데. 자세히 들려줘봐. 내가 뭔가 맡을 수 있을지도 모르지.”
그러고보니 카르티는 스킬이 스킬이니만큼 그 쪽에 나름의 조예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왜 이제까지 못 했지. 아, 안되겠다. 술기운이 좀 돌아서 머리가 어질어질해. 게다가 어떤 무기를 원하는지는 구체적으로 본인에게 묻는 게 나을 것이라, 잠깐 뒷전으로 빠졌다.
“창대와 날이 모두 튼튼한 소재였으면 좋겠고. 단순히 찌르기만 하면 좋은 창이 아니라 베고, 막고, 찌르고, 치고. 그 모든 것이 가능한 전투용 창을 원하고 있다.”
“…어, 지금 말하는 건 즈왈트 형씨야?”
즈왈트(가 앞에 나선 내 머리)가 끄덕였고, 헤에, 하고 신기하다는 듯이 내 얼굴을 들여다보다가, 카르티가 한쪽 입가를 씩 말아올렸다.
“즈왈트 형씨가 만족할만한 물건을 만드려면 꽤 공을 들여야 하는데. 시간도 돈도 재료도 잔뜩 필요하다고.”
“그건 주인과 상론하는 게 좋겠다.”
…금새 제 할 말만 하고 뒤로 슥 물러나는 즈왈트에게 떠밀려 다시 앞으로 밀려나오는 느낌이 조금, 어질어질하다. 나무잔의 바닥에 조금 남은 맥주를 목에 털어넣고는 휴우우… 한번 더 한숨을 내쉬었다.
“시간이 얼마나 필요한데? 난 조만간 왕도를 뜰 거라구.”
“그러고보니 모험가 길드에 추천서를 부탁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너무 서두를 건 없지 않나?”
케르 씨가 두 잔째인 맥주를… 어느샌가 시켜서는 꼴깍 삼키면서 말을 보탰다.
베테랑 용병이다보면 당연히 길드와도 친근할 것이고 이런저런 이야기도 많이 듣겠지. 하지만 벌써 이렇게 자질구레한 것까지 알게 되다니, 그 접수계 아가씨도 꽤 입이 싸잖아.
“그야 당연하지. 내 딸이니까.”
“또 수양딸인가요?”
딸꾹. 왜 이렇게 술기운이 빠르게 돌지. 케르 씨가 음, 하고 끄덕이는 게 보인다.
뇌를 거치지 않고 말했지만 의외로 적중이었던 모양. 친딸이나 친아들은 없는 건가. 뭐, 별로 궁금하지는 않다.
“뭐야. 어디로 가는데?”
“알브레히트 영지의 길드에 전하는 추천장을 써 달라고 했다지.”
아무렇지도 않게 내 개인적인 부탁을 거리낌 없이 떠벌려도 되는 거야? 뭐라고 해야 하나… 보안 같은 거, 중요하게 여겨야 하는 직업 아니었냔 말이에요.
“알브레히트 영지라니, 거기 남작령이었지? 변경의.”
“깡촌이지. 마법사로서 흥미가 갈 만한 곳은 아닌데, 왜 거기에 추천장을 써 달라고 했나, 아가씨?”
평소의 나라면 말하지 않고 그냥 적당히 화제를 돌렸겠지만, 어쩐지 입이 술술 말을 풀어내고 있었다. 이게 다 술 때문이야. 턱을 탁자에 기댄 채 새로 채워진 맥주잔을 쥐면서 눈을 느릿하게 껌뻑였다.
“찾아가기로 약속한 상대가 있어서요.”
“…오호.”
“헤에.”
두 사람의 반응이 꽤나 야리꾸리하다. 게다가 뒷전으로 물러난 즈왈트까지 흥미를 보이고 있다… 왜, 왜, 왜.
“아니, 왜들 갑자기 그러는데요.”
“남자야?”
카르티가 자못 흥미진진해하면서 얼굴을 바싹 들이밀었다. …여자인지 남자인지 헷갈리는 얼굴의 카르티는, 의외로 이런 분위기의 이야기를 좋아한 모양이다.
뭐… 분명 멀쩡한 거 달린 녀석이긴 하지.
“남자에요. 그게 뭐 어쨌다고. 그냥 한번 찾아가서 얼굴 보기로 약속한 것뿐인데.”
“청춘이구만, 청춘이야. 아저씨도 젊었을 때는 꽤 날렸는데 말야.”
흡족한 얼굴로 팔짱을 낀 채 고개를 끄덕끄덕거리는 케르 씨.
순간 그 얼굴을 무진장… 마력탄으로 날려버리고 싶었다. 뭔가 절찬리에 오해하고 계신 모양인데 말야.
“아니, 아니. 뭔 생각을 하는 거예요. 그런 거 아니라고요.”
“아닐 리가 없지.”
야, 카르티. 포크로 삿대질하지 마.
카르티는 눈에 흥미를 가득 담은 채 히죽히죽 웃으면서 마치 돈이 될 만한 건수를 발견한 사립 탐정처럼 비릿한 웃음을 물었다.
“지금 네 얼굴이 얼마나 헤실거리고 있는지 보면 그런 말 못 할걸.”
“날조하지 마.”
가볍게 통, 하고 카르티의 머리에 당수를 넣으며 반격했다. 내 표정이 뭐 어쨌다고. 루시탄 얘기를 하면서 헤실거린다니. 마치 내가 그 녀석이랑 다시 만나는 걸 기대하고 있는 것처럼 말하다니 무엄하네.
어차피 루시탄은 왕자고, 좋은 혼처를 찾아 결혼할 게 뻔하다. 나는 뭐 전직 창녀고 지금은 흑마법사. 어차피 마이 웨이를 고수하는 인생이거든. 저쪽에서였든, 이쪽에서든.
“나는 남녀 사이에 우정이라는 게 성립할 수 없다고 강력하게 믿는 사람이니까!”
“아, 그러셔.”
남자인지 여자인지 애매모호한 녀석이 그렇게 말하니 신빙성이 있는 건지 없는 것인지도 헷갈리네. 맥주잔을 반쯤 비워갈 때쯤, 얼음에 파묻히다시피 한 와인병 하나가 카트에 실려서 오고 있었다.
가장 먼저 케르 씨가 반색했고, 카르티도 눈을 빛냈다.
내게서 뭔가 달콤한 이야기를 캐내려고 했을 때보다도 더.
“오옷. 저건… 느탈리 4년산이잖아.”
“뭐에요, 그거. 유명한 와인이에요?”
“꽤 귀하신 몸이지. 선별된 마나 포도를 마법을 써서 빚어야 만들 수 있는 레베라이히 특산 와인이거든.”
슬슬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내 저금으로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인 건 아니겠지?
에라 모르겠다. 먹고 죽자구. 어떻게든 되겠지.
쪼르륵… 와인이 채워지는 유리잔 안, 보랏빛 섞인 강한 붉은색에서 뽀그르르 거품이 일었다. …저쪽에서도 이런 와인, 구경도 해 본 적 없는데. 술에 꽤 취한 와중에서도 그윽하게 코를 간질이는 포도 냄새가 달콤하게 스며드는 게 느껴질 정도다.
“독합니다.”
척 봐도 내가 초심자라는 걸 알았는지 종업원이 경고처럼 한 마디 던졌다. 그래봐야 와인인데 독해봐야 얼마나 독하겠어. 와인은 순한 술이라고 얼핏 들었다구.
“그럼 어디 한 잔 맛볼까요.”
“비싼 몸이니까 천천히 맛과 향을 음미하면서 맛보라고, 아가씨.”
네, 하고 입에 한 모금 살짝 머금었다. 우왓.
코에 훅하고 스며오는 강렬한 포도향. 그리고 입가에 슬쩍 스며드는 산미에 미세하게 술에 취해 흐리멍텅해진 미각을 불러 깨우는 은은한 쓴맛. 생각보다… 꽤 괜찮은데. 이거라면 기분 좋게 마실 수 있겠다고 생각하면서 꼴깍, 첫 모금을 그렇게 삼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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