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2화 〉 2 2 / 기억을 잃어버린 갑옷 즈왈트에게(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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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막상 앞에 서니 좀 쫄리네.
지팡이를 쥔 손에 힘 딱 주고, 후우 하고 깊게 심호흡을 했다. 폐에 새 공기가 빵빵하게 들어찰 정도로 심호흡을 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발에 해골이 차이는 감촉은 일부러… 무시한 채 수풀에서 모습을 드러내며 키메라가 웅크리고 있는 동굴 앞에 섰다.
잘 될까.
한 끗만 빗나가도 실패해서 자신도 이 해골 중 하나로 합류할지 모르는 위태로운 작전이다. 케라우노스조차 될 일이 아니라고 선을 딱 긋지 않았던가. 단순히 다른 수가 없어서 동의했을 뿐.
“…진정하자, 진정하자.”
이럴 줄 알았으면 하다못해 웬즈데이를 데려올걸 그랬다고 생각하면서 입술을 깨물었다. 돌아가면 웬즈데이를 철저하게 어느 악천후에서도 움직일 수 있는 골렘으로 만들자고 다짐했다.
동굴 앞에 모습을 드러낸 채 작전을 몇 번이고 머릿속에서 다듬고, 다듬었다.
침착하자. 그리고 동시에 과감하자.
네가 잘못하면 카르티가 죽어. 괜찮아, 지금보다 더 좆같은 상황도 어떻게든 해 왔으니까.
사실 네가 잘해도 케라우노스가 제 역할을 하면 죽는 건 마찬가지일 거다. 그렇게 생각하니 도리어 피식, 웃음이 났다.
빠직, 해골을 짓밟는 거대한 발소리가 났다.
좋아. 놈이 나타났다.
“…잘 되려나.”
여전히 징그럽게도 생겨먹은 꼴이다. 등까지 완전히 덮어버린 위턱과 머리, 그리고 배와 함덩어리가 되어 눌어붙은 아래턱. 앞다리와 뒷다리 사이에 늘어져 흐느적거리는 미성숙한 다리들.
따개비처럼 머리의 여기저기 들러붙은 녹아내린 안면과 안구들… 이렇게 보니, 살가죽에 붙어서 들썩이는 게 마치 이 해골들의 원주인인 얼굴 거죽이 이어져 덮은 것처럼 보여 새삼 욕지기가 뱃속에서 부글부글 치솟았다.
놈의 발과 꼬리가 힘없이 땅에 끌리고 있었다.
…원인을 짐작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뱃속에서 도통 즈왈트와 카르티가 소화되질 않고 있을테니 소화불량이라도 일으킨 것이겠지. 보통 그렇게 되면 게워내겠지만 아무래도 저 녀석은… 신체 구조상 삼킨 먹이를 토해내는 것도 비대해진 머리 탓에 불가능한 모양이었다.
“…좋아.”
후우, 숨을 내쉬고 천천히 마력을 끌어올리자 발 아래에 말갛게 빛나는 마법진이 떠올랐다. 마력이 새어나와 휘몰아치자 주변의 작은 돌이나 풀이 휩쓸렸다.
강령 개시.
제 몸에 죽은 영혼을 받아들이는 마법, 강령은 결코 가볍지 않은 위험을 수반하기 마련이다. 불려온 영혼이 우호적일 것이란 보장도 없다, 또 자신이 원하는 영혼이 아닐 수도 있었으며, 잠시 자신을 돕게 만드는 것까지 하나하나가 손이 가는 작업이지만…
이 경우에는, 이미 강령시킨 영혼을 그저 내 몸으로 옮겨오는 것 뿐이다.
이미 계약이 이어졌으니, 그 길을 따라 당기기만 하면 된다.
즈왈트의 영체를 갑옷에서 빼내어 내 몸에 덧씌웠다.
지금으로선 이게 최선이다. 이 녀석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는 모르나… 적어도 이 싸움에서는 나보다는 낫겠지. 아주 잘게 쪼개져서 부서진 기억의 파편들이 희미하게 머릿속에 거스러미처럼 일었다. 이래서야 기억을 잃었다고 말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
영체가 빠져나간 갑옷이라도, 부식 방지 주문이 작동하는 한은 당장 카르티가 소화되거나 하진 않을 것이다. …정확하게는 그러길 바랬다.
“성공. 그럼 잘 좀 부탁해, 즈왈트.”
물론 강령은 쉽게 성공했다.
그럼 이제 다음 스탭. 쿵, 쿵, 쿵… 비대하게 부풀어오른 앞발로 뒷발을 끌 듯이 접근하는 녀석을 피해 한 바퀴 크게 원을 그려 달리면서 왼쪽 눈을 가린 안대를 벗어내었다. 9일만에 바깥 풍경을 보는 그쪽 눈에서 두근두근, 하는 맥동이 느껴졌다. 벌써부터 머릿속에 지끈거림이 일었다.
특전 스킬, 「노신왕의 각인안(Odin’s Sphere)」을 발동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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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전 스킬의 진짜 능력, 그건 9일마다 한 번씩 내가 본 적이 있는 걸리버의 스킬을 한 번 사용할 수 있는 것이다. 굳이 말하자면 일회성 벤치마킹이라고 해야 하려나.
지금 사용하는 스킬은… 카르티의 ‘블랙스미스’였다. 케라우노스에게서 받았던 무한 주머니에서 꺼내든 미늘창을 완전 수복하면서 동시에 강화했다.
단번에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지만, ‘튜닝’과 병행하면 그런 것도 가능하다.
…물론, 세 가지 스킬을 동시에 쥐여짜내느라 머릿속이 엉망진창이 되어가고 있지만 그걸 걱정하는 건 나중 문제고.
“됐, 어. 뒤는 부탁… 해. 즈왈트.”
양손에 꽉 움켜쥔 미늘창의 날이 더욱 우악스럽고 흉악하게 번들거렸다. 할 수 있는 강화는 다 했다. 이제 남은 건 이 몸을 쓰는 데 더 적합한 전사인 즈왈트가 뒤를 맡아주는 것.
속이 뒤집힐 것 같은 메스꺼움을 참고 세 가지 스킬을 전부 OFF로 돌린 뒤 의식의 주도권을 강령시킨 즈왈트에게 넘겨주었다.
즈왈트는 양손에 거머쥔 미늘창의 감촉을 확인하듯 두어번 쥐었다가 천천히 키메라와 대치해 섰다. 단련이 덜 된 몸이지만, 이런 거라도 감지덕지하지. 실로 오랜만에 느끼는 살아있는 몸의 감촉이다.
즈왈트는 눈을 가늘게 뜨고, 내려다보는 시선들에 위축되지 않도록 올려다보았다.
구아아악!
뱃속이 비대하게 부풀어오른 키메라가, 역설적으로 굶주림에 지쳐 달려들었다.
자신과 카르티를 삼킨 이래, 키메라는 뱃속을 꽉 채우는 갑옷의 존재 탓에 아무것도 먹지 못했던 것이다. 하지만 순순히 소화되지도 않아서 키메라도 무척, 신경이 곤두선 채 화가 나 있었다.
미늘창을 손에 쥐고 마저 달려들었다. 쿵, 쿵, 쿵, 쿵, 쿵… 한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해골이 발 아래에서 마구 바스라졌다. 출렁출렁거리는 턱 아래에 불룩하게 부풀어 오른 배. 거기에만 시선을 집중했다.
“하아아아압!”
눈앞에 닥쳐오는 거대한 아가리가 벌어졌다.
아슬아슬하게 그 아가리를 옆으로 비켜서 피해 몸을 던져 슬라이딩한다.
쩌저저저저적.
동시에 미늘창을 들어올려 그 배에 대고 도끼날을 힘껏 휘둘렀다.
드드드득, 하고 쇳소리를 내며 긁히는 비늘과 얇은 뱃가죽이 부욱 찢겨져나갔다. 여기가 약점이라는 것을 아는 것은 아마 자신뿐일 것이다. 크와아아악, 하고 키메라가 고통스러운 비명을 질렀다.
와르르 뱃속 내용물이 쏟아졌다. 아직 뱃속에 가득하게 차 있었던 물컹한 것들은 전혀 빛이 들지 않아 몰랐지만… 잡아먹은 짐승의 반쯤 소화된 사체라든가, 돌덩어리, 나무둥치 등등이 어지럽게 한데 모여 썩어가고 있는 끔찍한 냄새가 질펀했다.
쿠우웅, 그중에 갑옷이 있었다.
표면에 부식이 천천히 진행되기 시작했던 터라, 조금만 지체했어도 아마 위험했을 것이다.
갸아악, 갸아악! 뱃속의 내용물을 배설처럼 쏟아내며 키메라가 난리를 쳤다. 뒷발이 들어올려졌다가, 정확하게 이 몸을 향해 쿵 하고 내리찍으려 하는 것을 겨우 몸을 굴려 피할 수 있었다.
“…일단, 카르티는 무사하다!”
날카로우면서도 살짝 허스키한 주인의 목소리로 카르티의 안전을, 초조하게 지켜보고 있을 남자에게 외쳤다. 꼬리 뒤로 빠져나가자, 녀석이 분노로 머릿거죽을 일그러뜨리며 한바퀴 빙글 돌아 이쪽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뱃가죽을 덜렁거리는 채.
저 녀석은 고통도 느끼지 않는 거야?!
머릿속에서 주인의 목소리가 경악한 채 울리는 것이 들렸다.
만약 이 키메라를 만든 녀석이 통각을 쓸데없는 기능이라고 생각했다면, 굳이 남겨두지 않았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오히려 잘 됐다.
달려드는 머리. 딱 표적으로 삼기 좋은 사람의 안면 모양이 보인다.
아직 특전 사용 시에 따라오는 근력과 반응속도 향상이 끝나기 전인 지금이라면… 가능하다! 마치 작살을 던지는 것처럼 미늘창을 팔 뒤로 당겨 든 채 외쳤다.
“케라우노스, 준비를!”
우르릉, 우르르릉…
날이 흐려졌다. 비를 한껏 머금은 먹구름이 하늘을 빠르게 채우고 있었다.
휘몰아치고, 뭉그러지고, 한껏 찌푸린 하늘 아래, 녀석의 머리에 대고… 창을, 던졌다!
갸악, 갸악, 갸악.
키메라가 울부짖는 가운데, 창끝이 정확하게 인간 얼굴의 미간쯤에 해당하는 부위에 박혔다. 물론 이 정도로 저 괴물이 쓰러질 리는 없겠지.
하지만 이걸로 되었다.
결정타를 먹이는 것은 자신의 역할이 아니었다.
주인과 내 목소리가, 지금이 바로 타이밍이라고 한 목소리로 외쳤다.
“지금!”
파직파직파직.
머리에 박힌 창이 부르르 떨리면서 어쩐지 모를 불온함을 느꼈는지 녀석이 물러선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피뢰침은 이미 그 머리에 정확히 박혔으니.
아까부터 초조하게 준비를 진행하면서 이쪽의 준비가 끝나길 기다리던 케라우노스가 몸을 드러낸 것이 보인다. 왜 웃통을 벗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얼굴에 분노와 복수심이 이글거리는 것이 보였다.
지금 내가 해야 할 것은… 정신을 잃은 카르티를 걸쳐 메고 한 걸음이라도 더 안전권의 더 안쪽으로 나아가는 것.
지금의 상황은 반드시 그래야 할 당위성이 있었다.
해야 할 일은 전부 했다. 이제 몸을 피하는 것만 남았다. 커다란 바위 뒤에 숨자, 이제 더 망설일 것은 없다. 해버리라고, 다시 한번 외쳤다.
번개가 내려쳤다.
마치 분노에 찬 신의 징벌처럼, 하늘에서부터 낙뢰와 낙뢰, 거기에 낙뢰가 몇 번이고 겹쳐 쏟아내렸다. 폭음이 귀를 먹먹하게 울리고, 눈꺼풀을 닫아도 망막으로 쏟아져 내려오는 섬광이 눈을 저리게 만들었다.
울려퍼지는 천둥과 번갯소리 너머로, 키메라의 고통스러운 비명이 울려펴지는 것 같았다.
시간상으로는 불과 10여초에 불과했을 전격 마법의 연속 행사. 온몸의 마력이 텅 빌 때까지 낙뢰를 불러내 목표에 내려꽂는 이 마법을 케라우노스는 자랑스럽게 ‘티타노마키아’라고 이름붙였댔던가.
쿠우우웅…
키메라의 거체가 마침내 쓰러졌다.
피뢰침 역할을 한 미늘창은 이미 진즉에 재가 되어 바스라졌고, 그를 통해 확실하게 키메라의 뇌는 전격에 구워져 새까맣게 타버렸다. 아마 심장도 진즉에 충격량을 이기지 못하고 터져버렸겠지.
“하아… 하아… 진짜, 맨날 이런 일만 있으면 마법사 노릇 진짜 못해먹겠다….”
즈왈트가 몸에서 빠져나가 갑옷으로 돌아가선 천천히 몸을 일으키는 게 보였다. 그대로 털썩 주저앉으면서 숨을 몰아쉬었다… 어찌나 몸을 험하게 굴렸는지, 내일은 근육통 확정이라고 말하는 듯 온몸이 쑤셔댔다.
뭐 아무튼 이렇게. 우루 늪지의 키메라 토벌, 완료다.
몇 가지 찜찜함은 남았지만, 일단 아무도 죽지 않고 끝내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주저앉은 채 숨을 휴우… 깊게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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