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0화 〉 2 2 / 기억을 잃어버린 갑옷 즈왈트에게(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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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분노. 분노. 분노. 분노. 분노.
케라우노스의 머릿속을 소용돌이치던 감정이 조금이라도 가라앉기를 기다리던 끝에, 그는 애꿎은 아름드리 나무 하나를 잿더미로 만들어버리고서야 이윽고 분노를 겨우겨우 조금 가라앉혔다.
빠드득… 이가 맞물려 깎여나갈 듯이 갈리는 소리가 조금 떨어진 자신에게도 여지없이 들렸고, 내린 주먹을 부들거리며 손바닥에 손가락이 파고들어 핏기가 보이고 있었다. 진흙탕에 핏방울이 뚝 하고 떨어졌다.
“…케르 씨.”
…조금 심호흡하곤,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자신의 목소리가 그렇게 떨리고 있을 줄은 몰랐다. 화내고 있는 케르 씨가 무서워서? 아니다. 나 자신도 무척, 화가 나 있었다.
어쩐지 조금이라도 말을 실수하면 치솟은 분노를 서로 걷잡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 사실이 오히려 머릿속에서 잡생각을 싹 정리했고, 발목을 잡아끌던 패배감도 떨칠 수 있게 했다.
“카르티라면 아직은… 괜찮아요. 조금 진정하세요.”
“…아가씨. 나도 보긴 봤지만. 그 갑옷 형씨가 얼마나 그 안에서 버틸 수 있겠냐.”
경황이 없는 와중에 그걸 보았었던 모양이다.
어제까지처럼 이제부터 추격을 재개해야 할 상황이라면 나도 낙담할 수밖에 별수가 없겠지만, 그래도 이번에는 상황이 조금 달랐다. 아주 당하기만 한 건 아니었다고.
지난 나흘간의 수색처럼 맨땅에 헤딩이 아닌 것만도 어디라고 해야 하려나.
일단 가장 먼저…
“정확하게는 아니지만… 지금 놈이 어느 쪽으로 갔는지는 알 수 있어요.”
놈이 즈왈트를 꿀꺽, 성급하게 삼켜버린 탓에 녀석이 어느 쪽에 있는지는 대강 알 수 있었다. 제 사역마의 위치 정도는 마법사로서 알 수 있으니까. 게다가… 잠시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했다.
[즈왈트. 들려?]
[……주인, 인… 가.]
지하 깊은 곳에서 주고받는 무전처럼 아주 희미하고 잡음이 많이 끼지만 아무튼 서로 대화할 수단이 있다는 데 감지덕지할 수밖에. 와이파이 안 터지는 곳에서 핸드폰 쓰는 것처럼 찜찜했지만 지금은 별달리 도리가 없잖아.
[카르티는 어때?]
[…지금은 정신을 잃었다. 나는 괜찮지만, 여기는 냄새가 좀 심하다더군. 적어도 당장 위산에 녹아 죽을 것 같지는 않다만… 마력이 떨어져서 주문이 정지하면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군.]
앗차. 당장 어떻게 될 건 아니라도 마냥 느긋하게 생각하고 있을 여유도 없는 모양이다.
즈왈트의 사념파가 계속해서 잡음과 함께 들어와 머릿속이 조금 지끈거렸지만 그래도 일단 정신을 집중했다.
[카르티의 스킬 때문일는지는 모르겠으되… 간혹 내게 가해지는 손상도 미미하게나마 수복되고 있다.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는 정보였으면 좋겠군.]
[…미안해, 아직은 이쪽에서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없어. 괴롭겠지만 지금은 조금만 기다려줘.]
[나는 괜찮다. 하지만 카르티가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는 알기 어렵다.]
[가능한 빨리 이쪽에서 어떻게든 해 볼게. 조금만 버텨줘.]
그렇겠지.
괴물의 뱃속에서 그런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는 녀석이 이 세상에 얼마나 되겠어.
한숨 푹 쉬고, 지금의 대화를 케라우노스에게 전하니 일단 당장 카르티가 죽지 않았다는 사실에 조금 안도하는 눈치였다.
“뭔가 뾰족한 방법이 있을까요?”
“지난번 그 키메라의 몸의 구조를 봐두었는데.”
케라우노스가 주저앉아 짧은 지팡이를 들고는 허공에 노란 빛을 띄는 무늬를 그렸다. 지팡이 끝을 따라 선이 그어지면서… 굉장히 간략화된 키메라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림 못 그리네. 너무 간략화되서 그런지 뭐랄까… 옛날 게임 중 팩맨이라고 아시려나. 거기에 날개와 꼬리만 달아놓은 것처럼 생겼다.
“냅둬. 아무튼 녀석의 몸은 위턱과 아래턱만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 아래턱에 몸통이 그대로 붙어서 내장기관이 억지로 우겨 넣어진 것 같은, 그런 구조였다.”
아마 녀석에게 ‘번개펀치’를 날렸을 때였나. 그건 꽤 아파보였지. 통쾌할 정도로.
전기를 다루는 마법사이니만큼 몸의 전기신호를 파악해 신체 구조를 알아내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은 모양이었다. 아니, 그 정도로 전격 마법에 도통하기 때문이겠지. 아무튼 케라우노스의 말은 이어졌다.
“이제까지의 놈의 모습이나 행동으로 보건대. 어쨌든 놈은 잡아먹은 다른 짐승의 특징을 흡수… 라고 하기는 조금 미묘하지만, 그런 비슷한 게 가능한 것 같더군.”
생각해보았다.
확실히 중구난방으로 징그럽게도 생겨먹었지만, 이제껏 잡아먹은 짐승의 형질이 마구잡이로 몸에 나타났다면 결국 그런 모습을 띠는 것도 이상하지 않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놈은 마치 입이 극단적으로 진화한 심해어 같은 모습이지 않았나. 그렇게 잡아먹고 몸을 진화시키는 게 목적이라면, 포식행위에만 극단적으로 집착하는 것도 이해는 간다.
그렇게 생각하면, 카르티를 노린 이유도 어느 정도는…
아직은 혹시나, 라고 하는 가능성을 떠올린 정도에 불과하지만.
“어이, 아가씨?”
“듣고 있어요.”
하지만 지금 신비로운 짐승 생물학 강의가 길어져서는 곤란하다고요. 조금 툴툴거리니 케라우노스가 허공에 띄운 키메라의 그림을 거둬들이고는 다시 품속에 짧은 지팡이를 집어넣었다.
“…그나저나 다른 모험가 팀들도 녀석을 쫓고 있을 텐데, 뺏기기라도 하면 낭패인걸.”
투덜거리면서 내뱉은 한 마디는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이었다.
그렇다, 키르케가 물어온 건수이니만큼 우리 말고도 다른 모험가 파티가 이 늪지에 도착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것이다.
이거 안 좋은데.
고생은 고생대로 해 놓고 마무리를 홀랑 빼먹히거나 하면 정말… 참을 수 없이 열받겠다.
그렇게 둘 순 없지. 일단 날짜를 헤아렸다. 특전을 사용한 지 이제 여드레째인가, 날이 넘어가는 12시가 지나면 신데렐라 타임은 종료. 쿨타임이 끝난다.
그때까지 즈왈트와 카르티가 버틸 수 있을까. 조금 비관적인 생각이 떠돌았지만 아무튼 지금은 둘이 버텨줄 것이라 믿을 수밖에.
“뭔가 생각이 있나, 아가씨?”
“조금 실마리 정도는 잡힐 것 같아요. 일단 오늘은 녀석이 숨은 은신처 쪽으로 이동하도록 하자구요.”
막연하게지만 방향 정도라도 잡히는 게 어디야.
천천히, 즈왈트의 기척을 희미하게 더듬어 올라가면서 이동했다.
지도상으로는 우루 늪지의 북쪽으로 이어지는 길인데… 가면 갈수록 빽빽하고 질척질척한 습한 땅이 발을 잡아끌어서 이만저만 이동이 불편한 게 아니다.
끙, 하고 새삼 앞서서 길이나 나무를 편하게 만들어준 즈왈트의 빈자리를 아쉬워하고 있을 즈음, 케라우노스가 뒤를 돌아보고는 어딘지 짠한 눈을 했다.
“…왜 그렇게 봐요?”
“아니, 꽤나 어린 아가씨를 고생시키고 있다 싶어서.”
“뭘 그런 걸 신경쓰시고 그래요. 어차피 와달라고 고용한 건 난데.”
케라우노스가 뭔가 입이 근질거리는 눈치로 내 발께를 바라보았다…. 헤카이트 당주가 선물해준 가죽신이 진흙에 엉망진창이 된 것이 아무래도 신경이 쓰였나.
물론 헤카이트 당주가 준 신발이니만큼 뭔가 나름대로 마법 아이템이기야 하겠지만, 저렇게 측은하다는 눈으로 볼 건 뭔가. 아니, 지금은 그보다 그럴 때가 아니잖아.
“거의 다 왔어요. 슬슬 즈왈트의 기척이 강해지…”
[주인. 잠시 기다려라. 밖에서 소리가 들린다.]
가까워졌는지 잡음도 덜해졌고, 제법 똑발라진 즈왈트의 사념파가 머릿속에 울려왔다. 무슨 소리?
[주인이 온 게 아니라면, 어떤 이들이 온 것 같군. 하지만… 싸우는 것 같지는 않다.]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키메라가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일은 없다. 전혀, 라고는 못 하겠지만 거의라고는 할 수 있을 정도로는. 그렇다면 누군가가 저 키메라를 만들어내고, 지금은 아마… ‘조정’이라도 하고 있단 말인가?
[안 좋은데. 뭐라고 말하는지 들려?]
[여기서는 잘 들리지 않다만… 이 키메라는 지금 잠들었다. 맥박이 느려졌어.]
어쩐지 생각보다 골치아픈 일에 말려든 것 같은 기분이 드는데.
[즈왈트, 뭔가 상황에 변화가 있거든 알려줘. 우리도 근처까지는 왔으니까 곧…]
[알았다. 보고할 사항이 있으면 연락하지. 지금은 부식 방지 주문에 마력을 할애해야 해서 오래 말할 수가 없을 것 같다.]
부식 방지 주문… 즈왈트의 갑주에 새겨진 것은 정말 행운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정말 행운이라고는 눈곱만큼도 따르지 않지만 악운 하나만은 정말 천운이다 싶을 정도로 따른단 말이지. 휴, 한숨지으면서 진흙탕을 퍽, 하고 딛었다. 응? 뭔가 딱딱한 게…
“아가씨, 왜 그래?”
“아뇨, 진흙탕에 뭔가 반질반질하고 단단한 게 밟….”
나무를 해치고 조금 탁 트인 곳으로 머리를 내민 순간, 눈을 커다랗게 떴다.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대체 뭐냐고 이건.
사방에 해골이 널려있었다.
이제까지 머리와 심장을 뜯어먹은 키메라이니 이상할 것도 없다 싶었지만 그게 아니다.
둥글고 반질반질한 해골. 눈구멍이 파열된 해골. 턱뼈가 깨져나간 해골. 뒷부분이 완전히 파먹혀서 가면처럼 되어버린 해골.
“대체, 뭐냐고 저건….”
멍하니 중얼거렸다.
그 해골들은 모조리, 사람이 죽어서 남긴 인골(人?)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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