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4화 〉 2 2 / 기억을 잃어버린 갑옷 즈왈트에게(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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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10분 후. 문제의 갑옷과 마주한 자리는 꽤… 뻘쭘했다.
전혀 의도하지 않게 불러낸 사역마와 그 소환에 응해 와보니 한창 욕구 해소 중이었던 마법사. 일단 서로 마주 앉은 채 메이드복을 입은 웬즈데이가 갖다 준 허브차를 한 모금 마셨다… 쓰다.
[…어흠. 만나서 반갑네. 주인이여.]
“난 별로 반갑지 않아. 당신 누구야. 난 부른 적이 없는데.”
…평생 이불에 발차기를 날릴 경험을 했으니 내 말이 곱게 나갈 리도 없었다. 도끼눈인 채 시커먼 갑옷을 올려다보며 쏘아붙이니 건틀릿이 헬멧을 곤혹스러운 듯 긁었다.
[미안하군. 기억이 안 나네.]
“뭐가 어째?”
[아니, 내 잘못이 아니고 그런 엉터리 소환을 한 자네 탓인데 왜 그러나.]
그럼 응하질 말았어야지!
나 시집 다 갔어… 외간 남자… 인지 여자인지 모를 갑옷한테, 골렘으로 SM 놀이하면서 욕구를 푸는 걸 들켜버리고서야 시집을 어떻게 가겠어. 웬즈데이에게 시집을 가야 하나, 하고 슬쩍 보니 웬즈데이는 히익 하고 기겁했다. …상처받는다.
…씁. 아무튼 헛기침 한 번 하고, 서로 통성명이나 하자고.
“로제이아. 저~언혀 의도한 바 아니지만, 아무튼 내가 댁을 소환했으니 내가 댁 주인인 모양이고. 이쪽은 웬즈데이.”
“안녕하세요. 장ㅁ… 로제 씨의 만능 정령 비서 웬즈데이에요.”
그런 얘기는 나도 처음 듣는데.
뭐, 아무튼 웬즈데이의 탐스러운 금발을 쓰다듬으면서 이쪽의 소개를 마쳤지만, 갑옷은 여전히 침묵하고 있었다.
[…말했다시피 기억이 나는 게 하나도 없군. 그러니 내 이름을 스스로 정해야겠네. 그렇군… 이 갑옷이 검으니 앞으로 즈왈트(Zwart)라고 불러주게.]
“즈왈트? 무슨 뜻이야. 웬즈데이, 알아?”
“아, 에트루사 쪽 말이에요. ‘검정’이라는 뜻이죠.”
에트루사라면 대륙 남부에 위치한 항구도시로 ‘이카루스 펜시온’이라고 하는 유명한 사립 학교가 있는 곳이라고, 헤카이트 당주의 수업에서 들은 적이 있다.
‘서부 사수지’라고 불리는 이 대륙에서 세 손가락에 꼽히는 굴지의 무역항으로서, 동쪽 멀리 떨어진 대국 ‘아샨티’, 엘프들의 섬나라 ‘니네베’와의 교역이 가장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곳이라던가.
“그럼 이 분은 에트루사 출신의 용병쯤 되시는 걸까요?”
“에트루사란 말이지…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람 많이 몰리는 곳이잖아. 무리지, 무리.”
손을 휘휘 저으며 ‘즈왈트’를 보곤 한숨을 쉬었다.
“게다가 사역마의 기억을 찾아주려고 예정에도 없는 에트루사 방문으로 일정 변경할 생각은 없다구. 갈 곳은 이미 정해놨으니까.”
루시탄과 약속하지 않았던가. 한 사람 몫의 마법사로 인정받고나면 알브레히트 영지로 찾아가겠다고. 1년인가. 뭐, 녀석은 좀 자랐으려나 생각하면서 몸을 일으킨 채 뻐근한 허리를 한 바퀴 돌렸다… 결국 어영부영 식어버렸고. 묶인 부위만 욱신거리게 되어버린 시간이었다.
[나도 이의는 없어. 과거가 기억이 나지 않을 뿐 소환된 이상 주인의 호위에는 빈틈이 없게 할 생각이니까. 그러니 적당한 무기라도 하나 줬으면 좋겠군.]
“무슨 무기를 다루는데?”
[날붙이라면 뭐든 상관없지. 검도, 도끼도… 하지만 기왕이면 창이다. 구할 수 있다면 이 몸에 맞을 만한 커다란 창을 줬으면 좋겠어.]
창이라… 기억해둘까. 그런 창을 구하려면 왕도에 들어가야겠는데.
지금 자신이 머무르는 헤카이트 당주의 저택은 왕도 근처의 숲 한가운데에 자리를 잡고 있었기 때문에 생필품이나 기타 필요한 용건을 해결하려면 숲을 빠져나가 왕도로 들어가야 하는 귀찮은 과정을 거쳐야 했다. 그만큼 방문객이 적은 이점도… 있긴 하지만.
아무튼, 그렇게 다음날 마법 수련 여행을 떠나기 전 점검을 겸하여 왕도의 상점가에 나온 건 좋았는데…
“…눈에 너무 띄어!”
수상한 3인조였다. 좀 지나치게 수상한 3인조. 중요하니까 두 번 말했다.
남색 로브를 입은 애꾸눈 마녀와 금발 메이드, 그리고 사람을 으스스하게 하는 시커먼 갑옷의 조합은 너무 지나치게 눈에 띄었다.
“그러니까… 웬즈데이 너는 집 지키고 있으라고 했잖아….”
“에, 싫어요. 저도 구경할래요, 치사해요!”
얘는 몸을 얻은 다음부터 꽤 내 말을 고분고분 따르지 않는 못된 경향이 생겨버렸다. 지나가는 사람들이나 상점가에서 내다팔고 있는 물건들을 신기하다는 듯이 바라보고 있는 웬즈데이의 모습에 하는 수 없다는 듯 겨우 웃고 말았다. 성장했구나, 나.
…물론 내가 심혈을 기울여 튜닝한 보디이니만큼 주변 사람들의 눈에 띄는 정도는 감수해야했고. 실제로 눈치를 보며 접근해오는 사람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
말없이 내려다보는 새카만 갑옷의 서슬을 앞에 두고 추파를 던질 만큼 간이 큰 녀석은 없었다. 잘 된 건가. 뭔가 일이 마구마구 꼬이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데 말야.
아무튼, 대장간을 겸한 무기점에 들어갔다. 마법사에게는 어찌됐든 전위가 필요하고, 이 갑옷이 실력 있는 전사라면 큰 도움이 되긴 할 것이다.
완고한 대장간 주인 샨톤이 아는 체를 했다.
“신출내기 마녀 아가씨로군. 평소에는 혼자 다니더니 오늘은… 일행이 꽤 근사한걸.”
“신출내기 아니라고요. 이거 보세요.”
목에 멘 로켓을 보여줬지만, 샨톤은 보는 둥 마는 둥 그저 피식 웃고 말 뿐이었다.
“신출내기라는 말에 발끈하는 걸 보면 아직 한참 멀었어. 그나저나 뭘 사러 왔나? 알고 있겠지만 우리 집은 무기를 다루는 대장간이지 마법에 대해서는 문외한이라고.”
“샨톤 씨, 너무 그렇게 뻣뻣하게 나오시면 나중에 약초 안 팔 거에요.”
“까불긴. 뭐 보아하니 저 뒤의 형씨가 나한테 볼일이 있을 것 같은데?”
샨톤의 시선이 나와 웬즈데이를 지나쳐 등뒤에 선 즈왈트를 향했다.
뭐, 당연한 귀결이겠지. 이 기묘한 3인조에서 무기를 다룬다고 하면 당연히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전신갑주를 입은 즈왈트가 가장 강력한 후보일 테니.
[무기를 볼 수 있겠소?]
“흠, 어떤 무기를 원하시나?”
[창. 찌르는 외에도 다양하게 쓸 수 있는 창을 찾고 있소. 듣자 하니 당신이 왕도 제일의 대장장이라고 들었기에 쓸 만한 게 없다면 제작을 부탁하고 싶소만.]
흠, 하고 즈왈트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한 번 신장을 재듯 훑어보고는 손짓한 샨톤이 이번엔 그에게 팔을 쭉 뻗어보라고 요구했다. 순순히 따르니 율척(??)을 꺼내서 길이를 재었다. 팔 길이와 다리 길이를 잰 뒤 흐음, 하고 수염이 자라난 턱을 쓰다듬었다.
“그냥 찌르는 데 쓰는 평범한 병사용 창을 원하는 건 아닐테고. 베고, 찌르고, 칠 수 있는 본격적인 전투용 창을 원하는 모양인데… 돈은 있나?”
“돈이라면 어느 정도 모아둔 게 있어요.”
식물을 다루는 마법을 배운 만큼 약초와 채소를 캐다가 내다 팔아 모은 돈이 어느 만큼은 있었다… 하지만 오더메이드 무기라는 게 마녀가 찔끔찔끔 용돈 삼아 돈을 모아서 살 수 있을 정도의 가격인지가 문제겠지.
“이건 어떤가?”
샨톤이 벽면에 걸려 있던 한 자루의 미늘창(Halberd)을 집었다. 나이는 좀 들었지만 그래도 여느 젊은이들 못지않게 건장한 몸과 완력을 자랑하는 그에게도 다소 무거워보였다.
즈왈트는 샨톤에게서 헬버드를 받아들고는 감촉을 확인하듯 꾹꾹 쥐었다. 어쩐지 조금 유감스러워하는 기색인 것은 내가 그의 주인이어서 알 수 있는 거려나.
[이거면 됐소.]
“1,200 탈랭이네.”
비싸.
윽, 하고 지갑에서 어음을 꺼내 내놓으니 샨톤은 어음에 적힌 깨알같은 글자 하나하나 꼼꼼히 확인하고는 품에 집어넣었다. 보통 늙은 사람들이 이런 물건에 대한 신용은 부족한 경우가 많으니까.
“뭐, 일단 형씨에게 가장 맞을 만한 걸 추천하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우리집에 지금 있는 물건 중에서 고른 것에 지나지 않아. 평범한 재료로 만든 거라면 그 정도가 아마도 한계일세… 정 특별한 무기를 원한다면 쓸만한 재료와 돈을 들고 올 수밖에 없지.”
특별한 재료라.
음, 하고 하나만 보인 눈썹을 조금 찌푸리면서 잠시 곰곰이 생각했다. 특별한 재료 같은 게 여기저기 굴러다닐 리는 없으니까.
“내가 이래봬도 왕도 제일의 대장장이를 자처하고 있으니만큼 허투루 무기를 골라주거나 만들거나 하진 않네. 그러니 좋은 재료를 가져오면 만족할 만한 좋은 무기를 만들어주겠다는 약속을 하지.”
탕탕, 두꺼운 주먹으로 가슴을 두들기는 걸 보면 아무래도 즈왈트에게서 뭔가 유감스러운 기색을 감지한 모양이다. 하는 수 없는 일이니, 일단 지금은 그 정도로 만족하도록 할까. 평범한 무기점에서 아무도 가치를 못 느끼는 전설의 무기 같은 것과 조우하길 바랬지만, 뭐…
세상일이 그렇게 쉬우면 누가 고생 같은 걸 하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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