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커스텀 로즈-37화 (37/157)

〈 37화 〉 1 ­ ? / 안녕히, 저쪽 세계에게.

* * *

페리링은 한참을 날 끌어안은 채 놓지 않았다.

손으로 다독이는 어깨가 바들거리는 게 조금 마음이 아팠지만, 그래도 영영 볼 수 없는 것도 아니고.

조금 쓴웃음을 지으며 등을 토닥이다가, 가볍게 뺨을 그러쥐고 얼굴을 들게 해선 그렁그렁한 눈가를 닦아주었다.

“페리링. 인제 그만 울어.”

“로즈 씨…. 하필이면 로즈 씨가. 그런… 피도 눈물도 없고 잔혹하고… 어… 외설적이기만 한 마녀 무리에 들어가시다뇨. 그러지 말고, 기왕 마법 배우기로 생각하셨으면… 네?”

“그거 듣는 마녀 무지 열 받게 하는 재주 있네, 꼬맹이.”

등 뒤에서 날 데리러 온 키르케가 페리링의 말에 심사가 꼬인 것처럼 이마에 핏대를 세우곤 억지웃음을 히죽히죽 짓고 있었다.

페리링은 페리링대로 키르케를 노려보면서 볼을 부풀리곤 그냥 놔두면 한 판 붙을 지경이라 일단 페리링을 다독였다.

키르케는 한숨을 푸욱 내쉬고는 팔짱을 낀 채 말을 툭 던졌다.

“둘째 왕자, 아까 보니까 남부로 떠나던데. 안 가봐도 돼?”

“인사는 어제 했으니까 괜찮아. 솔직히… 지금 얼굴 보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도 조금 들고.”

한번 페리링을 꽉 안았다가 천천히 팔을 풀어준 다음 후우, 하고 숨을 내쉬었다.

쓰고 있던 안경을 벗어 안경집에 조심히 집어넣었다. 이 안경도 험한 꼴 많이 봤지. 살짝 웃음짓고는 그 안경을 페리링에게 건넸다. 정이 많이 든 안경이지만 그렇기에 페리링에게 주고 싶었고.

살짝 이마에 입술을 맞춰주자, 페리링은 한결 더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이건 내 선물. 잘 지내, 페리링. 당분간 못 보겠지만. 언제고 또 보자.”

페리링은 씩씩하게 눈가를 소매로 득득 문질러닦은 뒤 고개를 푹 숙였다.

“로즈 씨, 그동안 감사했어요.”

“나야말로. 페리링에게 얼마나 많이 신세를 졌는지 몰라. 다음에 만나면 해줄 이야기 잔뜩 만들어놓을게.”

페리링의 얼굴에 살짝 웃음이 번졌다. 천천히 그녀의 자그마한 몸이 순간이동으로 사라지는 것을 보면서 후우, 아쉬운 숨에 약간의 미련을 털어 살짝 내쉬고는 뒤돌아섰다.

팔짱을 끼고 있던 키르케가 뭔가를 휙 던져서 받고 보니… 남색 로브 한 벌.

“그거 입으면 정식으로 흑마법 학회의 수습생이 되는 거야. 각오 단단히 하라고.”

펄럭… 키르케의 말이 끝나는 것을 기다리지도 않고 로브 자락을 어깨에 걸치며 웃음지었다.

가능한 ‘마녀’에 걸맞는 웃음을 짓고 싶었지만 잘 되었을는지. 키르케가 어깨를 으쓱이는 걸 보니 시작은 그렇게 나쁘지도 않은 것 같다.

“축하해. 이것으로 너도 손가락질받는 수상한 마법사 무리의 끄나풀이야. 잘 해 봐. 헤카이트 당주께서 네게 새 이름을 내리셨어.”

딱, 하고 손가락을 튕기자 따끔한 아픔이 목에 둘러지듯이 감겼다… 왜 이렇게 여기 사람들은 목에 뭘 두르길 좋아하는 거람.

그래도 노예일 적보다는 몸에 무의식적으로 걸리는 압박감이 조금 덜한 정도라, 그나마 낫다고는 할 수 있겠지만.

목에 감겨붙은… 가시덩쿨 모양의 문신을 만지작거리고 있으려니 키르케가 입가에 마녀다운 웃음을 보였다.

“그럼 갈까, ‘로제이아’.”

로제이아. 그게 내 마녀로서의 새 이름인 모양이다.

어딘지 그늘처럼 음흉하면서도 장미덩쿨처럼 가시가 돋친 그 느낌. 로젤라이와는 다르게 어딘지 진흙탕처럼 질척거리는 이름의 울림은 꽤 마음에 들었다.

니이냐는 도망치고 있었다.

이 나라에서의 공작이 성과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마지막 뒷마무리에 욕심을 냈던 것이 화근이었던 모양이다.

갑갑했던 시녀복도 벗어버리고 단정했던 머리도 풀어헤쳤다. 화장도 달리했다. 시녀장으로 일했던 때와는 인상이 달라 알아보는 사람이 없을 거라고 낙관하고 있었다.

도중에 누군가와 마주쳤다면 그 누군가의 몸을 빼앗아 안전하게 빠져나갈 수도 있었겠지만… 어떻게 된 노릇인지, 지금까지 한 명과도 마주치지 않았다.

이대로 한 명과도 마주치지 않고 사전에 마련해둔 탈출구로 빠져나가면 그것도 상관없다. 다른 도시로 가서 몸을 바꾸고 귀환하면…

“…윽.”

그렇게 쉽게 되지는 않을 모양이었다.

분명 인기척이라고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는데, 배수로를 통해 성을 빠져나가 번화가로 나가는 마지막 길목… 그 자리에 서서 지키고 있는 누군가가 있었다.

젊은 남자는 니이냐를 똑바로 바라보면서 뒷짐을 지고 선 자세 그대로 말하고 있었다. 이 이상은 갈 수 없다고.

탄탄한 몸을 수도복으로 감싼 채 목에는 태양십자 묵주가 탁하게 빛났다. 교회 녀석인가?

니이냐는 칫, 하고 혀를 찬 뒤 허리춤에서 단검을 뽑아들었다.

자신의 스킬 ‘페이스시프트’는 손에 닿은 상대의 몸에 자신의 의식을 갈아탈 수 있는 스킬이었다. 어차피 단검은 눈속임에 불과하다.

이 스킬로 상대의 몸을 빼앗으면 오히려 더 잘된 일이다. 교회 사람을 의심하지는 않을 테니까.

남자가 입을 열었다.

“‘복음회’. 맞습니까?”

니이냐의 몸이 덜컥 떨렸다. 남자가 그 소속명을 단숨에 말할 줄은 몰랐다.

아주 잠시동안 당혹했을 뿐이지만 남자의 몸이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그 정도로 충분한 모양이었다.

“윽…!”

약 열 보 정도의 거리를 한 번의 도움닫기로 좁힌 남자의 다리가 창끝처럼 뻗쳐왔다.

니이냐는 얼굴의 핏기가 싹 가시는 것을 느끼곤 서둘러 물러서면서 학, 하고 숨을 내쉬었다. 아무리 여자 몸이라지만 너무 단련이 안 되어있어서, 이 몸으로 싸우는 건 불가능했다.

아니, 하지만 싸울 필요는 없었다. 겉으로는 일단 당황한 태도를 보이면서 기회를 봐야한다.

복음회의 존재를 알고 있다면 나름대로 교회의 중추에 선이 닿아있는 인물일 터. 교회의 내부 사정을 파악해서 본당에 알릴 수만 있다면…

발차기를 피해내자, 남자의 몸이 내뻗은 다리를 그대로 내려 땅을 딛고는 그 기세 그대로 반대쪽 발을 돌려 마치 화살을 쏘듯이 뻗쳐왔다.

인간으로서는 거의 불가능하다고 여겨질 몸놀림이었지만 남자는 땀 한방울 흘리지 않았다!

“꺽…!”

물론 그 발차기를 니이냐가 피해내는 것은 불가능했다. 어깨를 후려찬 발차기가 단숨에 쇄골과 견갑골을 짓이겼지만, 그래, 그 정도가 딱 좋다.

승리감 짙은 웃음을 짓고는 니이냐의 손이 남자의 다리를 붙들었다.

‘페이스시프트’ 스킬 발동!

…어?

눈을 감았다가 떴다. 스킬이 발동하면 1초도 지나지 않아 그 사람의 육체를 자기 자신의 것으로 삼아 지배할 수 있었다.

이 남자가 얼마나 강한 달인이든, 초인의 범주에 들었든 상관없었다. 그런데 왜 여전히 그 남자가 발을 내뻗은 모습이 자신의 눈에 비치는 것이지?

“어?”

바보같은 울림이 입에서 튀어나왔다.

남자는 발을 붙잡은 손을 지푸라기처럼 간단히 뿌리치고는 이번엔 손으로 니이냐의 목을 움켜쥐어 들어올렸다.

당황과 당혹으로 얼굴을 일그러뜨린 니이냐가 아무리 그 팔을 쥐어 스킬을 발동해도 눈앞의 풍경은 그대로였다.

대체, 대체 어떻게 된 거냐고!

악의에 찬 니이냐의 손에 쥐여진 단검이 최후의 저항으로 남자의 팔을 내리찍었다.

칼끝이 살짝 파고들어간 피부 아래에서… 피가 아니라 기름이 새어나왔다. 살짝 벌어진 틈바구니에서는 뼈와 근육이 아니라 금속으로 된 구동부가 맞물렸다.

기계?!

대체 무슨, 뭐가 어떻게 된 거지?! 마치 자신의 존재를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는 듯한 대처였다.

혹시 이제껏 아무와도 마주치지 않았던 것은, 모두 교회의 손바닥 위에 놀고 있었기 때문이란 말인가?!

“저항해도 상관없습니다. 어차피 다음에 눈을 뜨실 때는 교회의 심문실일 테니까요.”

무슨…!

한쪽 손에 목을 잡힌 채 바둥거리는 니이냐의 저항을 비웃지도 동정하지도 않고, 남자가 다른 팔을 들었다.

그 팔뚝의 소매 안쪽에서부터 불그레하게 타오르던 빛무리가 서서히 남자의 손바닥에 모여들었다.

손바닥 안에서 빛줄기는 하나의 형체로 짜였으니 아주 자그마한 정육면체가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남자의 손이 움직였다. 질량도, 부피도, 크기도, 무게도, 전부 무시하고 남자의 손이 니이냐를 그 정육면체 안에 밀어넣었다.

블랙홀에 빨려들어가듯 니이냐의 몸이 그 너머로 꾸깃꾸깃 소리를 내며 구겨지고 있었다.

“싫…어, 싫어싫어, 싫어어어! 하지 마, 하지 마, 하지 마아아…! 살려… 아, 아아, 구겨져구겨져구겨져구겨져구겨져구겨져구겨져, 아파아파아파아파, 누가 좀 도와ㅡ”

머리를 붙든 손이 우악스럽게 정육면체 안으로 머리를 밀어 넣기 직전까지 고장 난 메트로놈처럼 니이냐의 입이 절규를 되풀이했다.

완전히 그 몸뚱이가 가로세로높이 2cm 정도의 조그마한 정육면체 안에 사라지고 나자, 니이냐였던 것이 담긴 검은 큐브가 툭 하고 바닥에 떨어졌다.

“봉관(??)을 마쳤습니다. 예하.”

“수고했어요. 멜키아데.”

남자의 나지막한 말에 대답하는 목소리가 있었다.

붉은 사제복은 오수가 흐르는 배수로와는 그다지 어울리지 않았다. 진흙탕에 떨어진 큐브가 공중으로 떠오르더니, 남자, 멜키아데를 지나쳐 베아트리체의 손으로 빨려드는 것처럼 들어갔다.

케루빔의 총장, 추기총경 베아트리체 발레리아는 잠시 그 큐브를 내려보면서 중얼거렸다.

“‘복음회’… 또 그 이름인가요.”

“컬브랜드, 트란 드라쿨루, 에트루사, 그리고 티르 타이른키에 이어서 5번째입니다. 예하.”

“알아낼 수 있는 정보를 모조리 알아내도록 하세요. 무슨 수단을 동원해도 좋습니다.”

지긋지긋하다는 듯 손이 큐브를 꽉 움켜쥐었다.

알트슈타인에서의 일은 아직 끝난 것이 아닐 것이다.

이 소동은 그저 시작에 불과하다고, 그녀는 여신의 은혜가 내리쬐는 평화로운 거리를 바라보며 그렇게 확신에 한없이 가까운 예감을 곱씹고 있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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