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4화 〉 1 6 / 나 자신, 로즈에게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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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오르간 연주가 서서히 가라앉아간다.
노래의 마지막 자락을 갈무리하면서 숨을 거둬들이고, 거스러미처럼 남은 숨을 내쉬면서 묘하게 몸을 덥히는 희열과 충족감에 어깨가 살짝 떨렸다.
눈동자를 가린 눈꺼풀도 부르르 한 차례 떨었다가 천천히 뜨자, 그제야 자신이 벌인 일의 결과가 눈에 들어왔다.
아니, 이런 것까진 미처 생각하지 못했는데.
각오하고 지른 일이긴 했지만, 막상 현실로 훅 다가오니 제대로 적응이 되지 않았다.
자신을 향해 여과 없이 쏟아지는 시선들은 뜨거운 열광의 것이라기보단 의혹으로 가득한 냉랭함으에 훨씬 가까웠기 때문에.
단상을 올려다보았다.
붉은 수도복을 입은 추기총경은 무슨 생각을 했는지… 나와 눈이 마주치자 가볍게 한쪽 눈을 찡긋 감았다가 떴다.
사전에 말이 오고 간 적이 없는 합창의 기회를 내어준 것은 그녀로서는 결코 가볍지 않은 모험이었을 텐데. 뭐, 이 빚은 루시탄이 대신 갚겠지.
문제의 루시탄은, 조금 머리를 짚은 채 비틀거리며 서 있었다. 적어도 지금 남의 빚을 대신 갚아달라고 말할 만한 상태가 아니라는 점만은 분명하다. 비틀거리는 루시탄을 부축했다.
“으, 대체 뭐가 어떻게 된…”
“아무 말도 하지 마. 일단 조금… 쉬고 있어.”
“…머리가 아파. 그리고 잠시 기억이 없고. 그래, 분명 니이냐가…”
뭔가를 떠올리려고 하다가 강한 두통을 느꼈는지 순간적으로 한번 더 다리에 힘이 빠져 비틀거리는 그의 몸을 안아 지탱하면서 왜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지 울화가 치밀었지만, 곧 상황을 깨달을 수 있었다.
저쪽도 저쪽 나름대로 꽤, 정신이 없는 모양이니까.
“폐하!”
“폐하! 괜찮으십니까…!”
성가가 끝나자마자 갑작스럽게 몸을 비틀거리다가 왕좌에 주저앉는 왕의 용태가 갑자기 급격하게 나빠져, 주변의 내빈들이 웅성거렸다.
‘매의 기사’의 호령에 친위대가 왕좌를 둥글게 에워쌌고, 갑작스럽게 루시탄의 생일 파티는 말 그대로 아수라장의 도가니가 되어버린 순간이었다.
그때, 연회장 정문이 덜컥하고 열리며 풍채가 당당한 위장부가 깔린 융단을 당당히 밟으며 들어왔다.
어젯밤까지는 무력감과 체념만이 웅크리고 있던 그 얼굴이 지금은 위엄있는 빛을 발하는 것을 보며 어쩔 줄 몰라하던 내빈들이 웅성거렸다.
“미하도르 왕세자님이시다….”
누군가가 중얼거렸다.
그 말 그대로, 미하도르는 이제 당당히 왕세자의 자리에 어울리는 얼굴을 되찾아 무게감 있는 걸음걸이로 왕좌가 있는 단상으로 향했다.
매의 기사가 한 발자국 나서서, 왕세자와 마주 고개를 숙이고 인사를 나눴다.
“경. 아바마마를 부탁드리겠습니다. 이 자리는 지금은 제가.”
“받들겠습니다. '저하'.”
매의 기사가 잘 다듬은 수염 사이로 싱긋 웃었다.
"돌아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저하."
"…감사합니다, 경."
매의 기사가 주위의 수하 기사 두 명을 향해 고갯짓하자 그들은 서둘러 왕의 팔을 각각 어깨에 지탱하고 좌측의 쪽문을 향해 비틀거리는 그 몸을 부축해 옮겨갔다.
왕세자는 복잡한 표정으로 지금은 빈 왕좌에 잠시 시선을 두었다가, 다시 몸을 돌렸다. 당당한 남자의 얼굴에 여유로움과 우아함이 떠 있었다.
“불미스러운 모습을 보여 대단히 죄송합니다. 내빈 여러분. 아바마마를 대신하여 제가 잠시 여러분을 접대하는 데에 소홀함이 없도록 각별히 주의를 기울이도록 하겠습니다.모쪼록 안심하시고, 이 자리를 즐겨주시기 바랍니다.”
후우, 하고 루시탄은 잠시 머리를 숙이고 키득거리며 웃었다.
심사에 뒤틀렸던 것을 모조리 토해낸, 낮지만 또한 시원한 웃음이었다. 루시탄은 잠시 내 어깨에 기대고 있던 손을 풀고는, 우드득 하고 주먹을 풀었다. 뭘 하려고.
또각, 또각, 또각. 녀석이 단을 밟고 올라가는 게 퍽이나… 불안하다.
미하도르도 그를 발견했고, 반갑다는 듯이 입을 열어…
“아, 루시탄. 네가 그동안 날 대신해 여러모로 고생…”
“형, 잠깐닥치고 이 악물어.”
…ㅆ지만, 그 말이 끝까지 이어지진 못했다.
내빈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동생의 주먹이 형의 턱에 꽂혔다! 어퍼컷이다! 그것도 클린히트!
크억, 하고 전혀 예상하지 못한 루시탄의 전력을 다한 펀치에 턱을 정통으로 얻어맞은 미하도르가 비틀거리면서 뒤로 두어 걸음 물러서다가, 더듬거리던 손이 ‘공교롭게도’ 바로 뒤에 있던 왕좌를 붙들고 자기도 모르게 주저앉아 끙끙거리는 것이 보였다. 이제야 모든 일이 제대로 해결됐다고, 좋아하는 꼴이란.
…그나저나, 저질렀네 저 녀석.
쌓인 게 많아서일 것이고, 손님들 앞에서 쇼맨쉽을 보이려고 할 것이고. 나는 왕 재목이 아니오, 라고 어필하는.
영악한 녀석. 골치가 아파서 머리를 짚고 한숨을 지었다. 뒷감당은어쩌려고 저래….
루시탄은 묘하게 속이 후련한 얼굴로, 경악한 내빈들의 앞에서 얼얼해진 손을 흔들어 털고는 히죽거렸다.야, 너 안심하지 말라고.
경악을 금치 못하는 사람들 사이로 그 중 단 한명, 큭큭거리면서 새는 웃음소리는 붉은 사제복 사이에서 나오고 있었다.
“꼴사나운 모습을 보였습니다. 전국각지, 그리고 타국에서 모이신 귀빈 여러분. 뭐, 기왕 오셨으니 술이랑 밥 우리 집 파산할 정도로 드셔서 형이랑 아버지 좀 머리 아프게 해 주십쇼. 그럼 전 다음 예정이 있어서 이만 자리를 뜨겠습니다.”
올라갈 때와 마찬가지로 예의범절이라곤 파리도 안 꼬일 법한 태도로 내려와 루시탄이 덥석, 내 손목을 붙잡았다…
하아, 난 어쩌라고 이러는 거냐고. 하다못해 얼굴이라도 가리고 녀석이 끌고 가는 대로 따라 연회장을 나서는 내 등 뒤로 웅성거리는 소리가 뒤따랐다.
루시탄은, 위병들이 보든말든 시녀들이 말을 걸든말든 마치 족쇄에서 풀려난 망아지마냥 거침없이 궁을 빠져나가 정원까지 무작정 걷다가 겨우걸음을 멈춰세웠다.
좋아, 주위에 사람 아무도 없고. 이 쯤에서 나도 볼일을 좀 봐야겠어.
“야.”
묘하게 톤을 낮춘 내 목소리에, 쇼생크 탈출의 표지에 나와도 좋을 것 같은 후련함을 보이던 녀석이 뒤돌아본다. 너 말야.
“너야말로 이악물어.”
“뭐?”
녀석이 내 말을 이해하기 전… 아니, 사실은 녀석을 불렀을 때부터 내 주먹은 출발해있었다.
돌아보는 즉시, 녀석의 볼따구에… 전력으로 아구창을 때려박을 수 있도록!
무게를 실은 주먹질이 뺨에 퍼억, 하고 심한 소리를 내며 꽂히자 녀석의 눈이 확 커졌다. 자기도 얻어맞을 거라곤 생각도 못했겠지! 이 뻔뻔한 새끼!
“이건 저번에 빚 갚는 거고!”
저번 빚이란 멋대로 키스하고 튄 것을 말한다.
…아니, 생각해보면 키스 아니다. 아니라고. 생각하니 더 열받네. 어디 한 번 뒈져봐라.
“이건 나한테 너네 집 뒷설거지시킨 값이다, 이 망할 새끼야!”
어깨를 콱 붙들고, 무방비한 그 뱃가죽에… 니킥을 꽂아주었다!
왕자라면 몸 단련 정도는 했겠지! 왕자라서 안 했을 수도 있나? 아이 씨발, 알 게 뭐야!
무정하게 퍽 꽂히는 소리가 자못 통쾌하게 들렸다. 아, 살 것 같다!
비틀비틀, 갑작스럽게 안면과 배에 한 대씩 얻어맞은 루시탄이 비틀거리면서 헥헥댔다.
조금 심했는지, 허리를 굽히고 헥헥거리던 소리가, 이내 끅끅거리다가… 큭큭, 하고 웃음으로 번졌다.
“푸… 푸흐, 푸핫, 푸하핫…!”
녀석이 배를 잡고 웃어댔다. 어디 잘못 맞았나.
이 새끼가 미쳤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나한테까지 그런 기분이 불길처럼 옮겨붙은 것은 매한가지.
히죽히죽 웃다가, 나도 그냥 소리내어 웃기 시작했다. 아, 이렇게 웃어본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
눈물이 맺힐 정도로 웃었다. 턱이 아프도록 웃었다.
녀석과 나 말고는 아무도 없는 정원에서 웃음소리에 파란 꽃들이 이리저리 흔들려댔다. 잠시 그렇게, 미친년놈처럼 웃어대고 나니, 후련해져서 너무 웃느라 막히는 숨을 학학거리고 있었다.
“하아… 진짜, 끝났어. 씨발, 좆같았는데.”
“그러게. 로젤라이도 이걸로 만족했겠지. 나도 그녀에게 감사 인사 정도는 해 두고 싶었는데 말야.”
“진즉에 갔어. 언제가 될진 모르겠지만 다음 기회를 기약하셔. 루시탄. 손바닥 보여줘 봐.”
이렇게? 하고 루시탄이 팔을 뻗으면서 손바닥을 보였다. 이를 드러내고 씩 웃곤 그 손바닥에, 양 손바닥이 얼얼하도록 짜악, 하이파이브했다.
자, 이걸로 정말 끝난 거지? 이 개같은 소동 말야.
걸리버 풍습이었지만, 루시탄도 이 행위의 의미를 어느만치는 눈치챘는지 한번 웃었다가표정을 바로 하고는 이내 자세도 정중히 바로잡았다.
살짝 고개를 숙이는 녀석의 행동에는 조금 놀라버렸다.
“하아… 정말 너에겐 여러 가지로 고생을 시켰어. 이제까지 도와준 것에 대해 감사한다. 뭐라 할 말도 없어. 너에겐 이 나라 왕실이 정말 큰 빚을 졌다.”
“아아, 정말. 뒈질뻔하고, 속이 뒤집힐 일이 천지였지. 존나게 굴렀으니까.”
“…이럴 때는 조금 겸양을 떠는 게 일반적이지 않나?”
허리를 세우면서 루시탄이 피식, 힘이 살짝 빠진 웃음을 지었고, 자질구레한 건 신경쓰지 말라고 종아리에 가볍게 탁, 하고 발차기를 먹여주자 아프다고 엄살을 부리는 꼴이라니.
“그러네. 전에 약속한 거 하나 있었지.”
“약속?”
뭐, 약속이라고 할 만큼 거창한 건 아니었지만 말야.
녀석과 처음 바이체슈테른 항구에 도착했을 때 지나가듯이 했었던 말이었다.
“왕도 구경, 시켜주기로 했잖아.”
“아… 그러고 보니 그랬었지.”
그제야 기억이 떠오른 듯 루시탄은 고개를 끄덕이다가주위에 누가 없나 둘러보았다. 마차라도 한 대 부를 셈이었던 모양이지만지금은 별로 마차를 타며 한가롭게 노닐고 싶은 마음이 아니었다.
이번엔 이쪽에서 녀석의 손목을 잡아끌어 걸음을 옮겼다. 오히려지금은 누구 눈도 생각하지 않고 일단 무작정 그냥 걷고, 놀고 싶은 기분이었으니까.
“…어이. 혹시나 해서 묻겠는데.”
“……묻지 마.”
"지금 자신이 어디로 가는지는 알고 일국의 왕자를 끌고 가고 있는 거겠지?”
“…….”
모릅니다. 어디로 가야 왕궁에서 나갈 수 있어?
녀석의, 우스워 죽겠다는 듯 움찔거리는 입술이 참 사람 열받게 했다.
이참에 한 방 더 갈겨버릴까보다. 망할 자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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