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커스텀 로즈-31화 (31/157)

〈 31화 〉 1 ­ 6 / 나 자신, 로즈에게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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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

…생각해보면 나는 어릴 적부터 다른 사람이 되고 싶었던 것 같다.

내가 싫고 싫어서,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의 인생은 모두 반짝거리는 것 같아서.

내가 있는 곳이 싫고 싫어서, 여기가 아닌 다른 곳은 모두 행복이 넘치는 것만 같아서.

가장 어릴 적의 기억이 천천히 기포처럼 떠오르고 있었다.

그제야 자신이 가라앉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고 나서야 여기가 어딘가 하는 의문이 기포와 함께 부글거렸다.

“여기는….”

거품 속에서 누군가의 모습이 떠오르고 있었다.

내가 열 달간 뱃속을 빌린 것 이외에 아무 것도 빚진 것이 없는 한 여자의 모습이다.

그 외의 모든 것을 내가 빚진 아빠를 만나서, 나를 낳았고. 나를 낳자마자 더 젊은 남자들과 도박에 빠져들어 제가 가진 것, 제가 가지지 못한 것을 전부 불태워버린 여자였지.

제 얼굴은 그 여자를 아주 많이 닮아서, 어릴 적부터 그 얼굴을 죽을 듯이 싫어했다.

특히 눈이 아주 싫었다. 아주 어릴 때부터 안경을 쓴 이유가, 아마 그것 때문이 아닐까 생각될 정도로.

“…씨발. 왜 여기까지 와서, 이딴 걸 보여주고 지랄이야.”

성격이 욱하고 올라와 눈꺼풀이 바들거렸다.

여기까지 오다니… 여기에 왜 오게 되었더라? 조금 현실감이 엇나가서 머릿속이 어질어질하다. 나는 뭘 하고 있었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자꾸만 가라앉아가는 기억의 해류를 거슬러 올라가려 다리를 휘저었지만 몸은 여전히 점점 더 깊은 심연으로 침잠해간다.

다행히도 숨이 막히거나 수압에 짓눌리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제 기억에는 짓눌릴 것 같다. 그 여자의 기억으로부터 시선을 떼고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이번엔 다른 사람에 대한 기억이었다.

남자의 기억. 아빠…

아빠는 평범한 사람이었다. 평범하게 나를 사랑해주었고, 나만큼은 제대로 된 어른으로 키워주려고 했던 그런 사람.

나를 낳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방종을 시작한 여자의 빚이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것을 견디다 못해 아주 어렸던 내가 기억할 정도로 그 여자와 아빠는 심하게 다퉜었다.

그 뒤로는 여자를 볼 수 없게 되었고. 아빠도 그 여자를 찾지 않았다.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아빠는 나를 기르기 위해 돈이 필요했고 자연히도 텅 빈 집에 홀로 아빠를 기다리는 시간은 무척이나 싫었더랬다.

그때는 밤늦게 돌아온 아빠를 붙잡고 칭얼거리는 것이 얼마나… 얼마나 철모르는 행동이었는지 알기에는 너무 어렸었다.

초등학교 4학년을 마칠 때쯤이었나. 그때가.

여름옷과 겨울옷만으로 사계절을 지내는 것을 같은 학년의 녀석들까지도 이상하게 여기기 시작할 때였던 것 같은데.

결국 아빠는 쓰러졌다. 간이 썩어버릴 정도의 과로와 위가 녹아버릴 정도의 울분을 삭이지 못하고 결국 쓰러져, 병원 침대에서 그 날로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나는 아빠를 잃었고, 아빠가 눈도 감지 못하고 남겼던 보험금은 뭐… 법정대리인이라는 이들이 와서 지들끼리 노나먹었던가.

아빠의 보험금은 모조리 자기들이 갈라먹고, 아빠가 진 빚만은 오롯이 모조리 내 몫이었다.

거기에는 집을 나간 여자의 것이 대부분이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초등학교 4학년 꼬맹이에게는 법은 너무 멀리 있었지.

그 법정대리인이라는 이들의 여기저기의 집을 전전하며 눈칫밥을 먹어야 했던 중학교 졸업까지의 5년은 개 좆같은 삶 중에서도 최악이었고.

좀 더 머리가 컸더라면, 아는 게 있었더라면 아빠가 남긴 것을 전부 뺏기고 애물단지 취급을 받는 일은 없었을 거라고, 어렴풋이 알게 된 뒤로부터는…

그 욕 쳐 나오는 5년, 잠자는 시간을 빼고는 공부에만 몰두했다.

그다지 좋지 못한 머리는 그 여자의 유전이라고 믿어 의심하지 않고 있다.

그래도 될 때까지 시간과 몸을 태워 머리에 쑤셔 박는 무식한 공부법 덕에 그 빌어먹을 법정대리인들이 설치지 못할 곳에 있는 기숙사 딸린 고등학교에 들어가게 되었었다.

그때만 하더라도, 이제 제 인생의 좆같은 시기는 지나고 조금은 전보다 더 낫게 살 수 있을 거라고 순진하게 그렇게 생각했었지.

딱 입학식 다음 날, 제 신발장에 넣어놓은 신발 안에 어디서 구했는지도 모를 정도로 실한 지렁이와 구더기가 무리를 지어 꿈틀거리는 것을 보기 전까지만.

그때 깨달았었다.

이제까지는 예고편에 불과했었다고.

이제까지는 집에서 기르는 개 마냥 눈칫밥을 먹이는 이들의 심기만 살피면 되었다면, 이제부터는 어딜 가든 내 존재 자체를 고까워하는 이들과 부대끼고 살지 않으면 안 된다고.

지금의 신조가 그래서 생겨났지.

어차피 세상일이란 원래부터 그런 것이다. 어차피 그럴진대 어쩌라고.

구워먹든 삶아먹든 지져먹든 튀겨먹든 씹어먹든 니들 좆대로 해라.

좆같은 것도 좆같은 대로 받아 먹어줄 테니까.

나는 다른 사람이 되고 싶었다.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되고 싶었다.

나를 싫어하는 이들의 말쯤은 웃음으로 넘겼다, 나에게 향해지는 호의는 이용할 수 있는 한 이용했다.

얼굴에는 살가죽 바로 위에 들러붙는 얇은 웃는 가면을 썼다.어디부터가 얼굴이고 어디부터가 가면인지 모를 정도로 오래.

남들과 대화하는 데 필요한 거라면 그것이 뭐든 머릿속에 쑤셔넣었다. 남들에게 밥 한끼라도 얻어먹을 수 있을 만한 행동이라면 뭐든 했다.

고등학교 3년.

그 전까지는 잠자는 시간 말고 공부에만 파고들어 도망쳤다면, 고등학교 3년 동안은 제 나이를 속여 학교에서 공부하는 시간 외의 모든 것을 내 손에 돈을 쥐게 하는 데 퍼부었다. 음, 그것도 나름의 도피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내게는 그 여자가 유일하게 써먹으라고 남긴 반반한 얼굴과 마음고생 탓에 고등학생으로 쉽게 보이지 않을 정도의 독기 어린 인상이 있어서, 일을 구하는 자체는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뭐, 물론 깨끗한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어차피 세상이 좆같은데 이슬만 먹고 살 수 있을 리가 있나. 이슬만 먹을 수 없으니 알콜 섞인 이슬을 젊은 손님이 주는 대로 받아마시고 그 날 처음으로 남자와 섹스를 했던가.

그렇게 번 돈이 역겹고 좆같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달관하는 자신의 처지에 고소했었지.

자신과 같은 얼굴을 한 여자에게 엿 먹이는 기분이 들어 거기에는 통쾌함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지만. 알아, 그냥 자기위안인 거.

그렇게 고등학교 3년을 보냈다.

낮에는 무작정 공부에만 파고들고, 학교가 끝나면 야자고 뭐고 집어치우고 한 푼이라도 더 벌기 위해 발버둥 치는 나날이 3년이었다.

언젠가 제 손에 밥숟가락 쥐게 해 줄 수 있는 것이라면 뭐든 머리에 쑤셔넣어 이것저것 자격증을 땄다.

…이제 와서 생각하면 다 헛일이었는데.

다행히 장학금이라는 것을 받고 대학에 들어갈 수 있었다.

아빠의 빚은 꼬맹이가 3년간 발버둥 친 끝에 조금씩이나마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대학에 들어가서는 나이를 속이고 일할 필요가 없어져서 강의 시간을 뺀 나머지 시간은 중독자처럼 일을 찾아다녔다.

대학 따위 가는 대신 그냥 일을 시작하는 것도 하나의 선택이었지만 그때는 그것이야말로 그 여자에 대한 복수라고 여겼다.

제대로 된 어른이 되는 게 그 여자에 대한 복수라고,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다.

자신의 선택이 얼마나 험난한 것인지는 모르고. 대가를 어떻게 치를 거라고는 전혀 알지도 못한 채.

자신의 독기와 오기만이 그 모든 것을 견디게 해 줄 것이라 믿은 채, 그 사이 내 몸이 얼마나 씹창나고 있는지는 전혀 안중에도 없이.

지도교수와 처음 만난 자리에서 나와 몇 마디 내키지 않는 면담을 한 그는 어째서인지 학생기록부라든지 이런저런 기록을 떼어오길 요구했다.

다음 날 시키는 대로 떼어가니 그는 한참을 그 기록을 들여다보더니 화를 냈다.

인생이란 열이 있으면 낙 또한 있어야 할텐데, 내 인생에는 그저 들끓는 열뿐이라나. 무슨 소린지 모르겠지만 그는 내게 특히나 신경써주었다.

이런저런 인생의 즐거움을 알려주려 했고, 어느 정도는 편하게 가는 길을 일러주려고 했다.

내가 짊어지고 있던 아빠의 빚과 유산, 그리고 내 앞날에 대한 법적인 자문도 아끼지 않았다.

…뭐 거기에 충분히 믿어드리지 못했던 것은 아직도 못내 죄송하게 여기고 있다.

아빠 말고는 내게 그런 친절을 베풀어준 사람이 없었기에 전혀 신용하지 못했던 것이니 이해는 해 주시리라 믿고.

사실 그래서 더욱더, 오히려 더 돈에 집착했었다. 언제 내 뒤통수를 칠지 모른다고 생각했으니까.

단맛 쓴맛 짠맛 매운맛 안 가리고 한 푼이라도 더 긁을 수 있는 일이라면 물불 안 가리고 달려들었고, 시간과 돈이 아까워 몸을 전혀 생각하지 않은 식사와 수면.

어떻게 몸이 버텼는지 모를 일이다. 악이라는 건 정말 있다고, 지금 생각해보면 그럴 수밖에 없었지.

대학 2학년. 한결 줄어든 아빠의 빚.

그 마지막으로 남은 잔금을 입금한 그 순간, 뭔가가 내 안에서 탁 풀렸다.

몸을 옥죄고 있던 부담이 풀렸어야 했는데, 내 경우에는 부담이 아니라 맥이 풀렸던 것 같다.

주머니에 남아있는 돈으로 편의점에서 컵라면을 하나 샀다.

빚 제로에서 먹는 컵라면 맛이란. 다시는 먹을 수 없다 싶을 정도로, 동시에 다시는 먹고 싶지 않을 정도로 맛있었던 것 같다.

그도 그럴 게.

컵라면 국물까지 전부 다 마셔버리고 나, 바로 죽어버렸으니까.

내 몸은 진즉에 한계에 달해있었는데, 멍청하게 나만 몰랐던 거다. 말 그대로 악과 오기로 버틴 내 인생 22년, 전부 헛수고였다. 도로아미타불이었다.

그래서 내게 이런 스킬이 주어진 것은, 어쩌면 필연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모든 것이 흑백으로 딱 나눠진 그 여자와 만났을 때, 내가 요구한 것은 딱 하나였고

“이딴 거 말고다른 인생이라는 걸 한 번쯤 살아보고 싶어.”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의 삶.

조금쯤은 내 이름 그대로 장밋빛이 있는 삶을 살고 싶다고 생각했다.

내가 싫고 싫어서,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의 인생은 모두 반짝거리는 것 같아서.

내가 있는 곳이 싫고 싫어서, 여기가 아닌 다른 곳은 모두 행복이 넘치는 것만 같아서.

그 여자는 웃었었지.

“너, 좀 재밌네.”

재밋거리라곤 하나도 없는 내 지난 삶을 그 여자는 재밌다고 평했다.

그래서 그 여자가 싫었다. 전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천천히 눈을 떠서. 숨을 내쉬어서. 바닥을 손으로 짚어서, 콜록콜록… 마른기침을 했다.

좆같은 대우에는 이골이 나 있는 몸이야. 이 정도론 어림도 없다고.

…자, 다시 현실로 돌아와서.

이제 여기는 어디야. 또 이번엔 어떤 상황이 기다리는지 한 번 보자고. 아직 그 녀석이 나처럼 좆되지 않았기를 바라면서.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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