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커스텀 로즈-30화 (30/157)

〈 30화 〉 1 ­ 6 / 나 자신, 로즈에게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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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

내실로 안내된 뒤, 몸을 향긋하게 덥혀주는 재스민차가 사람 수대로 놓였다. 추기총경과 젊은 수도사, 그리고 루시탄과 로즈의 몫. 네 명분이었다.

루시탄은 잠시 기억을 맹렬하게 뒤지고 있는 내색을 하지 않기 위해 고군분투한 끝에 길게 나열되어있던 내빈의 이름 중 추기총경의 이름과 그 수행원인 젊은 수도사의 이름을 추려낼 수 있었다. 정말로 들키지 않았는지 어땠는지는 글쎄, 여신께서만이 아시겠지.

“이렇게 갑작스러운 방문에 환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베아트리체 예하. 그쪽 분은 멜키아데 주교님이셨죠.”

“여신의 품을 찾는 분들은 으레 갑작스러운 세속의 사정에 쫓기는 경우가 많으니 그에 대해서는 크게 괘념치 않으셔도 된답니다. 오늘은 무슨 일로 이렇게 어려운 발걸음을 주셨는지요, 루시타니아 왕자 전하?”

케루빔의 총장, 추기총경 베아트리체 발레리아… 추기총경의 중임을 맡기에는 지나치게 젊은 나이로 보이는 그녀는 온화하게 한 번 웃음을 낸 뒤 재스민차의 향기를 음미하며 우아한 동작으로 입에 머금었다.

…그녀 정도 되는 거물이 몸소 타국에까지 방문한 진의에 대해서는 짐작 가는 바가 전혀 없었지만,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일단 자신에게 닥친 일을 해결해야 하지 않나.

루시탄은 깍지낀 손을 아래로 내리고, 단도직입적으로 용건을 밝히기로 생각했다.

그의 눈이 옆자리에 앉은… 서두르느라 아직도 메이드 차림인 로즈를 향했다.

로즈는 어땠냐면, 이 상황에 제대로 제 판단이 서질 않는 모양이다. 당연했다.그녀는 추기총경이 누군지도 모를 테니까.

루시탄은 손을 뻗어 로즈의 손을 붙잡고는 추기총경의 단정한 얼굴을 바라보았다.

“예하께서는 이번에 율황청의 성가대를 친히 이끌고 오셨다고 들었습니다. 이 사람이 오늘 연회에 잠시 성가대와 함께 노래를 부를 수 있는 영광을 혹 얻을 수 없을지, 그것을 감히 여쭤보고자 결례를 무릅쓰고 찾아뵈었습니다.”

안경알 안쪽 베아트리체의 보라색 눈동자가 조금 흥미롭게 반짝였다.

온화한 미소에 조금 짓궂어 보이는 기색이 섞인 채 한 모금 더 차를 머금었고, 그녀의 옆에 앉은 수도사 멜키아데는 침묵을 지킨 채 세 사람의 안색을 조심스레, 무례하지 않을 정도로 건너보고 있었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그 이유를 여쭈어도 될는지요? 무엇보다도… 성가대와 함께 노래하실 만큼 수련이 된 분으로는 보이지 않습니다만.”

케루빔의 추기총경쯤 되고 보면 그런 것도 눈으로 보아 살필 수도 있는 것인가.

자, 이제 어떻게 대답하는 것이 최선인가… 루시탄의 머릿속이 한층 더 바쁘게 돌아갔다.

정면 돌파, 적진 우회… 어쩌면 추기총경은 이것을 율황청에 한번 줄을 대보려는 어설픈 수작쯤으로 생각할 수도 있었다.

그렇게 가정한다면 이것은 시험이다.

로즈는 잠시 눈을 3초 정도 감고 생각을 정리했다.

나서도 될 타이밍인지, 아닌지. 재스민차의 맛이나 향기도 모를 정도로 공기가 답답했다.

아니, 차 맛 정도는 생전에도 사실 모르고 살았긴 했는데. 믹스커피나 마셨으면 마셨지.

젊은 수도사, 멜키아데가 불쑥 말을 꺼냈다.

“일단 이 자매님께서 성가대와 함께 노래를 하실 만한 실력이 있는지를 검증하는 게 우선 아니겠습니까? 연회까지 남은 시간이 촉박하니 짧게 두어 소절만 하시지요.”

일어선 멜키아데는 기도실 한쪽에 놓인 오르간의 의자를 끌어당겼다.

루시탄은 조금 얼굴을 펴고 로즈를 올려다보고선 고개를 끄덕였고, 일이 좀 잘 풀리려는지 로즈도 천천히 일어나 어흠, 하고 한 번 목을 풀었다.

베아트리체의 눈썹이 어째서인지 살짝 치켜올라갔다.

연주되는 곡은 ‘태양성가’. 가장 유명하면서도 대중적으로 잘 알려진… 그리고 노래하는 이의 기량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제대로 부를 수 없는 곡이었다.

자신은 전혀 모르지만 로젤라이는 알고 있는 노래이고, 물론 로젤라이가 기량을 충분히 발휘하면… 어?

“…….”

“…….”

들어가는 박자를 놓쳤다. 음정도 가사도 언뜻언뜻 떠오르는 로젤라이의 기억을 더듬더듬 따라가려니 엉망.

애당초 무슨 노래인지도 모르니 당연하지. 성녀는 침묵하고 있고.

그 날, 로즈는 루시탄과 붉은 옷의 고위 사제가 지었던 표정을 절대 잊지 못할 것이다.

…아니, 이건 내 탓이 아니라, 로젤라이의 태업 때문에. 그러니까!

오르간의 연주가 도중에 뚝 끊겼다.

겉으로 드러내놓고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건반을 두드리던 멜키아데의 얼굴은… 무엇인가를 감추려 하는 무표정과 그 아래에서 들썩이는 약간의 경멸이 혼재되어있었다.

베아트리체는 명백하게 당혹한 얼굴로 한 모금 더, 재스민차를 삼켰다. 이제껏 노래 솜씨를 자랑하러 온 이는 있었어도… 이런 식의 파격적인 내방은 전혀 예상치도 못한 탓이다.

“……그만 돌아가주시겠습니까?”

생긋, 베아트리체가 완벽한 웃음을 지은 채 반론이 불가능한 축객령을 내렸다.

터덜터덜, 쫓겨난두 사람이 복도에 서서는 똑같이 한숨을 내쉬면서 어깨를 늘어뜨렸다. 루시탄이 이마를 짚었다가, 머리를 흐트러뜨리듯 북북 긁었다.

니이냐가 알면 가만히 있지 않을 텐데, 그거.

“대체어떻게 된 거야?”

루시탄치곤 꽤나 격앙되어 있었다. 평소처럼 에두르지 않고 바로 쏘아붙이듯이 말하는 걸 보면.

로즈라고 할 말이 없는 것은 또 아니었고.

“…로젤라이가 아직도 결정을 못 하고 있어서 그래. 당신 형과는 달리 지금 노래하려는 상대가… 알잖아.”

“하아….”

로젤라이의 기분은 십분 이해는 갔다. 이해를 못하면 안 되지, 그건.

죽은 이로서, 형에게 접촉한 것도 그녀에게는 나름대로 여신의, 혹은 그녀가 믿는 다른 신의 가르침에 잠시 눈감는 행위였을지도 모른다.

게다가 이번에는 자신의 죽음에 직접적으로 연관된 사람을 위해 노래해야 한다니. 성녀라고 너무 일을 쉽게 생각한 게 아닐까. 루시탄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다른 방법을 찾아볼 수밖에 없겠어.”

“…어떤 방법?”

“그걸 지금부터 생각해야 하는데… 빌어먹을, 시간이 없어.”

연회 개시 시각은 이제 코앞이었다. 다른 수를 모색하고, 실행하기에는 시간이 압도적으로 부족했다.

게다가 별관 밖에서 니이냐가 눈을 부릅뜨고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시선에 등이 따가울 정도다.

하릴없이 일단 니이냐가 무시무시한 무표정으로 기다리는 별관 밖으로 향하면서, 루시탄의 안색이 눈에 띄게 초췌해졌다.

큰일이다. 무슨 수를 생각해도 신통하지 않아. 대체 어떻게 하면 이 연회를 무사히 넘길 수 있지? 차라리 째고 도망을 쳐?

머리가 어질어질한 가운데 헝클어뜨린 머리를 정돈하기 위해 이동하면서도 전혀, 전혀 신통한 생각은 들지 않았다.

“…로즈 양도 연회에 참석하실 예정이신지요?”

“네? 어, 나는….”

노골적으로 말하진 않았지만, 니이냐의 의도는 간단히 읽혔다. 애초에 그런 눈으로 보면 모를 수가 없겠다.

‘너 같은 걸리버 매춘부가 감히 왕자 전하의 탄신 연회에 참석하겠다고 할 정도로 낯짝이 두껍진 않겠지?’라고 말하는 눈이었다.

…처음에는 별 생각이 없었지만, 대놓고 그런 식으로 나오면 오기가 나서라도 반항해주고 싶은 게 생겨먹은 성격이 아니던가.

“참석하죠. 옷이나 좀 내주세요.”

…이번엔 루시탄이 미간을 찌푸렸다. 아무것도 모르는 백지상태로 사교회에 참석했다가는 무슨 망신과 창피를 당할지 전혀 알 수 없다. 그녀를 위해서라면 탄신 연회에는 나가지 않는 편이 좋을 텐데.

자기가 꺼낸 말이라서 쉽게 거둬들이지도 못하고 니이냐는 눈을 가늘게 뜬 채 로즈를 바라본 뒤, 결국 별 수 없이 시녀들에게 로즈의 의상과 화장, 그리고 이런저런 밑준비를 ‘철저하게’ 시킬 것을 지시했다.

로즈는 바로 옆 방으로, 시녀들에게 붙들려 끌려가면서 홧김에 내뱉은 말의 셈을 조금 가혹하게 치르게 될 것이다….

…예상한 대로, 그리고 자연스럽게도, 곧 옆방에서 악악거리는 비명이들려왔다.

몸단장에 익숙할 것이라고 생각했겠지만 일개 시골 마을의 창관과 궁의 몸단장은 그 격이 다르다고.

추기총경의 앞에서 망신당한 것의 그다지 온당하지 못한 분풀이로는 나름대로 그럴듯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루시탄은 지금 누가 누굴 비웃는 거냐며 속으로 투덜거렸다.

“왕자 전하.”

로즈의 비명이 잦아들 즈음, 흐트러진 머리 모양을 손수 매만지면서 니이냐가 운을 띄웠다. 음, 하고 대충 대답하니 니이냐의 입에서 의외의 말이 튀어나왔다.

“그만 결심을 굳히시는 게 어떠실까 생각합니다. 왕자 전하께서 한동안 분주하게 이런저런 시도로 이 상황을 벗어나려 하신 것은 알고 있습니다만. 이제 왕자 전하의 등극은 피할 수 없는 수순이 된 것이 아닌지요?”

루시탄의 입 안에 쇠맛이 느껴졌다.

제멋대로, 모를 소리를 지껄이기 시작하는 제 전속 시녀의 얼굴을 거울을 통해 들여다보면서 루시탄은 그녀의 입가에 살짝, 아주 살짝, 보일듯말 듯 희미하게 조소가 서린 것을 보았다.

하, 이제야 알겠다. 어째서 그 모든 상황이 누군가가 들여다본 체스판처럼 흘러갔는지.

니이냐도, 거울을 통해 왕자의 얼굴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왕자의 얼굴이 살짝 굳어지는 것을, 즐기기라도 하듯이.

“…뒤에 있었던 것은 너냐, 니이냐.”

왕자는 물었다. 모든 것의 뒤에 있던 자가 그녀였을 줄은.

그다지 보고 싶지 않은 편린. 자신에게 충성을 다한다고 말하는 이들이 쓴, ‘충성’의 다른 면모. 그것을 오롯이 이해하기엔, 왕자는 아직도 소년이었다.

니이냐는 천천히, 손으로 왕자의 눈을 가렸다. 눈앞이 캄캄해져간다. 어째서인지, 몸도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는 가운데… 으스스한 무력감이 목을 빳빳하게 했다.

“그 여자를 어쨌…”

왕자의 말은 끝맺어지지 못하고.

눈앞이 새카만 심연으로 떨어져갔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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