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커스텀 로즈-29화 (29/157)

〈 29화 〉 1 ­ 6 / 나 자신, 로즈에게 (1)

* * *

6 / 나 자신, 로즈에게

­ 1 ­

그 날은 둘째 왕자의 18번째 탄신 연회가 왕궁에서 열리는 날이었다.

소식이 빠른 호사가들 사이에서는 오늘 열리는 연회에서 왕위의 향배가 결정되는 발표가 있을 것이라는 소문이 한발 먼저 돌기도 했다.

요 몇 년 사이 한 시도 심기가 불편하지 않았던 적이 없는 국왕의 눈에 왕세자는 더는 왕재로 보이지 않게 되었다던가, 혹은 밖으로만 나다니는 둘째 왕자에게 왕위를 물려줄 결심을 굳혔다든가 하는 그런 소문들이.

그래서인지 오늘의 연회는 일개 왕자의 탄신 축하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성대했다.

참가하는 면면 중에는 왕도 함부로 할 수 없는 대영주도 있었고, 타국의 사절단 중에는 대륙 신앙의 본산인 율황청(???)에서 온 이들까지도 있었다.

하나같이 신실한 얼굴을 한 사제들은 성가대까지 대동한 채로 국왕을 알현해 둘째 왕자의 축원을 비는 말을 나눴다더랬지.

그리고 당연히 연회의 주인공인 둘째 왕자는 시녀장 니이냐를 비롯한 시녀들에게 둘러싸인 채 진이 빠지고 있었고.

니이냐는 기합이 잔뜩 들어가선 안경을 번뜩이면서 시녀들을 마구 다그쳤다. 둘째 왕자의 머리 모양을 내는 것, 몸에 걸치는 옷매무새와 장신구, 몸에 뿌리는 향수 등등.

물론 니이냐의 기합의 대상으로는 왕자 본인도 결코 예외가 될 수는 없었다.

걸음걸이와 목소리, 웃음, 내빈의 이름과 신상명세를 기억하는지를 꼼꼼히 캐물었고, 결국 오케이가 떨어지고 나서는 거의 진이 빠질 지경이 되어버렸다….

형은 매번 행사 때마다 이 고초를 겪고 거기에 익숙해져버리고 만 것인가.

동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이 되는대로 제멋대로 사는 동안 형은 제 눈이 닿지 않는 곳에서 고충을 겪고 있었다고 생각하면…

그리고 운이 나쁘면 자신도 그렇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눈앞이 컴컴해지지 않을 수 없다. 아니, 불길한 생각은 금물이다.

오늘 연회만아버지의 장난에 놀아나 줄 생각이었다.

그 녀석이 잘 해낼 것이라고 생각했으니까.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다 했고, 자신이 해 줄 수 있는 것은 다 해 주었다. 이제 결과는여신만이 알겠지.

의자에 잠시 늘어져있으려니전혀 예상하지 못하는 곳에서 노크소리가 콩콩, 들렸다.

잠시만이라도 좋으니 아무도 들이지 말라고 했는데, 하고 부아가 치밀어오른 것도 잠시, 루시탄은 하나밖에 없는 출입구의 문에서 노크소리가 난 게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고개를 창가로 돌렸다.

눈 하나와 마주쳤다. 얼굴은 조금 달라져 있었지만그 자신만만하면서도 어딘지 비틀린 듯한 꼬인 성격을 그대로 보여주는 웃음을 입가에 보인 채녀석이 있었다.

“고생하고 있네. 왕자 나리.”

“피차 말이지.”

조금 쓴웃음을 흘리며 창가로 다가가 문을 열어주고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일전에 로즈와 같이 왕도에 왔던 안경을 쓴 마법사가창문 아래에서 지팡이를 높이 겨누고 있었다. 여긴 2층이다.부유 마법은 필수였을 것이다.

“슬슬 떠 있는 게 무서워지려고 하는데, 들어가도 되겠지?”

“나중에 저 마법사에게는 따로 인사라도 전해야겠군.”

키득거리곤 열린 창문 틈으로 날쌔게 몸을 밀어넣어 방에 들어온 로즈는 탁탁탁, 어디서 구했는지 모를 메이드복의 스커트에 붙은 풀쪼가리를 털어내면서 휴우,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내미는 물도 한 모금 마시고.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너희 형은 이제 고자가 아니야.”

“고자….”

피식, 그 말이 그렇게 우스웠는지 루시탄은 순간적으로 웃음을 터뜨렸다가 계속 듣겠다는 듯 표정을 바로 했고, 로즈는 루시탄이 웃음을 그치길 잠시 기다렸다가 팔짱을 낀 채로 눈을 감은 채 이야기를 이어갔다.

“다행히도 로젤라이에게 저주를 풀 방법이 있었어. 그리고 어젯밤에는 일단 술라 씨에게 부탁해서 둘을 어떻게 만나게 해 줬는데….”

어흠, 하고 로즈는 조금 볼을 붉힌 채 조금 샐쭉한, 그리고는 장난기가 조금 뒤엉킨 미묘한 표정으로 루시탄을 바라보았다.

“…그 뒷얘기도 마저 해 줘? 꼬맹이.”

“됐거든. 치녀.”

루시탄도 입가를 일그러뜨리고 달갑지 않다는 듯 웃음짓고는, 그러면서도 뭔가 켕겼는지 타는 속을 물 한 잔으로 달랬다.

의자의 팔걸이를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리면서 눈을 반쯤 내리깔곤 이제 다음 단계, 가장 중요한 클라이맥스를 어떻게 연출할 것인가를 바쁘게 생각하고 있었다.

“형이 나은 것은 다행한 일이지만 그것만으론 부족해. 아버지를… 납득하게 만들어야겠지.

형이 남자구실을 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아버지가 부정할 수 없게 해야 한다고. 그래야 날 왕세자로 밀어붙일 명분을 없앨 수 있어.”

“말은 쉽지만.”

어떻게? 로즈는 어깨를 으쓱였고, 잠시 침묵을 지키며 루시탄은 바쁘게 눈을 양옆으로 이리 굴렸다가저리 굴리기를 몇 번쯤 반복했다.

이것이 그 나름의… 깊이 생각했을 때의 버릇인 모양이었다.

이윽고 자리를 털고 일어나면서 마법 시계의 시각을 확인한 그는 손을 뻗어 로즈의 손을 잡아끌었다.

“시간은 아슬아슬할 것 같군. 방법은 짜낼 수 있을 것 같긴 한데. 일단… 한 가지 확인. 형에게 쓴 방법, 지금도 쓸 수 있는 건가?”

잡힌 손목을 한번 힐끔 내려다본 로즈는, 조금 입술을 깨문 채 침묵을 지키다가… 위아래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됐다고, 자신만만하게 웃곤 문을 나서자 밖에서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던 시녀들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무도 들지 않은 방 안에서 왕자와 함께 갑자기 나타난 메이드의 정체에 대해 놀라는 것에 앞서…

“전하! 어디를 가시는지요! 곧 연회가 시작됩니다!”

놀라 째지듯한 니이냐의 목소리가 뒤따랐다.

그 말에 대꾸조차 해 주지 않고 루시탄이 내친걸음으로 향한 곳은 각국의 내빈들이 연회에 앞서 머무르는 왕궁의 별관이었다.

당연히 별관에 함부로 들어갈 수 없는 시녀들이 입구에서 우왕좌왕하는 사이 루시탄은 거침없이 별관에 발을 들였다.

“야, 잠…! 이렇게 우격다짐으로 밀어붙이는 거, 네 방식 아니지 않았어?!”

“수가부족하면 우격다짐이든 뭐든 해야지!”

갑작스러운 연회 주역의 방문에 별궁의 로비를 돌아다니던 내빈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사전에 인사를 다닌다는 이야기는 듣지도 못했고, 게다가… 웬 메이드를 직접 손으로 잡아끌고 온단 말인가.

나이가 지긋한 사절의 경우에는 조금 눈을 찌푸리기도 했고, 젊은 축에 드는 이들은 의외의 사태에 흥미로운 기색을 보이기도 했다.

서두르는 루시탄의 발걸음이 멈춰선 곳은 여신을 신봉하는 종교의 본산인 율황청에서 온 내빈들이 머무르는 객실 앞이었다.

휴우, 숨을 내쉬며 조금 달아오른 호흡을 정돈한 루시탄은 눈을 감은 채 뭔가를 생각하더니 로즈를 잡아끌던 손을 놓고는 똑똑, 조심스레 문을 두드렸다.

“네, 누구신지요?”

“여신께 감사와 기도를. 저는 알트슈타인 왕국 제 2왕자 루시타니아 알트슈타인입니다.

잠시 율황청에서 오신 내빈분들에게 말씀드리고픈 일이 있어서 결례를 무릅쓰고 찾아뵈었습니다. 시간을 내주실 수 있으실런지요?”

…이 녀석도 이렇게 정중하고 그럴듯한 말씨를 쓸 수 있었구나.

로즈는 약간 놀란 토끼눈을 동그랗게 뜨면서 열리지 않은 문 앞에서 흠잡을 데 없는 정숙한 말씨로 말하는 루시탄을 조금 달리 바라보았다.

아주 잠깐 뜸을 들였던 문이 천천히 열리면서, 엄숙한 복장의 수도녀들과 나이든 수도사가 바라보고 있는 조용한 실내가 드러났다.

“여신께서는 늘 굽어보시니 모든 이의 손에 의심 없이 열쇠를 건네시도다…. 물론입니다. 들어오시지요.”

“감사합니다.”

루시탄은 살짝 고개를 숙였고, 로즈도 허둥지둥 고개를 숙였다.

조금 나이를 먹은 수도녀가 두 사람에게 자리를 권했다.

왕자와 그 메이드가 갑작스레 율황청의 숙소에 방문한 것이 궁금할 법도 했건만, 그들은 여신의 신실한 신도답게 당장은 아무것도 물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젊은 수도사가 옅은 포도주와 빵을 내오면서 온화하게 웃음지었다. 그의 검소한 수도복 가슴에는 ‘아기 천사와 책’ 문장이 있었는데, 이는 그들이 율황청의 모든 학술부문을 담당하는 기관인 ‘율학성성(????)’, 다른 이름으로는 ‘케루빔(Cherubim)’ 소속이라는 뜻이었다.

케루빔이라.루시탄은 약간의 위화감을 느꼈다.

이런 외국과의 관계에 대한 성무는 케루빔이 아니라 ‘율령성성(????)’, 즉 ‘오파님(Ophanim)’의 업무였을텐데.

무슨 사정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의도치 않게 엿보게 된 율황청의 속사정, 그 편린에 대해서도 머리에 넣어둔 루시탄은 잠시 이 사절단을 인솔하는 고위 사제가 나오길 기다렸다.

수도사는 온화하게 웃으며, 도중에 기도를 마칠 수 없는 점을 이해해달라 청했다.

그들이 내어준 빵을 한 덩이 먹어갈 즈음, 한쪽에 마련된 기도실의 문이 열리고 누군가가 걸어나왔다.

검은색을 기조로 한 다른 사제들의 복장과는 달리, 선명한 붉은색의 사제복 자락이 걸음마다 흔들리는 것이 보였다.

율황청이 이제껏 흘려온, 그리고 앞으로도 흘리게 될 피를 상징하는 그 붉은색은 인솔자를 그저 주교나 대주교 정도로 예상하고 있던 루시탄의 예상을 한참 빗나간 것이었다.

짧게 손톱을 정돈한굳은살이 박인 손은 기도서를 들고, 다른 손은 얼굴에 비해 커다란 안경을 코 위로 밀어 올렸다.

손님의 존재를 뒤늦게 눈치채고는, 붉은 사제복을 입은 이가 민망한 듯 웃음지으며 다가왔다.

“이건… 아하하.의외의 손님께서… 찾아주셨네요.”

“…‘추기총경’ 예하께서 직접 오셨을 줄은 몰랐습니다.”

루시탄은 한쪽 무릎을 꿇고 앉고는 ‘그녀’의 손등에 가볍게 입술을 맞추며 올려다보았다.

의외의 거물이었다.

율황청의 ‘힘’을 상징하는 ‘율법성성(???)’ 세라핌(Seraphim),

그리고 ‘수완’을 담당하는 ‘율령성성(????)’ 오파님(Ophanim)과 함께

‘지식’을 담당하는 ‘율학성성(????)’ '케루빔(Cherubim)'의 최종 책임자.

율황의 바로 아래에 위치하는 세 명의 ‘추기총경’ 중 한 명.

루시탄은 바짝 긴장했다.

상황은 생각보다 알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가려 하고 있었다.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