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화 〉 1 5 / 그리고 그 노래를 사랑한 남자 미하도르에게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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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동생, 루시탄의 생일은 내일이었던가.
한 달의 일정을 잡아 왕국의 각 영지를 돌아보는 순행(?行)이 거의 마무리되었다.
그 마지막 일정은, 바로내일… 자신의동생 루시타니아 알브레히트 알트슈타인 팔케, 제 2왕자의 생일 연회의 시작에 맞춰 왕궁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오늘 밤은 왕도 근교의 블라우로제 별궁에 머무는 것으로 일정을 잡아두었고, 아마 내일의 그 행차가… 자신이 왕세자로서 맞이하는 마지막 일정이 될 것이라, 미하도르는 그렇게 여기고 있었다.
내일. 내일이면 자신은 왕세자가 아닌 일개 왕족이 되는 것이다. 신기할 정도로, 아무런 감개도 들지 않았다.
다만, 루시탄. 동생의 일은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루시타니아 알브레히트 알트슈타인 팔케.
녀석의 이름은 오래된 말로 ‘샛별이 떠오르는 곳’이라는 뜻이었고, 자신의 이름 ‘미하도르’는 ‘여신에게 가장 사랑받는 아이’라는 뜻이라고 했지.
'여신에게 가장 사랑받는 아이'라…. 그 이름과 자신은 크게 연이 없는 것이 분명하다.
여신은커녕 아버지에게조차 온전히 사랑받을 수 없었고, 자신을 사랑해주었던 그녀마저 이제 이 세상 사람이 아니지 않은가.
나이 차이가 나는 동생에게 살갑게 정을 줄 기회가 적었던 것이 못내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루시탄 녀석은 융통성 없는 자신과는 다르게 약삭빠르고 영리하니 왕세자가 되고 왕이 되어도 좋은 왕세자, 나아가 좋은 왕이 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아주 조금은 마음의 짐을 덜 수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한결 편해져서, 별궁 안으로 통하는 문을 손수 열고 그 안으로 들어섰다.
여전히 벽에는 로젤라이의 초상화가 생전의 모습 그대로, 자신을 내려다보며 미소하고 있었다.
이 별궁에서 그녀가 죽음을 맞이하던 날의 일은 눈꺼풀 안쪽에 새겨진 채 아직도 밤마다 선명하게 기억난다.
눈을 감을 때마다 입과 가슴팍에서 피를 흘리면서, 발코니에서 미끄러져 떨어지는 그녀의 모습이 생생했건만.
그리고 그 날 이후로, 자신은그 어떤 여자도 품지 못하는 몸이 되었다. 아무리 미인이어도, 그 누가 유혹해도, 몸과 마음은 혼이 떠난 것처럼 반응하지 않았지.
그럼에도, 로젤라이에 대한 원망의 마음은 털끝만큼도 들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를 한번만 더 만날 수 있다면 그녀에게 온 마음을 다해 사죄하겠노라고, 그런 때를 놓친 헛된 다짐만이 머릿속에서 고장난 메트로놈처럼 반복되고 있었다.
그녀의 한 조각 목소리만이라도.
그녀의 한 마디 전언만이라도.
혹여 들을 수 있기를…
오로지 그것만을 바라면서 마법사와 마녀들을 찾아가는 일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 중 그 누구도 로젤라이의 영혼을 자신의 앞에 불러들일 수 있는 자는 없었다.
죽은 이를 부르는 삿된 술수에는 혼을 맡기지 않을 성녀의 고결한 혼이기 때문에?
아니면, 걸리버인 그녀의 혼을 불러낼 방법을, 마법사들이 알지 못하여서?
혹은… 자신의 사과를 받을 유예조차 남기지 못하고, 여신의 부름에 응해 이미 그녀는 영혼조차 이 세상에 남기지 않은 것이 아닐까.
그런 생각에까지 미치고 나면, 사무치는 가슴의 고통을 참아내기가 참으로 힘이 들었다.
남자로서의 구실을 할 수 없게 된 굴욕과 수치보다도, 그쪽이 더 쓰라렸다.
미래의 왕도, 왕세자도, 이제는 당당하게 내가 사내이노라 말할 수 없게 된 자신의 지금 처지는…
마음을 다해 사랑했다고 생각한 여인 한 명조차 지킬 수 없었던 용렬한 자신에 대한 여신의 형벌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쓴웃음을 참아낼 길이 없었다.
이 얼마나 지독한 골계(?)란 말이던가.
만약,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왕세자의 자리를 동생에게 넘겨준 다음, 자신은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여신을 섬기는 사제가 되어, 율황청에 귀의하는 것도 가히 나쁘지는 않을 것이었다.
평생을 여신에게, 동시에그녀에게 속죄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도…이번 순행 내내 생각하던 길이었다.
다만 그렇기에.
한 번만이라도 로젤라이를 다시 볼 수 있기를 바랐다.
아버지가 루시탄에게 내린 블라우로제 별궁에 들른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 어디보다도 이 별궁에 그녀의 자취가 많이 남아있었으니까.
뜰에 화사하고 피어있던 꽃들도 그녀가 손수 돌보고 피워낸 것들이었다. 빈말로도 꽃을 돌보는 데 능하다고 할 수 없었던 로젤라이는 첫 꽃을 피우는 것에도 버거워했었지.
하지만 노래와 노력을 다하여 온 뜰에 꽃을 피워내고, 자신을 향해 웃었었다.
…지금은 그때보다도 더 화사하게 꽃들이 색색으로 피어났지만, 그 아름다움에 오히려 로젤라이의 흔적이 점점 밀려나는 것 같아고소(??)를 금치 못하고 만 것이다.
창문 너머로 뜰이 보이는 복도를 지나, 그녀가 죽음을 맞았던 응접실로 통하는 계단. 희미하게, 목소리 같은 게 들려와서 귀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동시에, 전부 식어버렸다고 여겼던 노기가 뻐근하게 뒷목을 타고 머리를 덥혔다.
자신이 아직 왕세자일진대 누가 감히 왕세자의 추억을 더럽히려 이 별궁에 숨어들었는가.
오늘 밤은 그 누구도 이 별궁에 들이지 말라고, 마지막으로 한자락 남은 알량한왕세자의 권위를 빌어 마지막으로 그렇게 명해두었건만.
그 때문에 부리는 이들도, 지키는위병도 오늘 밤만은 한 명도 이 곳에 없을 터였다.
허리춤에 찬 군도를 뽑아 쥐고는 서둘러 계단을 올랐다.
언젠가의 기시감이 칼끝에 서늘한 예기(??)가 되어 기분나쁘게 달라붙어 팔에까지 옮겨붙는 것 같았다.
오면서 들은 말로는, 로젤라이를 살해한 장본인 발스턴은 그제부터 그 행방을 알 수 없게 되었다는 말을 들었다.
그에게 복수할 수가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그와 결투를 벌여 검을 겨룬 끝에 로젤라이의 원수를 갚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건만.
하지만그것은 동시에 아버지의 위엄에 금을 내는 일이었다.
한때 아버지가 증오스러웠고 원망스러웠지만, 동시에 아버지가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이유에 대해서도 지금의 자신은 알고 말았다.
그것을 입 밖으로 내지 않기로 맹세한 이상동생인 루시탄마저 그것을 알게 해서는 안 되었다.
아버지와 로젤라이. 나아가 그 뒤에 있었던 일.
그것은 이 나라의 왕가에 얽힌 더러운 추문과도 얽혀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설령 그렇다 할지라도, 이것만은 다른 이야기였다.
다른 누군가가 로젤라이의 안식을 흙발로 방해하는 것은 있을 수 없었다.
자, 모독자여. 너를 보낸 자는 누구냐. 성녀의 죽음 뒤에도 안심하지 못하는 아버지더냐. 눈썹을 격노로 일그러뜨리며,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창문을 열고 있었는지, 불어온 바람에 부드럽게 길고 탐스러운 금발이 나부꼈다.
푸르른, 새벽처럼 푸르른 드레스는 그의 눈에 익은 것이었다. 문을 여는 소리를 들었는지, 뒤돌아보는 얼굴.
시선과 시선이 맞닿았다.
똑같은 푸른색이었건만, 한쪽은 자수정같은 옅은 보랏빛이 섞인 눈동자요, 한쪽은 고요하게 가라앉은 호수처럼 맑은 푸른색이었다.
아아, 그토록 보고 싶었던 얼굴이다.
그토록, 찾아 헤매었던 얼굴이다.
손에서 미끄러지려는 군도를 바투 움켜쥐고, 얼굴이 그리움과 노기 사이에서 일그러졌다.
…이런 적이 없었던 것이 아니었다. 자신을 유혹하기 위해, 로젤라이를 참칭한 마법사들은 이미 많이 보았었다.
그러나… 그런 마법사들이 지긋지긋하여 항상 목에 걸고 떼어놓지 않고 있던 마석 목걸이가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아무리 미약한 반응이라도 마법을 감지하는 즉시 붉게 물들며 빛나는 돌은, 지금은 어떠한 반응도 보이지 않고 있었다.
즉, 저 여자는… 마법사가 변신한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단순히 닮은 여자가 우연히 이 별궁에 발을 들인 것인가? 오히려 머릿속이 혼란스러워가는 가운데, 돌아본 여자는 무척이나 그리움이 들게 하는 웃음을 입가에 띠었다.
입술이 천천히 벌어졌다.
미칠 듯이 그리워했던 노래가, 이 공간에 부드러운 파문이 되어 퍼져나가고 있었다. 미하도르의 목에 걸린 마석 목걸이가 맑은 푸른빛을 내는 것조차, 미처 보지 못한 채로.
「아침이여, 부디 발소리를 잠재우며 오기를. 사랑하는 이가 쉬이 눈뜨지 않도록
오늘 밤 편안히 고요함에 기대어 당신이 그리운 꿈에 머무를 수 있기를.
나의 이여. 밤이 지나 밝아오는 새벽을 아쉬워하지 말아요.
푸르른 뜰에, 당신의 머리맡에 당신이 피운 장미는 여기 이렇게 피어있으니…」
철그렁…
손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칼끝이 바닥을 향하고, 그 바닥에 미끄러지는 것을 남자, 미하도르는 느끼지 못했다.
그 노래는 어린아이를 어르는 어머니가 흔히 부르는 자장가를 조금 로젤라이가 손댄 것이었다. 자신과 사랑을 나누고 나서, 그녀가 불러주곤 하는… 작은 추억 속의 노래였다.
“…미하도르. 당신을 만나고 싶었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었다.
끌어안고, 끌어안겼다. 서로의 등에 팔을 보듬어, 오래 참았던 숨이 트인 듯이 흐느꼈다.
서로의 이름, 서로의 시간을 그리워한 밤이 얼마나 오래, 얼마나 숱하게 지나갔던가.
이것이 혹 여신이 주신 마지막 유예라도 좋다.
혹은, 자신의 무의식에 그녀가 남긴 마지막 손톱자국이라도 좋다.
그는 그녀를 만났다.
그녀는 그를 만났다.
지금 이 순간만이 그토록 필요했던 한 명의 남자와 한 명의 여자.
그들을 위해 준비된 밤이 비록 아무리 짧게, 덧없이 지나간다고 할지라도.
연인들은 지금 그 자리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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