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커스텀 로즈-27화 (27/157)

〈 27화 〉 1 ­ 5 / 그리고 그 노래를 사랑한 남자 미하도르에게 (6)

* * *

­ 6 ­

잠시 그 자리에 못박힌 듯 서 있었다.

생각해보면 전혀 새삼스러울 일도 아닌데….

그 녀석과는 이미 섹스까지 한 마당에 이제와서 그냥… 키스도 아닌 입맞춤에 왜 그렇게 동요했는지 모르겠다.

정신을 차려보면 기사 셋에게 붙들려 나간 녀석을 쫓아 복도에 서 있었고.

…그보다 그 녀석이 뭐라고 했더라. 아, 뭔가 중요한 얘기가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괜히 놀라서 뭔 얘길 했는지도 전혀 모르겠다고! 머리를 감싸 쥐곤 자괴감에 억눌려 주저앉았다.

침착해, 윤장미.

딱히 첫 키스도 아니고… 첫 키스는 지금은 죽은 마담이 가져갔지만.

그 녀석한테 홀랑 반해버린 것도 아니야. 재수없는 꼬맹이한테 한 방 먹은 것으로 생각하라고.

후우, 후우, 후우… 숨을 깊게 세 번 내쉬고, 좋아! 라고 외치며 양 뺨이 얼얼해지도록 한 대 짜악, 양손으로 때린 뒤 일어서자, 뭔가 한심해하는 표정을 짓는 적갈색 눈동자의 여자와 마주쳤다….

얼굴이 확, 수치감에 달아올랐다. 어디부터 보고 있던 거지?!쯧쯧, 하고 그 여자의 입에서 혀차는 소리가 들렸다.

“…뭐가 그렇게 좋아?”

어이없음이 뚝뚝 묻어나는 말투.

키르케는 한심하다는 기색을 전혀 숨기지 않는 얼굴로 일어서는 날 바라보면서 위아래로 날 훑어보았다.

그런 눈으로 보지 마, 멀쩡하다고!

“아니, 그나저나 당신… 아직도 여기 있었어?”

“잊은 모양인데 나도 다쳤거든. 그 하프엘프에게 신세지느라 머무르고 있었을 뿐야. 슬슬 당주한테 보고해야 해서 가 봐야 한다고.”

생각해보면 키르케도 발스턴에게 팔을 깊이 베여 다쳤었지.

그래서인지 혈색이 조금 나빴지만 베인 팔은 치유마법이 잘 들은 모양인지 멀쩡하게, 지금은 얇은 팔에칼자국도 남지 않았다.

그보다, 뭐라고?

“하프엘프라니, 누가?”

“…누구냐니. 너랑 같이 레짐에서 온 그 안경잽이를 말하는 건데. 설마 몰랐어?”

더더욱 한심해하는 표정이 이마 아래에서 짙어졌다. 아니, 나로서는 금시초문인데.

진짜냐, 하고 키르케는 투덜거렸다.

페리링이 하프엘프인지 아닌지, 알 도리가 있을 리가 없다는 게 그렇게 이상했나?

끙, 하고 키르케는 이마를 짚었다. 마치 1+1이 2가 되는 이유를 설명해달라는 요청을 받은 수학 교수마냥.

“그런 머리색은 엘프 혈통에서밖에 안 나온다고. 이상하다고 느낀 적도 없어? 정말?”

“…그렇게 물으면 네 머리카락 색도 만만치 않은데.”

짙은 적포도주색의 머리카락을 가진 키르케도 남 말 할 처지는 아니지 않나.

사실 따지고 보면 이 세상에 와서 온갖 총천연색 머리카락을 다 보고 있었으니, 물색 머리카락도 당연히 평범…하진 않더라도인제 와서 인종을 머리카락 색으로 구별하라는 얘길 들으면 황당하지 않을 수밖에 없다.

흐으응, 하고 뭔가를 즐거운 듯이 뜸들이는 키르케가 싱글싱글, 입가에 짓궂게밖에 보이지 않는 웃음을 띄웠다.

“사실 하프엘프 말고 다른 쪽에도 재미난 뒷이야기가 있는데… 아, 이건 나중에나 혹시 기회 되면 그때나 말해줘야겠다.”

넌 사람을 제일 열받게 하는 게 말하다가 마는 거란 것도 모르냐.

사납게 눈을 치뜨고 험악하게 표정을 일그러뜨리자 키르케는 혀를 내밀었다가 다시 쏙 집어넣었다. 우와 얄미워!

“…그래서, 용건이 뭔데? 나 놀리러 온 거야?”

“푸…. 내가 그렇게 한가해 보였어? 나도 왕자한테 부탁을 받고 온 거라고.”

키르케는 조금 눈을 굴려 주변을 살폈다.

흠, 하고 여전히 저쪽에서 들려오는 왁자한 소리에 눈썹을 조금 찌푸리더니, 자신이 나왔던 방으로 발을 옮겼다.

…나도 어째 다시 들어가야 할 것 같은 기분이긴 한데.

하릴없이 다시 여관방으로 들어오자 키르케는 지팡이를 공중에 띄우곤 빛무리가 어른거리는 손을 모아 수인(手?)을 맺었다.

이건 또… 페리링과는 다른 방식의 마법인 모양이다.

옅게 빛나는 지팡이에 겹쳐지도록 몇 종류의 손동작을 겹쳐 세우고, 돌리고, 포개면서 낮게 어우르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여인의 목소리가 참으로 아득하여 Η φων τη γυνακα εναι πολ μακρι]

[장막 너머에는 닿지 않으니 Δεν μπορετε να ακοσετε πνω απ το ππλο.]

[그 누구도 감히 엿듣지 못하리 Κανε δεν ακοει]

대강 전해져오는 말만 들으면, 지난번 술라가 걸었던 주문과 같은 방음 주문이었던 모양이다.

술라는 이런 복잡한 주문 같은 걸 외지 않아서 간단한 줄 알았는데.

“그야 그 영감은… 궁중 대마법사니까 그 정도야 손쉬운 게 당연하잖아.”

어째 뭔가 미묘하게 얼버무리는 것 같았는데. 분해하는 것 같기도 하고.

주문을 끝맺고 나선 내려오는 지팡이를 붙잡고 키르케가 툴툴거렸다. 그나저나 대체 무슨 비밀 얘기를 하려고 이렇게 수고를 들이나?

“왕자가 널 도와달라고 했어. 그 왕자가 나한테 말야. 날 괴앵장히 껄끄럽게 생각하는 왕자가 빚을 지는 것을 각오하고 나한테 널 부탁했단 말이지. 그 의미를 잘 알겠어?”

“…당신도 루시탄이 바라는 게 뭔지는 알고 있지?”

뭐, 그렇지.키르케는 천천히 긍정하면서, 조금 재미없다는 표정으로 날 바라보았다가 다시 고개를 돌려 방 한구석에 시선을 두었다. 왜, 개미라도 지나갔어?

“물론 기왕 빚을 지워놓는다면 상대가 차기 왕인 게 훨씬 낫긴 하지. 하지만 차기 왕이 될 생각이 전혀 없는 왕자님이랑 거래를 틀려면 그래도 널 돕는 게 낫다고 판단했어.”

“말이 통해서 다행이네.”

만약 루시탄이 억지로라도 왕위에 오른다면 그 날로 키르케가 속해있다는… 음, 흑마법 학회와는 관계가 서먹해질 것이다. 본인이 그렇게 껄끄러워하거니와.

“말해두는데, 마녀는 절대로 손해 보는 장사는 안 해. 그것만은 분명히 알아두라구. 왕자는 알고 있지만, 넌 어째 내가 선의나 우의로 움직일지도 모른다고 착각할 것 같아서 말해주는 거야.”

“그런 생각 같은 건 요만큼도 안 했는데?”

영차, 하고 키르케는 일어서선 지팡이를 어깨에 짊어매고는 입꼬리를 끌어올려 피식, 어딘지사람 열받게 하는 웃음을 지었다.

“너부터가 사람에 관한 호의로 움직이고 있잖아? 그런 녀석들은 다른 사람도 호의나 의리를 그렇게 중시해줄 거라고 무의식적으로 생각한다고. 걸리버들 중에는 그런 녀석들이 의외로 많아. 너도 조심해. 처음이자 마지막 충고야.”

“네네, 충고는 고맙게 받겠어. 어차피 빚은 루시탄이 갚을 테니 나랑은 상관없지만.”

아니 그것보다.허투루 들을 수 없는 말이 지나갔는데?

호의가 뭐가 어쨌다고?

“뭐야. 왕자랑 너, 그렇고 그런 사이 아니었어?”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야. 전혀 아닌데.”

“귀신 씨나… 뭐라고? 아닌데 뭔 그렇게 키스 한 번에 넋을 놓고 주저앉아?”

보고 있었어?!

어, 어, 어… 키스 아니었다고! 그게 아니고, 그건 놀랐을 뿐이야!

그렇게 허둥지둥 반론하자 키르케는 전혀 귀담아듣는 기색이 아니었다.

기분 나쁘게 피식피식 웃어대는 게진짜, 마녀라더니 딱 그쪽이잖아!

어흠, 하고 헛기침을 해서 이 화제에서 얼른 탈출을 시도하기로 했다.

“그런 거 아냐. 난 그런 꼬맹이는 취향 아니라고. 뭐 아무튼. 일단은 당면한 일부터 해결해야지. 내일이 녀석의 생일인데. 뭔가 오늘 밤 안에 결판을 내야 하잖아.”

“침착해.”

누구 때문에 당황했는데?!

씩씩거리자 키르케가 지팡이 머리로 통, 하고 내 머리를 가볍게 때렸다…

조금 부아가 치밀었지만, 침착해야 한다는 건 동의했으므로 휴우… 깊게 한숨을 내쉬어 잡생각을 떨쳐냈다.자아, 평상심. 평상심.

천천히 하나하나 되짚어가면서, 어떻게 일을 풀어갈지를 생각해야 한다. 일단 내가 할 수 있는 일부터.

“성녀를 다시 네 몸에 불러들인단 말이지. 그리고 첫째 왕자와 접촉한다는 거고. 그럼 내가 널 도울 일은 뭐야?”

턱을 손으로 감싸고 조금 생각했다. 석연찮은 점이 있었다.

루시탄의 말을 하나하나 되짚어보면… 여기는 루시탄이 가진 안전가옥이다. 녀석이 자신 있게 말할 정도로 비밀스러운 은신처일 것이다.

하지만 왕이 보냈다는 기사가 그 안전가옥에 들이닥쳐 루시탄을 잡아갔다. 왕은 어떻게 이 장소의 존재를 알 수 있었을까?

한 명의 얼굴이 떠올랐고, 키르케를 바라보았다.

“네가 좀 감시해줘야 할 사람이 한 명 있어.”

자신이 생각하는 그 사람이 연결고리라면, 몇 가지의 의문은 어느정도 해소된다.

발스턴은 어떻게 자신이 장서관에 숨어들었다는 사실을 알아냈고,

‘매의 기사’는 어떻게 루시탄의 은신처를 급습할 수 있었고,

무엇보다, 왕은 어떻게 루시탄의 일거수일투족을 파악할 수 있었는가?

그런 수수께끼가 성립할 수 있도록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은… 자신이 아는 이 중에서는 단 한 명뿐이다.

그 사람의 이름을 키르케의 귀에 속삭이자 키르케는 놀라 눈을 치떴다가,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가, 이내 수긍이 가는 얼굴을 했다.

“…알았어. 일단 믿기 어렵지만, 확실히 그 사람이 아니고서는 설명이 어렵네.”

으으으, 하고 키르케는 눈썹을 찌푸리고는, 별안간 따악 하고 이번엔 힘을 실어서 지팡이 머리로 내 머리를 때렸다.

“아얏, 뭐, 뭔데?!”

“그런 건 혼자서만 끙끙대지 말고, 주변이랑 좀 얘기를 하라고!”

윽 하고 아픈 소리를 내며 머리를 감싸니 부아가 치민다는 양 윽박지르고는 그 지팡이로 벽을 콩콩콩, 두드렸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너도 믿을 수 없었단 말야.

입술을 댓 발은 내미는 것을 봤는지 못 봤는지.

“어차피 듣고 계시는 거 다 아는데 말이죠? 그 나이에 슬슬 걸즈 토크 엿듣기는 그만하시는 게 어때요? 술라 님!”

…아무 대답도 없다. 키르케는 열 받았는지, 이번엔 구둣발을 들어 쾅쾅쾅, 벽을 두들겨댔다.

루시탄이 봤더라면 자기 재산에 무슨 짓이냐고 따졌을 텐데.

“아, 못 들은 척하지 마시라고요! 저, 얘한테 전부 말해버립니다? 사실은 술라 님이…!”

스르륵, 유령처럼 벽을 통과해오는 늙은 마법사. 우아악!

…아무래도 이건 역시 심장에 안 좋아. 자기도 모르게 반대쪽 벽에 달라붙어선 헉헉, 놀란 숨을 내쉬자 술라는 겸연쩍은 얼굴을 했다.

“발톱의 마녀 키르케여, 요즈음의 마녀들은 도통 예의범절도 없다는 말인가? 헤카이트는 도대체 후학을 어떻게 훈육하는지 모르겠군. …그래, 용건이 뭔가?”

“얘 좀 도와주셔야겠는데요.”

솔직히 말하자면 키르케의 말씨가 조금… 민구스럽다.

자신을 보는 것 같아서. 딴청을 피우기로 했지만, 늙은 마법사의 흐린 눈이 이쪽을 향해서, 마냥 모르는 척 하긴 불가능했다.

어쩌다가 이런 이상한 마법사들하고만 엮여서 이렇게 상대하게 된 거야?

“…원하는 게 무엇인가. 걸리버여.”

“일단… 첫째. 혹시 첫째 왕자님이 어디에 계신지 아실 수 있는지요?”

술라가 기이할 정도로 길게 자라난 한쪽 눈썹을 미세하게 꿈틀거렸다.

나무뿌리같은 수염이 짙고, 눈썹 아래 눈이 너무 가늘어서 대체 무슨 감정을 느끼고 있는지 파악하기가 너무 어렵다!

이게 그건가? 친구의 친구를, 소개해줘야 할 친구 없이 만나서 곤혹스러운 그 상황.

“둘째는… 가능하면 오늘 밤 그 왕자님이 있는 곳에 절 데려다주셨으면 하는 것이고요.”

“어느 쪽도 크게어려운 일은 아니네.”

술라는 단박에 말했고, 키르케는 어쩐지 윽, 하고 조금 질투가 부글거리는 눈으로 늙은 대마법사를 바라보았다.

…얘는 왜 이런 반응이야?

술라는 길게 자라난 수염을 쓰다듬으면서 윤곽만 보이는 눈동자를 움직여 나를 바라보았다.

“그럼 계획을 들어보기로 할까. 걸리버여.”

술라가 수염을 살짝 들썩이면서 느긋하게 말했다. 지금 이 영감님, 웃은 건가?

아니, 그나저나 아직은 생각이 다 정리되질 않아서… 곤혹스러운 기색을 보이니 술라의 눈이 문득 부드러웠다.

"발톱의 마녀가 말했지 않은가. 이런 일은 혼자 고뇌하지 말고 주변과 상의하라고 말일세."

할 말 없게 하는 영감님이네.

키르케도, 고개를 살짝 끄덕이면서 동의를 표했다.

아직 정리되지는 않았지만, 키르케도 바싹 다가와 물러서지 않을 기세라서 지금 이런 상황에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실, 아직 잘 될지 어떨지조차 알 수 없는 계획인데. 휴우, 한숨짓고는 눈을 감고 아주 잠시 생각을 정리한 뒤, 입을 열었다.

“그럼 일단은…”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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