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화 〉 1 5 / 그리고 그 노래를 사랑한 남자 미하도르에게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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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일단은 루시탄의 아버지인 울자크왕이 노래하는 성녀 로젤라이를 죽여야만 했던 동기에 관한 이야기는 멈추기로 했다.
지금까지 모인 것은 추측뿐이고, 심증뿐이고, 지금으로선 판단할 수 있는 재료로서는 너무 부족했으니까.
그보다는, 이제는 피할 수도 없는 코앞에 닥쳐온 당면한 문제 쪽이 훨씬 급했다.
이대로 시간만 죽이고 있다가는 내일이라는 루시탄의 생일은 본인에게는 인생 중 가장 가혹한 생일이 될 것이 뻔했다.
본인은 달관한 건지, 의자에 앉은 채 다리를 꼬면서 차를 한 잔 마시는 여유를 보였다.
…진심인 건지, 아니면 그렇게 보이고 싶은 것인지는 판단하기 어려웠다.
“그러니까, 네 추측으로는 형이 불능이 된 이유는 결국 로젤라이의 주문에 당해서… 인 것 같단 말인가? 그, 스킬과 마법을 동시에 사용해서 쓴다는 그것 말야.”
“아직은 가설이야. 조금 불경한 말일지도 모르지만… 로젤라이의 스킬에는 왕도 동시에 당했었어.”
“형에 이어 아버지까지 불능이 되셨다고? …자식으로선 정말 못 들을 말인데.”
“난 본 대로 말해주는 거야.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네 마음이지.”
루시안의 표정이 한층 복잡하게 일그러졌다.
그가 비록 지금은 아버지의 결정에 대서는 입장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하여 아버지를 진심으로 미워할 리는 없었으니까.
다만 본래는 형의 자리를 차지하기를 원치 않았기에 시작한 일이, 아버지와 나아가 왕실의 치부를 드러내는 일로 번져가는 것이 마음 불편할 만했다.
휴우, 하고 루시탄은 고심 어린 한숨을 지었다.
“그거, 하아… 해제할 방법은 있는 건가?”
“…있다고 생각해.”
뭐, 확신할 수는 없지만.
조금 시선을 피하면서 볼을 긁적이는 날 향해 가늘게 뜬 눈을 흘기면서 루시탄이 입술을 비죽거렸다.
녀석을 보다보니 이제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녀석은 이렇게 얼버무리는 말투를 썩 좋아하지 않았다.
돈을 다루는 녀석이다보니, 아무래도 그런 점이 상인기질이 물들게 된 것 같았다.
“…이유는?”
“로젤라이는 진심으로 당신 형을 사랑했으니까.”
그 점만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그녀를 제 몸에 받아들였을 때였다. 자신이 아닌누군가를 그렇게까지…죽어서까지 걱정할 수 있다는 데 놀랐었으니까.
사랑이라고 하지 않으면, 그 감정과 걱정을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니까 손쓸 수 없는 방법을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데 쉽게 쓰려 하진 않았을 거야. 설령 자기가… 죽을 지경이 몰린 상황이었다고 해도.”
“로맨티스트로군.”
성녀잖아.
그렇게 결론을 내며 어깨를 살짝 으쓱거리니 루시탄은 도리어 알쏭달쏭한 표정을 지으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니가 뭘 알겠니.홍차는 이미 다 마신 뒤로, 찻잔 바닥에는 찻잎 찌꺼기만 남아있었다.
어흠, 하고 헛기침하면서 일단 화제를 원래대로 되돌린다.
“…로젤라이에 대한 강령은 시도해볼 생각이야. 아니, 그게 아니면 당신 형을 원래대로 되돌릴 방법이 없어. 로젤라이도 아마 여기에 응해줄 거라 생각해. 하지만….”
조금 입술을 우물거렸다. 조금 말로 내기가 부담스러운 그 말을, 루시탄이 대신 눈치빠르게 받았다. 한숨과 함께.
“만약 아버지한테도 문제가 있다면, 로젤라이가 아버지까지 치유해줄지를 확신할 수 없어서 그렇지?”
…하여간 눈치 빠른 꼬맹이라니까.
아무튼 로젤라이에게 울자크 왕은 목숨을 빼앗으려 한 장본인이다.
그녀도 사람인 이상, 자신을 죽이려 했던울자크 왕이 만약 그렇게 되었다면… 복수라고 여기지 않을까?
자신은 그러한 경우 어떻게 할까. 문득 발스턴에게 베인 눈이 욱신거렸다. …솔직히 말하자면 자신이 없었다.
“…나는 조금 달리 생각하는데.”
루시탄이 조금 눈을 감고는 한숨 비슷한 것을 지었다. 그 자신도 아마 확신하지는 못하고 있을 텐데.
마치 오래 전의 기억을 더듬듯 눈꺼풀 아래에서 그 눈동자가 희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아마 지금 그는 자신이 모르는 로젤라이에 대한 기억을 훑고 있겠지.
…조금, 부럽다고 생각했다.
로젤라이의 옛날을 알고 있는 루시탄이.
아직도 그에게 아름다운 어린 날의 추억으로 오래도록 남아있을 로젤라이가.
“내가 기억하는 로젤라이는 전에도 말했지만 순수함과 선함으로 가득한 사람이었어. 그 사람이라면… 아버지를 용서해 줄 수 있을 정도로 강하다고. 적어도 나는 그렇게 믿고 싶어.”
자신도 녀석에게, 자신은 녀석을.
그렇게 기억하고 추억할 수 있을까.
“나는 로젤라이만큼 강하지 않아서. 발스턴은 절대로 용서 못 해.”
“그럼 나한테 화풀이라도 하고 싶단 건가?”
“못할 것 같아?”
각오를 다져야겠군, 하고 루시탄은 피식 웃곤 너스레를 떨었다.
이런 평소 같은 농담이 마음에 들었다. 이 녀석과 있으면, 나름대로 즐거웠다.
하지만 곧 그 즐거움도 끝이 날 것이고.
나는 나대로, 녀석은 녀석대로. 지금 길은 교차했다가, 멀어지면서.
아마 다시 만나는 일은 없을 것이라. 그런 생각이 막연하게 들었다.
그때.
쿵쿵쿵, 다급하게 문을 두들기는 소리에 루시탄은 눈을 조금 크게 치뜨고 몸을 일으켰다.
허리에 찬 군도(Sabre)의 자루를 쥐곤, 목소리를 낮췄다.
“…아무도 방해하지 말라고 했을 텐데.”
문이 벌커덕 하고 우악스럽게 열어젖혀졌다.
루시탄은 즉시, 망설임없이 칼을 뽑아 그 잘 벼려진 칼끝을 들어오는 침입자에게 겨누었다.
물론 들어오는 자를 죽일 생각은 없는 불경을 지적하고자 하는 몸놀림이었지만, 이어지는 침입자의 행동에 눈이 커졌다.
온몸을 판금 갑옷으로 빈틈없이 무장한 기사는 루시탄이 겨눈 검을 손등으로 탁 쳐내어 바닥으로 튕겨내고는 그대로 그 손을 내리며 머리를 숙였다.
땡그렁 하고 바닥을 구른 군도가 쇳소리를 낼 때조차,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루시탄은 바로 파악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다만, 그 푸른 눈동자는 주밀하게 움직여 방을 밀고 들어온 자의 정체를 파악하고 있었다.
기사의 흉갑에는 검은 바탕에 흰 매가 네 마리 그려진 문장이 붙어있었다.
문장의 가운데에 왕관을 쓴 매와 그 주위를 나란히 나는 세 마리 매.
자신은 의미를 모르는 도안이라도, 루시탄의 표정이 심각하게 굳어진 것을 보아서는 왕자인 그조차도 무시할 수 없는 자인 모양이다.
“…'매의 기사'가 이런 곳까지.아버지가 보내셨습니까? 고생하시는군요, 경.”
“네. 왕자 전하. 폐하께서 왕자 전하를 정중히 궁으로 모시라고 당부하셨습니다. …아마 내일 탄신 연회까지는 바깥 출입을 하실 수는 없을 것입니다.”
“친절하기도 하셔라. 아버지의 과보호에 경에게까지 수고를 끼치게 되었군요.”
"왕실의 안위와 위엄을 지키는 것. 그것이 소관의 일이 아니겠습니까. 필요하시다면 잠시… 친구분과 이야기를 마치실유예 정도는 제 재량으로 드릴 수 있습니다만."
"그럼 오래 걸리진 않을 테니 잠시만 부탁드리죠."
기사라는 인종에 대해 불신이 깊은 자신이었지만, 루시탄도 함부로 하지 못하는 자에게 따지고 들 배짱은 갖추지 못했다.
느껴지는 위압감은 발스턴과는 사뭇 다르게… 본인은 위압할 생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상대를 조용히 압도하는 그런 느낌이었다.
적어도 발스턴보다 위에 있는 자. '매의 기사'라…
궁중 대마법사의 직함을 갖고 있는 술라에게조차 그다지 정중하게 굴지 않던 녀석이. 그래도 용케 이죽거리는 걸 보면 천성은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루시탄이 고개를 돌려 이쪽을 돌아보았다.
“뭐, 그렇게 되었군. 아버지 눈에는 사고만 치고 다니는 아들이 별로 곱게 보이지 않은 모양이야.
미안해. 이후의 대응은 모두 너에게 떠넘기게 되었어. …내 억지에 따라주는 것, 네게 진심으로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
…새삼스럽게 말하지 않아도.
이제와서 도망치는 건 자신의 성미에도 맞지 않는다.
가능한 한 물고 늘어져서, 끝까지 물어뜯어 주겠다고.
그렇게 말해주자 루시탄도 조금 얼굴에서 힘을 빼고 편한 기색이었다.
“그럼모시겠습니다. 왕자 전하.”
“아, 경.잠시만 더 기다려주시겠습니까?”
나이 든 목소리의 기사 뒤로 서 있던 두 명의 기사가 다가오려 하자, 루시탄은 손을 들어 그들을 잠시 제지했다. 뭐야, 뭔가아직도 할 말이…
허리에 팔이 감겼다.
그리고 그 팔이 허리를 당겼다.
녀석의 얼굴이 가까워져서,
입술에…
“읍…?!”
뭐야 이 녀석, 지금 뭐 하는…
까끌까끌하고, 버석버석한, 그러면서도 조금 조그맣고, 단단한.
그런 감촉이 입술에 짓눌러, 번져서, 스며들어서,
갑작스레 하나밖에 남지 않은 눈이 화아악, 커졌다. 녀석의, 한 대 때려주고 싶은능글능글한 웃음이 아주 가까운 곳에 있는 눈에서도 히죽거렸다.
읍, 으읍, 읍…
어쩔 줄 모르는 손이 마디마디 꼬물거리고, 내가 얼어붙은 사이 녀석은 뻔뻔스럽게도 조금 더 깊게 입술을 눌렀다가, 천천히 떼어갔다.
방금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모르는 사이 문득 얼굴이 더웠다. 뜨거워졌다. 아, 아직도 감촉이 남아있는 것, 같…다.
시간으로 치자면 불과 몇 초 남짓이었을까. 그저 입술과 입술을 맞대었을 뿐인, 그런 애들 장난에 불과했는데. 그런데도.
‘뭐냐고, 이…’
개 좆 같은 기분은.
재밌어 죽겠다는 듯, 만족스럽다는 듯 들썩거리는 입술이 귀 가까이에 소리를 남겼다.
무엇인가 말을 남기긴 했는데, 그게 무슨 말이었는지… 머릿속이 실타래처럼 마구 엉켜서 제대로 듣질 못했다.
두 명의 기사가 루시탄의 양 팔을 붙들고 방을 나가면서, 자신은 아무 말도 못하고 얼어붙어있었다.
머릿속이 시간이 지나도 계속해서 마구잡이로 꼬여가는 가운데, 겨우겨우… 한 마디가, 입 밖으로 불쑥 뇌를 거치지 않고 튀어나와버렸다.
“…씨, 씨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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