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화 〉 1 5 / 그리고 그 노래를 사랑한 남자 미하도르에게 (4)
* * *
4
카테르네야. 이름 들었잖아.
당신이 먼저 나를 속였지. 빚을 받…
“아아, 악…!”
아주 옅게 꿈에 잠겼었다.
하지만 지난 밤이 남긴 그 마지막 목소리가 울린 순간, 잠은 순식간에 산산이 깨져 흩어졌다.
손을 들어 왼쪽 뺨을 더듬어보면… 뺨에서부터 눈을 덮도록 붕대가 감겨있었다.
간밤의 기억은 꿈이 아니라 돌이킬 수 없는 현실이라고, 붕대 아래에서 욱신거리는 고통이 말하고 있었다.
온몸은 식은땀으로 흠뻑 젖어있었다. 잠시 거칠게 학학거리고 숨을 내뱉다가… 아직 새벽도 되지 않은 아직 깊은 한밤이라는 것에 한숨지었다. 다시… 쉬이 잠을 청할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는데.
“로즈…”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목소리가 들렸다. 조금 고개를 돌려보니 눈밑이 빨갛게 부어오른 페리링이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미안해졌다. 나 때문에 깨버린 거네, 얘는.
페리링의 물색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살짝 웃음지었다.
“…미안, 페리링. 조금… 나쁜 꿈을 꿔서.”
페리링은 슬픈 듯이 쓰다듬는 손에 머리를 비비곤 아침 안개처럼 뿌옇게 습기를 띤 연보랏빛 눈동자에 나를 담았다. 입술을 조금 달싹거리다가, 고개를 푹 숙였다.
“마담이 죽… 그렇게 된 것은 절대로 로즈의 탓이 아니에요. 로즈, 그러니까 너무 마음에 담아두진 마세요. …아셨죠?”
“…응. 페리링. 난 괜찮아.”
솔직히 말하자면 지금의 자신이 괜찮은지는 잘 모르겠다.
아니… 애당초 이 상황까지 와서 괜찮다는 게 뭔지조차도 갈피를 못 잡을 지경인데.
하지만 페리링에게 걱정을 조금이라도 더 끼치는 쪽이 더더욱 싫었다. 그뿐이었다.
다시 눈을 감았지만, 쉽사리 잠이 올 것 같지가 않았다. 눈을 감으면 지난 밤의 기억이 눈꺼풀 안쪽에 달라붙어서 어른거린다.
잠에 빠지면 그 광경이 꿈결에까지 달라붙어 진득한 악몽으로 녹아내릴 것만 같은 불안감이 심장을 뻐근하도록 짓눌렀다.
“응… 정말 괜찮으니까, 옆방으로 가서 편하게 자. 페리링.”
“어떻게 그래요.”
페리링은 한숨 비슷한 것을 내쉬고는 조그마한 손을 뻗어 내 손을 붙잡고는 조금 눈을 내리깔았다.
…금새 눈물을 뚝뚝 떨어뜨릴 것 같은 얼굴이라, 그 때문에라도 잠을 이룰 수 있으려나 없으려나.
아무 생각 없이 그냥 쉬고 싶은 생각과, 다시 잠들기가 두려운 마음이 겹쳐져서 눈꺼풀이 바들거렸다.
“…로즈 씨. 제가 노래하는 성녀만큼은 아니지만…”
페리링이 내 손을 놓고는 그 손을 들어 가만히 내 눈 위에 얹었다.
살짝 바들거리는 손끝. 자기도 마담의 마지막을 그렇게 봐서 심적으로 힘들 텐데, 거기에 내 걱정까지 보태고 있는 꼴이라서 뭔가 가슴속에서 맺힌 감정이 울컥거릴 것 같았다.
사근사근, 아주 나지막한 페리링의 목소리가 방을 옅게 떠돌았다. 높낮이와 박자, 말소리가 서로 엮여 자아내는… 자장가였다.
그대 / 발소리를 잠재우며 오오 / 사랑스러운 이가 / 눈뜨지 않도록
오늘 밤은 편안히 / 고요함에 그리어 / 당신이 단꿈에 / 머무를 수 있기를
푸르른 뜰이여 / 당신의 머리맡에 / 장미 한 송이 / 이렇게 피었으니…
들어본 적 없는 낯선 언어가 귀보다 먼저 심장을 감싸 내려앉았다.
점점 옅게, 점점 깊이, 점점 스며들어, 점점 멀어져서…
그렇게 밤이 지나갔다.
다행히도 새벽녘까지 다시 눈 뜨는 일 없이.
오래 잔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푹 잔 뒤 일어난 몸은, 아직 우울함이 완전히 가시지 않은 정신과는 다르게 어느 정도 활력이 돌고 있었다.
언제까지 축 처져있는 것 또한 자신답지 않았고. …거울을 보았을 때는 역시, 조금은 우울해져버렸지만.
한숨짓고는 방에서 나왔을 때, 지금은 별로 마주하고 싶지 않았던 얼굴과 마주쳐야 했다.
루시탄은 벽에 기댄 채 눈을 감고 생각에 빠져있다가, 내가 나오자 이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의례적인 인사말을 나누는 것도 지금은 조금 어색한데 말야.
루시탄도 굳이 인사를 보태지는 않았다.
“…언제 일어날지 기다리고 있었는데, 생각보다 걱정이 덜 되는 얼굴을 하고 있는데. 너.”
“왕자 전하에게 심려를 끼친 점 송구합니다… 라는 말이라도 듣고 싶어?”
“설마.”
루시탄은 피식 웃고는 앞서 걸음을 옮겼고, 그 뒤를 천천히 뒤따랐다.
눈의 치료는 조금… 시간이 걸릴 것 같다고 했지만, 어깨를 후벼판 검상 쪽은 술라의 치유마법에 흔적도 없이 아물었다. 나중에 감사 인사라도 전해야겠다.
“미안하다.”
이쪽에 등을 돌린 그대로 앞서 걸으며, 루시탄의 뒷모습이 쓴 목소리로 그렇게 한 마디를 내놓았다.
조금 눈을… 그러니까, 하나 남은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 자신보다 조금 아래에 있는 머리를 내려다봤다.
“부하의 잘못은 주군이 갚아야 해. 발스턴 경의 행동을 충분히 경계하고 있다고 여겼는데, 역시 부족했어. 그가 그렇게 무모한 짓을 벌일 거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한 내 실책이었어. 미안해.”
“…뭐, 그 얘기는 됐고.”
절대로 발스턴은 용서할 수 없다. 하지만 이미 그렇게 끔찍한 죽음을 맞았지 않나.
마담을 죽인 것도, 내 눈 하나를 먹어치운 것도 지금은 업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자신에게 발스턴이라는 이름은 지워지지 않을 끔찍한 악몽으로 남겠지.
…설마, 용의 불길에 휩싸이고 넓은 바다에 빠졌는데 살아남았을 리도 없거니와.
“그보다 묻는 게 늦었는데. 여긴 어디야?”
일단 그 배에서 정신을 잃은 뒤 여기에 왔다. 어떻게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리고 마음이 번잡해서 여기가 어디인지도 미처 묻지도 못하고 있었고. 별궁도, 왕궁도 아니고 굳이 말하자면… 분위기는 레짐에 있던 창관과 비슷한 게 꼭 싸구려 여관이었다.
그리고 그 추측은 반쯤 맞았다.
“여긴 동항로 회사가 가진 여각(??)인데… 일종의 안전가옥이라고 해야겠군. 왕도에서 가장 안전한 은신처니 안심하고 일단 몸을 쉬어두라고.”
“왕자 전하 재산치곤 좀 수수한걸.”
“농이 나오는 걸 보면 더는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군.”
피식 웃음을 터뜨리고 나니 이제야 조금이나마 평상시로 돌아온 기분이었다.
하지만 마냥 서로 농이나 주고받고 노닥거리고 있기엔 시간이 촉박하잖아.
한숨쉬고는 앞서 걷는 루시탄의 옆으로 바삐 따라붙었다.
“어제 알아낸 게 있어. 그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고.”
“조용한 방으로 가자.”
조금 목소리를 낮춰서 말을 흘리자 루시탄이 눈을 가늘게 뜨고는 식당으로 향하는 복도에서 구석진 객실로 통하는 갈림길로 걸음을 옮겼다.
…혹시 누군가 혹시 따라오지 않는가 하고 눈을 가늘게 뜬 채 두리번거리면서 루시탄이 먼저 들어간 방에 따라들어가선 잠시 바깥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대낮부터 거나하게 취한 거한의 목소리와 난폭한 걸음걸이, 팔씨름이라도 하는지 왁자하게 떠드는 소리까지 어지럽게 들려왔다…
적어도 바깥에서 이쪽으로 향하는 발걸음이라든지 인기척은, 일단은 없는 것 같다.
조심스럽게 품 안에서 꾸깃꾸깃하게 구겨진 일기를 꺼내어 내밀자, 루시탄은 그것을 받아들고 책장을 펼쳐보더니 눈을 찌푸렸다.
“걸리버 문자인가? …아니, 분명 알고 있지만, 이 조합은내가 아는 조합과는 달라. 비슷하지만 달라서 쯧, 읽지 못하겠어.”
“…역시.”
로젤라이의 일기를 읽을 수 있는 것은 아마… 자신뿐인 것 같았다.
아니, 그것을 ‘읽는다’라고 말하기는 아무래도 미묘한 노릇이었지만, 마치 자신 같은 능력을 가진 자가 일기를 손에 넣을 것이라고 확신이라도 한 것 같지 않은가.
하지만 어떻게?
우연이라고 하기엔 너무 실낱같은 확률이 아닌가. 거기에 운명을 걸 멍청이는 없을 것이다.
그 악명 높은 랜덤박스도 이 정도는 아닐텐데.
이 일기에 걸린… 주문인지 스킬인지 모를 조치는 확실하게 자신의 스킬에 반응했었다.
루시탄에게는 그저 낯선 언어였을 따름이다. 자신에게 일어났던 현상의 편린도 관찰할 수 없다.
최악의 경우에는 독일어를 읽을 수 있는 걸리버가 읽기를 바라고 준비한 안배인가…?
그것도 너무 희박한 확률이라, 도박이라고도 말하기 어려울 정돈데.
눈을 감고 살짝 생각을 정리해보았다.
이 세상에 걸리버가 온다면 그들이 가장 보편적으로 사용할 언어는 무엇일까.
아무래도 영어겠지. 자신이 살던 세상에서 가장 보편적인 언어이니만큼 그 세상에서 올 내방자들도 영어를 사용할 수 있을 가능성이 컸다.
로젤라이는 그런데도 독일어로 기록을 남겼다.
독일인이라서? 개인적인 기록이기 때문에? 웃기지 마, 그럴 리가 없잖아.
이건 분명히 누군가가 읽을 것을 전제로 남긴 기록이다. 일기라기보단 유지(??)에 가깝다.
아무나 읽어서는 안 되는 기록.
특히 이 세계의 원주민들은 더더욱 읽기 어려워야만 하는 기록.
마법사의 존재로 인해 필연적으로 생겨나는, '다른 언어를 익힐 필요가 비교적 적다'는 의표를 찌른 행위.
그렇기에 독일어로 쓴 것은 아마도… 최소한의 보안장치일 것이다.
물론 독일어 또한 널리 퍼진 언어이니만큼 그것만으로는 완전한 방패막이가 될 수는 없을 테지만.
이는 동시에 이 일기를 읽어야 하는 자에게 필요한 안배이기도 했다.
정말로 불가해한 것은.
마치 이런 일이 있을 것이라고 미리 알고 있었다는 것처럼 지나치게 노린 듯한 안배였다는 것이다.
로젤라이는 내가 자신의 일기를 읽을 것을 알고 이러한 준비를 해 놓은 것이 아닐까 하는 자아도취적인 해석마저 가능할 정도로.
아, 정말. 진즉에 떠나버린 성녀가 원망스러울 정도다.
조금만 더 내 몸에 붙어있었더라면 이런저런 이야기를 캐물었을 텐데, 제 안에 말을 걸어봐도 아무 대답도 돌아오지 않는다.
하다못해 자신의 가설에 대해 대답이라도 한 마디 들을 수 있었으면.
만약 자신의 추측이 사실이라고 한다면.
그녀의 기억 속에서 왕이 로젤라이를 죽이려 했던 것인지, 아니…
왜 로젤라이를 죽여야만 했던 것인지까지도 아주 어렴풋하게나마 설명이 가능한데.
“…아무튼, 내가 알아낸 이야기 말인데.”
일단 자기 생각도 정리할 겸, 로젤라이의 일기에서 보았던 그녀의 기억을 천천히 되짚어갔다.
루시탄은 안색이 파리해져서는 손으로 입을 감싸고 듣고 있었다.
발스턴이 로젤라이를 살해할 때의 대목에 이르러서는 가볍게 욕지기까지 치민 모양인지 어깨를 바들거리기도 했고.
그러면서도 생각을 멈추지 않고, 내가 한 말 한마디 한마디에서 진상을 되짚어가느라 애쓰고 있는 게 조금 안쓰러울 정도로.
"로젤라이의 일기에서 알아낸 건 여기까지야."
"…믿기 어려운 이야기이긴 한데, 그 중에서도 가장 알 수 없는 게 있다."
내가 말을 끝맺고 나자루시탄은 미간을 깊게 찌푸린 뒤 잠시 생각에 잠겨있었다.
듣고 있기 끔찍한 기억이었고, 어쩌면 루시탄에게는 어릴 적의 추억을 흙발로 짓이기는 시간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고 순순히 진실에서 도망칠 만큼, 소년은 어리지 않았다.
숨쉬는 것조차 잊은 듯이 깊게 생각한 끝에, 결국 루시탄 또한 나와 똑같은 의문에 이윽고 도달했다.
울자크 왕은, 왜.
“아버지는 대체 왜 로젤라이를 죽여야만 했던 거지?”
「와이더닛Why done it」
즉,동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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