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화 〉 1 5 / 그리고 그 노래를 사랑한 남자 미하도르에게 (3)
* * *
3
“…카테르네. 배신했나.”
“당신이 먼저… 날 속였지. 빚을 받…”
드드드득…
칼날이 뼈를 긁는 소리를 내며 빠져나갔다.
칼날이 후벼판 자리에서 넘치는 핏덩어리가 가슴의 구멍에서 기력과 함께 뿜어져, 단검의 칼자루를 쥔 손에서도 천천히 힘과 생기가 뒤엉켜 빠져나갔다.
미끄러지는 몸뚱이는 제 몸에서 새어 나온 피웅덩이에 잠겨 자꾸만 차가워져갔다.
배에 꽂힌 단검 탓인지, 고통으로 파리해진 안색을 일그러뜨린 살해자는 더러운 오물이라도 밟은 것처럼 자기 몸뚱이에 박힌 단검을 뽑아 아무렇게나 내팽개쳤다.
피에 젖은 칼날이 갑판을 몇 번 튕기다가 어딘가에서 회전을 멈추고 잠잠해졌다.
“마, 담… 카테르네, 정신 차…”
한쪽 눈에서 피가, 다른 쪽에서는 까닭 모를 울음이 넘치면서 그녀의 몸을 흔들었지만, 손에 닿은 그녀의 살결은 이미 차갑게 식어 딱딱했다.
죽었다. 마담 윕이… 죽었다. 그 마담 윕이 이렇게 쉽게… 죽었다. 도무지실감이 나질 않았다.
툭 하고 제 목에서 끊긴 목줄이 떨어져서 그녀의 몸 위에 살포시 떨어졌다.
이를 으득 깨물고, 채 감지 못한 눈을 손으로 덮어 눈꺼풀을 감겨주었다.
그녀의 목숨이 다했다는 것을, 이제는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 세계에 와서 처음으로 손에 넣은 자유를, 지금의 자신은 순수하게기뻐할 수가 없었다….
“…조금 예정이 달라졌지만, 이걸로 일을 마칠 수 있겠군. 천한 계집.”
칼에 찔렸던 배를 막은 손에서 핏덩어리가 울컥, 넘쳐흐르는데도 발스턴은 마치 고통 따위는 느끼지 않는 것처럼 카테르네의 피에 젖은 대검을 움켜쥔 채 다가왔다.
지팡이를 잃은 키르케도 팔에서 피를 흘리며 저만치에서 학학거리고 있었다…
구해줄 사람 같은 건 없다면, 나는… 입술을 벌리고 숨을 들이마신다. 로젤라이가 아직 제 몸에 남아있다. 적어도, 한 번의 반항은…
“카학!”
검보다 먼저 발이 날아왔다.
퍼억, 하고 가슴을 강하게 후려치는 철퇴 같은 발길질에 빠직빠직, 갈비뼈가 마치 망치로 얻어맞은 것처럼 부러졌다.
의학에 대해 전혀 모르는 나라도 바로 알 수 있었다. 컥 하고 내뱉는 기침에 핏방울이 섞여서, 이어 비어져나오는 우웩 내뱉은 구토에까지 뒤엉켰다.
“나는 로젤라이가 그녀의 스킬과 마법을 동시에 쓰는 걸 내 눈으로 보았었다. 그런 어설픈 수작질이 내게 통할 줄 알았나.”
뱃속에서 부글거리는 고통을 토악질로 게워내는 바람에 몸을 앞으로 엎드린 탓에 마치 사형을 앞둔 사형수처럼 그의 앞에 목을 늘인 꼴이 되어버렸다.
하다못해 고통 없이 가게 해 주겠다며 대검을 내 머리 위로 치켜드는 기사의 아래에서, 그저 최후의 저항까지도 너무나 손쉽게 파훼된 것이 분해서 미칠 것만 같다.
“이것으로 왕자 전하께서 왕위를 받는 일의 마지막 걸림돌이 사라진다. 그분이야말로 왕재임은 너도 보았을 터. 그 전정에 거름이 되는 것이라 여기고 가라, 천한 걸리버 계집.”
칼날이, 내려온다. 죽음, 사신이 되어서.
이번에야말로 정말로…
[ 가지여 / 속박이 되어 / 저자를 / 붙잡아라 ]
[ géaga / slabhra / namhaid / urghabháil ]
이 목소리는!
나무로 된 판자에서 돌연 가지가 뻗쳐나왔다.
뻗어나온 가지가 이내 부드러운 덩굴로 웃자라서 발스턴의 다리를 붙들고 그대로 단단한 몸을 타고올라갔다.
발스턴의 눈이 커다랗게 뜨여, 지금의 상황을 바로 이해하지 못하고 주춤거렸다.
이를 으득 물며 좌우를 둘러보았지만, 적어도 배 위에는 그 마법을 부린 자가 없었다.
“…여자를 죽여라!”
처음으로 발스턴의 목소리에 초조함이 묻어났다.
목소리가 높이 울리자 우지끈하는 소리와 함께 아래층 선실에서 갑판을 뚫고 선실로 내려앉은 두 마리의… 트롤.
손에는 큼지막한 도끼를 쥐고, 걸음만으로 갑판을 짓부수며 사납게 달려오는 트롤이었으나,
푸화아악!
나와 트롤의 사이를 거대한 불의 벽이 훑고 지나갔다.
불길은 트롤을 용서 없이 집어삼켰고, 순식간에 화염에 휩싸인 트롤이 허우적거리면서 도끼를 놓친 채 뒤로 쓰러졌다.
자신조차,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아까의 그 목소리, 영창은 분명히.
“페리링…!”
페리링, 페리링이 와 주었어.
어떻게 알고, 여기에 와 준 걸까. 다 끝났다고, 죽음까지 각오했었는데.
[ 날개여 / 바람을 / 부르라 ]
[ sciathán / gaoth / ag glaoch ]
머리를 들었다. 이런 상황이었는데도, 눈을 뗄 수 없는 광경이 밤하늘에 있었다.
한쪽 눈으로밖에 볼 수 없다는 게 아쉬울 정도로.
아마 발스턴에게는 증오와 원한에 찬 저주스러운 광경이었겠지만.
그것은 잿빛 용이었다.
달빛을 머금은 거대한 날개가 밤하늘의 공기에 잔잔한 바람을 일으켰고, 그 바람을 타고 페리링이 내려오고 있었다.
잿빛 비늘이 온몸을 덮은 용은 늙은 눈을 황금색으로 빛내며 어린 마법사를 굽어보았고, 불길을 토해낸 뒤의 연기를 내뿜는 그 턱 아래에 수염 같은 뿔들이 나무뿌리처럼 돋아나 있었다.
“로즈 씨, 로즈 씨…!”
페리링의 뺨은 넘친 눈물에 젖었다. 낙하도 잊은 것처럼 내려와서는 내 뺨에 제 손을 댄 채 칼이 긁고 지나간 곳을 매만지면서 또 울었다.
바들거리는 팔을 뻗어, 그 조그만 등을 끌어안고는 제 쪽으로 당겼다.
“…페리링, 마담이… 카테르네 씨가…”
“네? 아, 아…”
그제야 페리링은 제 주변에 쓰러져있는 이가 ‘그녀’였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은 것 같았다.
자신에게는 은원의 대상이었지만… 페리링에게는 단순한 고용주였을 그녀의 죽음.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혼란스러운 모양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페리링은 그녀를 위해 울어줬다.
…자신은, 시원스레 그럴 수 없는데.
“네놈들은 왜 하나같이… 알지 못하는 거냐.”
발스턴은 이를 으득 물고, 푸르스름한 아우라 같은 것을 제 검에 둘렀다.
그것이 무엇인지 나는 전혀 알 수 없었지만, 흠칫 놀란 반응을 보인 페리링이 지팡이를 들고 발스턴을 노려보며 몸을 일으켰다.
…페리링은 전투마법사가 아니라 치유마법사. 어찌할 도리는 없을 텐데.
“이 나라를 위해서는 여자 하나에게 우왕좌왕하는 미하도르 같은 유약한 자가 아니라! 루시탄 전하와 같은… 수완을 가진 국왕이 왕위에 오르는 게 득이 될 거란 것을 왜 모르나!”
“그것이 자네의 동기였나, 발스턴 경.”
머리 위에서 목소리가 하나 더 내려왔다.
처음 듣는 노기를 띤 목소리. 날개로 돌풍을 일으켜 불을 날려버린 뒤 천천히 내려앉은 용의 머리에 선 소년은, 자신이 알지 못하는 감정이 없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용이 머리를 내리자, 소년은 타고 남은 갑판에 내려서는 서늘하게 가라앉은 눈으로 제 호위기사를 바라보았다.
발스턴은 침음하면서도, 루시탄의 시선을 피하려 하지 않았다. 아니, 피하려 하지 못했다고 하는 편이 더 맞을 것이다.
루시탄이 살짝 시선을 돌려서, 한쪽에 기대어 있는 키르케를 보았다.
“…키르케. 빚졌다.”
“변제를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왕자 전하. 새 지팡이 정도는 기대해도 되는 것이겠죠?”
후우, 하고 루시탄은 무거운 한숨을 내쉬고는 다시 자신을 배신한, 아니… 본인의 기준에서라면 어디까지나 충정을 바친 호위기사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감정을 싹 죽인 나지막한 목소리가 매끄럽게 새어나왔다.
“다 끝났다. 발스턴. 무기를 버려라.”
“…전하. 전하께서 내리시는 벌이라면, 무슨 벌을 내리시든 기꺼이 받겠습니다. 하오나…”
발스턴의 말끝에 불길한 울림이 서렸다. 꽉, 하고 칼자루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순간 발스턴의 다리가 옆 방향으로 돌았다. 즉, 자신과 페리링을 향해 몸을 돌린 뒤, 그 자리에서 기다랗게 푸른 아우라가 일렁이는 검을 휘두르려, 들어올렸다!
“…적어도, 그렇기에 여기에서 전하께 마지막 충정을 바치겠습니다!”
“술라!”
“스승님!”
루시탄과 페리링의 목소리가 겹쳤다.
그에 화답하듯 용의 턱이 벌어졌다.
용암처럼 들끓는 열기가 용의 뱃속에서 부글거리고, 공기가 빨려 들어간 뒤 목 안쪽에 겹겹이 돋아나 있는 뜨겁게 달아오른 비늘과 비늘 사이로 가연성 가스가 지나간다.
빨아들인 기류가 이윽고, 거대한 불덩어리로 화하여 되쏘아져나오는 드래곤 브레스. 발스턴의 등 뒤에서부터 배신자를 집어삼켰다.
페리링을 감싸고, 바닥에 쓰러뜨려 엎드렸다.
자신의 바로 앞에서, 지옥의 업화를 뒤집어쓰고 새카맣게 타들어가는 발스턴에게서 전혀 눈을 떼지 않은 채 가운뎃손가락을 들어보였다.
증오를 품은 채 날 바라보는 발스턴이 그 손짓의 의미를 알아챌 수 있을지는, 의문스럽긴 하지만…
이윽고 불길이 멎었고, 발스턴이 용의 숨결에 휩쓸려 물속으로 가라앉는 것까지 보고 나서야 용은 턱을 닫았다.
우악스럽게 돋아난 이빨 사이에서 연기가 모락모락 새어나오는 것이, 마지막으로 자신의 남은 눈 하나로 본 장면이었다.
불길에 휩싸인 발스턴의 눈과 마주쳤을 때.
그것이 결코 포기한 자의 눈이 아니었음을, 아직은 깨닫지 못한 채로.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