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화 〉 1 4 / 푸른 장미를 노래하던 성녀 로젤라이에게(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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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이 세계에는 운명을 관장하는 세 명의 여신이 있다고 합니다.
만약 정말로 이 세상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운명을 지켜보는 여신이 있다면
이 기록이 모쪼록 올바른 운명으로 이어질 수 있도록 굽어보아주소서.
저는 로젤라이. 노래하는 성녀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걸리버입니다.]
주위는 쥐죽은 듯이 고요했다.
사실 엄밀히 말하자면 ‘쥐죽은 듯이’라는 표현이 지금의 상황에 완전히 들어맞는 것은 아니었다.
묘하게 붉은 털을 가진 쥐가 조금 떨어진 한구석에서 던져준 흑빵 쪼가리를 허겁지겁 갉아대고 있었으니까.
한밤중이라는 것을 제하고 정확한 시간을 알 수는 없었지만, 아무튼 적어도 근처에서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는 것을 몇 번이고 확인한 끝에로젤라이의 일기를 조심스레 펼쳐보았다.
일기의 표지에 로젤라이의 이름이 알파벳으로 씌어있었을 때 약간 불안감을 느끼긴 했었지만…
아니나 다를까, 알파벳으로 쓰였다는 것을 빼면 생경한 조합의 문자가 나열되어있어 맥이 풀리려 했다.
…나중에 생각해보면 그건 독일어였던 것 같다. 씁. 어쩐지 이름부터 그쪽 냄새가 난다 했어.
하지만 다행히도 성녀 로젤라이는 자신의 일기를 누군가가 읽어야 하는 상황이 올 것이라 예상이라도 한 듯 안배를 준비해두었다.
첫 장을 펼치자마자 귀가 아닌 머릿속에 순수한 화음과 리듬이, 멜로디가 흘러들어왔다. 노래하듯이, 누군가가 머릿속에 노래를 속삭이듯이.
신비로운 감각이었다.
머릿속에 흘러들어오는 멜로디는 12년짜리 의무교육과정마냥 억지로 머릿속에 쑤셔박아대는 것이 아니고… 그저 순수하게 어떤 의사를 전하고자 하고 있었다.
무엇인가를 부드럽게 채근하는 느낌이 간질간질하다.
본능적으로 커스터마이징 스킬을 사용한 것은 아무래도 그래서였던 것 같다.
…화음이 한층 높아져 기뻐하는 듯한 울림을 띠었다. 아무래도 정답이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평소와는 조금… 달랐다.
“어라? 여기 어쩐지 낯이 익은데….”
다소 멍청한 중얼거림이 나온 이유는 일단 주위의 풍경이 평소와 달랐던 탓이다.
아무것도 없는 검기만 했던 공간. 보이지 않는 바닥에 서 있었던 여느 때와는 달리 바닥에 흐드러지게 꽃이 피어있었다.
아, 기억났다.
지난번 루시탄과 같이 갔었던 별궁의 화원에 피어있었던 그 꽃들이었어.
손을 내려 꽃을 만져보려 하니 손이 꽃을 지나쳐 통과했다.
…뭐라고 해야 하나. 마치 VR 같은 감각이다. 증강현실이라고도 하던가.
커스터마이징 스킬이 변화한 메커니즘을 당장 파악할 수는 없었지만, 아무튼 스킬의 활용처가 늘어날 가능성이 보인 건 썩 나쁜 일은 아니라고, 일단 좋게 생각하기로 했다.
주변에는 눈에 익은 하얀 담장도 보였다.
이전보다 조금 더 깨끗하게 손질된, 지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새 담장이었다.
“…어째 아침 드라마 같은 게 될 것 같네.”
그 말 그대로 머릿속이 수염이가 갖고 놀다가 꼬아버린 털실 뭉치처럼 복잡해졌다.
그렇다는 건 이 풍경은 아마도… 잇새에 신음이 새었다. 낯익은 금발 소년이 눈에 띄어서.
담장 정문 쪽에서 안뜰로 걸어오고 있던 것은 루시탄이었다.
나이는 지금보다 서너 살 정도 어릴 적의 모습인가. 지금도 소년티를 완전히 벗지는 못한…
까놓고 말해 건방진 꼬맹이지만 지금 보고 있는 모습에 비하자면 어른으로 쳐줘도 괜찮아 보일 정도.
자기보다 키가 머리 하나 정도 부족한 루시탄이 슥 하고 제 배를 지나쳐 통과하는 것을 보노라니 어쩐지 굉장히 부아가 치밀었지만, 당연히도 꼬맹이 루시탄은 이쪽에 대해서는 신경 쓰는 일 없이 별궁의 문을 열어젖히고 그 안으로 들어가 시야에서 사라졌다.
아무튼, 지금 것으로 어느 정도 짐작에 확신의 무게가 실리기 시작했다.
여기가 바로 노래하는 성녀 로젤라이의 기억 속 풍경이라고.
후우, 하고 숨을 한번 내쉰 다음, 꼬마 루시탄의 뒤를 쫓아 별궁 쪽으로 향했다.
그때와 마찬가지로 위병이 지키고 있었지만, 눈을 부릅뜨고 창을 든 위병 중 누구도 내게 반응하진 않았다…
뭐, 당연하다면 당연한가. 이제 슬슬 이 상황에 적응이 되는 중이었다.
굳게 닫혀 있는 문에 어깨를 들이받듯이 대어 보니 스르륵, 하고 몸이 문을 통과했다.
생긋 웃고 있는 거대한 초상화 속 여자는 지난번 별궁에 가서 보았을 때와 전혀 다를 게 없었고.
“대체 댁한테 무슨 마성의 매력이 있길래 죄다 당신한테 코가 꿰여서 이 난리인 거래?”
조금 퉁명스럽게 올려다봐도 여전히 초상화 속 로젤라이는 자애로운 웃음을 띤 그대로였다.
답답함을 토로해봐야 뭘 하겠냐고.
스스로도 뭐가 이렇게 답답한지 잘 모르겠는데 말야.
일단 초상화를 지나치기로 했다.
머릿속에 울리는 멜로디에 거스러미가 낀 것처럼 뭔가 채근해왔기 때문이다.
…남의 머리에 대고 노래로 잔소리하지 말아줄래, 성녀 씨. 어쩐지 당신 이미지와 좀 어긋나려고 하니까.
한숨짓고는, 초상화를 지나쳐 걸음을 옮겼다. 복도를 따라 죽 늘어선 미술품이나 그림을 보면 속물근성이 슬쩍 들끓으려 했다.
이거 하나 갖고 돌아갈 수 있다면 이 세계에서 돈 걱정은 안 해도 될 텐데.
황금으로 만든 태양의 여신상이 어쩐지 불경한 생각을 하는 날 노려보는 것 같아서, 그 여신상과 시선이 마주치지 않게 지나쳐 꺾어지는 복도를 지났다.
“…아항. 그러니까 저 사람이….”
이전에 지나가듯이 행차에서 보았던 얼굴이었다.
루시탄과 많이 닮은… 그러나 훨씬 성숙한 젊은 남자의 얼굴은 형제라는 것을 바로 알 수 있을 정도로 이목구비가 비슷했다.
이전에는 그다지 닮지 않았다고 생각했었는데, 그 때는 우울한 낯빛에 야위어서 그렇게 보인 걸까, 생각이 들 정도였다.
젊은 남자… 즉, 루시탄의 형인 왕세자는 분명 미하도르라는 이름이었지.
미하도르는 패기 있는 표정을 하고 있었고, 키는 훤칠하고 컸으며 자신감이 넘치는 걸음걸이로 뚜벅뚜벅, 복도를 걷고 있었다.
“우와 씨발….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저런 멀쩡한 사람이 그 꼬라지가 된 거래?”
루시탄의 일이고 자시고 이젠 궁금해서라도 전모를 알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침드라마를 이래서 보는구나, 하는 실없는 생각까지 떠오를 정도로.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해 과거의 미하도르의 뒤를 밟았다.
미하도르는 허리에 한 자루의 군도(Sabre)를 찬 그대로 지키는 이, 시중드는 이 하나 없이 계단을 올랐다.
고고한 자존감과 스스로를 강하게 신뢰하는 자신감, 미래가 보장된 오만함.
그 모든 것이 담긴 발걸음은 어딘가 들떠서는 재촉하듯이 계단을 올랐고, 복도를 걸어… 푸른 장미 모양으로 장식된 문 앞에 그 발걸음을 세웠다.
미하도르는 큰 소리로, 얼핏 들어도 애정이 넘쳐흐르는 목소리로 누군가를 부르며 문을 열어젖혔다.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말할 필요도 없었지. 로젤라이, 노래하는 성녀의 이름이었다. 침을 꼴깍 삼키며 그 등 너머로 머리를 내밀어 방 안의 광경을 건너보았는데…
“뭔…?!”
개 좆같은 개수작이야, 하는 말을 뱉을 정도로 상황이 여유롭지가 않았다.
아마 이것이 단순한 과거의 추체험이라는 것을 몰랐더라면, 자신은 이 상황에 무슨 행동을 보였을까.
루시탄, 미하도르와 같은 금발을 가진 중년의 남자. 그의 손이 무엇인가를 움켜쥐고 있었다.
출렁거리며 흔들리는 것은 풍성하게 자라난 성녀의 머리카락만이 아니었다.
드레스의 윗부분을 끌어내려 노출된 젖가슴이 애처롭게 흔들렸고, 남자의 팔을 붙잡은 여자의 손, 그 손톱이 소매를 파고들고 있었다.
그리고 중년 남자의 손이 핏줄이 팽팽하게 도드라질 정도로 쥐고 있는 것은… 노래가 아니라 꺽, 꺽 하는 신음이 바투 흘러내리는 여자의 가느다란 목이었다.
미하도르의 옆얼굴은 아주 잠시 황망한 기색이었다가, 손이 군도의 자루를 쥐었다.
머리가 생각이란 것을 하기도 전에 반사적으로 허리춤에서 뽑은 칼날이 새파랗게 빛났다.
왕세자는 여자의 목을 조르는 데 열중하여 텅 빈 등을 향해 몸을 날렸다.
칼날이 아니라, 칼자루의 무게추가 살인자의 목을 찍어내려 했지만, 그사이에 끼어든 제삼자가 왕세자의 칼을 튕겨냈다.
“씨발, 저 면상을 또 보고 싶지 않았는, 데…”
숨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거칠어졌다. 시야가 살짝 흐려졌다가, 머리를 흔들어 다시 힘을 주고 그 기억을 올려다보았다.
순간 허상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오싹할 정도로 온몸이 소름이 타고 흘렀다. 주먹을 꽉 쥐고 노려본 그 상대는… 아직 수염을 기르지 않은 발스턴이었다.
미하도르와 중년 남자가 동시에 노성을 터뜨렸고, 왕세자의 칼날과 기사의 칼날이 몇 번 불꽃을 튀기며 부딪혔다.
격정에 의지해 휘두르는 거친 검이 잠시 기세를 타고 상대를 몰아붙이는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아무런 동요도 하지 않고 왕세자의 검을 받아내고 있는 발스턴 쪽의 검술이 몇 단계 위에 있음이, 조금 떨어진 곳에서 보니 문외한의 눈으로도 확실했다.
초조하게, 중년 남성의 눈이 왕세자와 기사의 검투를 바라보던 중… 거의 숨이 넘어가기 직전이었던 성녀가 고개를 들었다.
찢긴 드레스 사이로 드러난 젖가슴이 부푸는 것처럼 보였고, 그녀의 존재를 확인한 것은 기사뿐이었다.
휘둘러지는 왕세자의 검을 크게 튕겨내며, 기사는 물러서는 것과 동시에 할딱거리던 숨 그대로 성녀의 입술이 크게 벌어졌다.
아아아아아…
아아아아아…
하나의 목에서 두 갈래의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분명 같은 사람의 목소리라는 것이었건만, 하나의 성대에서 동시에 뻗어나온 두 갈래의 목소리는 그 방향성이 완전히, 달랐다.
천상을 향해 솟구치는, 사랑과 생명, 광휘를 우러러 상처 입은 자를 보듬는 찬가와,
심연을 향해 파고드는, 증오와 죽음, 어둠을 머금고 상처 입은 자를 찌르는 비탄이,
한데 뒤엉키고, 들끓어,휘몰아쳤다.
귀를 막고 싶어지는 괴로움과 계속 듣고 싶어지는 황홀함 속에서, 그 멜로디가 엉망진창으로 변주되어 머리를 감싸쥐었다.
겨우겨우 뜨고 있는 눈에, 중년의 남자와 왕세자가 성녀의 노래가 만들어낸 충격파에 휩쓸려 벽에 부딪히는 것이 보였다.
콜록, 하고 작은 기침에 점점이 핏방울이 튀었다. 성녀는 겨우 정신을 차린 듯 노래를 멈추고 기침을 되풀이했다.
벽에 부딪힌 채 바들거리는 손을 뻗는 왕세자를 향해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얼굴로 웃음을 머금었다. 그녀가 잘 움직이지 않는 발을 겨우 내딛어 한 걸음 나아가는 순간…
“안… 돼!”
성녀의 연약한 가슴, 그 갈비뼈와 갈비뼈 사이를 정확하게 헤집어 살점을 파고들어 가는 날붙이가 있었다.
몸을 빼었던 기사가 무방비한 성녀의 품에 달라붙어 칼날을 박아넣은 순간, 성녀의 입술에서 핏덩어리와 함께 폐에 고였던 마지막 숨이 빠지는 소리가 새었다.
드드드득… 피에 젖은 칼날이 성녀의 몸에서 뽑혀나갔고, ‘노래하는 성녀’가 삶의 마지막에서 부르는 허무하게 할딱거리는 숨소리를 비웃듯 발스턴의 손이 그녀의 목을 붙잡아, 창가를 향해 내쳤다.
아아… 성녀의 몸이 발코니에서 떨어져, 져야 할 때를 맞이한 꽃처럼 떨어져 간다.
입가를 가린 손에, 이유도 모르게 물기가 스며드는 것을 느끼며 주저앉았다. 숨이 가빠왔다.
“하아, 하아, 하아….”
개같네, 진짜…
좆같은 것도 좆같은 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게 내 신조인데…
정돈되지 않은 호흡에 이어 욕지기가 일었다.
성녀의 기억이 거기까지인 듯 흐려져가는 주위 풍경 속에서, 그녀가 흘린 핏자국을 만져보려 손을 뻗었지만 당연하게도 그것은 짚이지 않았다.
우욱, 욱… 헛구역질이 위장에서 비어져 올라와 벌어진 입에서 침 몇 방울이 되어 숨결과 함께 새었다.
이런 거였냐고. 엇나간 충성심도 아니었고, 미래의 왕을 선택하고자 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그저 자신의 살인을, 죄를 영원히 묻어두기 위해서, 그걸 위해 루시탄을 자신의 공범으로 삼고자 했던 것이냐고. 그걸 위해 자신을 죽이려 했던 것이고.
피맛이 입안에 머금어지도록 입술을 깨물었다. 로젤라이처럼, 그렇게 순순히 죽어줄 줄 알아? 눈을 질끈 감고, 스멀스멀 퍼지려는 공포심을 억눌렀다. 하지만…
“…무서워.”
사실은 무서워.
스스로를 지킬 방법 같은 건 없어.
하다못해 자신에게 주어진 스킬이, 이런 것이 아니라 싸울 수 있는 능력이었다면. 이렇게 무서워하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강한 척 허세로 공포심에 눈을 돌리지 않고 맞설 수 있었다면 좋았을텐데.
로젤라이.
당신 또한 그런 공포심을 이겨내야만 했겠지?
상처를 치유하는 능력을 가졌다는 것은, 결국… 누구보다도 가까이, 자신과 다른 이의 상처를 바라보아야만 한다는 것이니까.
난… 난 할 수 없어.
상처를 낫게 하기는커녕, 나 자신도 지킬 수가 없는데 이제 어떻게 해야 한단 말야?
분하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감이 고개가 무거워 떨어졌다. 어깨가 무거워서, 바닥을 받치고 있는 팔이 버텨줄 수 없을 것만 같았다.
…멜로디가 흘러들어왔다.
머릿속으로 흘러드는, 자장가처럼 달래는 멜로디.
희미하게, 누군가의 체온이 어깨에 닿은 기분이 들었다.
“하, 하… 후후, 흐. 로젤라이. 그러네… 당신, 이렇게 될 거라고 믿고. 이 일기를 남긴 거였어. 너무, 딱 맞춘 것 같잖…아.”
운명이 짜맞춰졌다. 고리가 이어졌다.
그제야 겨우 숨이 나왔다. 머리에, 온몸에 아직 피가 돌고 있다. 그렇다면 아직은 자신에게도 할 수 있는 일이 있다고.
손을 들어 눈가를 비볐다. 뺨과 눈두덩에 번진 물기를 고집스레 닦아내고, 폐에 남아있는 눅눅한 공기를 토해냈다.
차가운 새 공기를 받아들이며 잠시 눈을 꽉 감고, 성녀의 기억이 남긴… 최후의 힌트를 몇 번이고 반추했다. 분명히… 그것은 자신에게도 가능했다. 가능해야만 했다.
자신이 가진 스킬, 커스터마이징.
아직까지 그 가능성을 깨닫지 못했던… 진정한 활용법.
“…고마워, 로젤라이. 당신한테 목숨 빚졌어. 언젠간 꼭 갚을게. 여기서 뒈져나가지만 않으면 꼭.”
걸리버인 자신이기에 가능한,
이 상황을 타개할 하나의 비책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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