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커스텀 로즈-19화 (19/157)

〈 19화 〉 1 ­ 4 / 푸른 장미를 노래하던 성녀 로젤라이에게(5)

* * *

­ 5 ­

정신이 든 것은 한참 전.

하지만 몸이 아주 조금씩이나마 움직여주기 시작한 것은 조금 전부터였다.

“읍, 끅…”

살결을 짓누르는 압박감에 온몸이 욱신거렸다.

인정사정 봐주지 않은 결박이 옷 위로 온몸을 꽉 조여와, 숨쉬기조차 버거울 정도로.

지금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눈을 가려놓았으니 당연하지.

다만 덜컹덜컹하고 바닥이 자꾸만 거칠게 흔들리고 있다는 것으로 이 좁아터진 어두운 곳이 달리는 마차 안이라는 것만 어렴풋이 짐작할 정도였다.

어차피 계속 정신을 잃고 있었으니 마차가 얼마나 달렸는지도 헤아릴 재간이 없었지만.

“후아, 읏… 으.”

덧붙여서 무슨 짐짝처럼 상자에 처넣어진 것 같고.

단단히 입을 막은 재갈 탓에 연신 입안에 고인 침이 밖으로 줄줄 새는 것을 삼킬 수도, 뱉을 수도, 닦을 수도 없다는 게 답답하다.

제일 답답한 것은, 자신을 어딘가로 데려가려 하는 이유조차 짐작할 길이 없다는 것.

머리를 쥐어짜 곰곰이 생각해본 끝에 그자가 이렇게 움직이는 이유에 대해서는 아주 어렴풋하게나마 짚이는 바가 있었지만…

만약 그 짐작이 맞다고 한다면 자신을 그 자리에서 죽이는 게 최선이었다.

이렇게 어딘가로 끌고 간다면 분명 어떤 이유가 있을 텐데.

‘그걸 전혀 모르겠단 말야….’

좁디좁은 상자에 다리까지 오므린 채 묶여있으니 답답함과 공포가 피부 위를 송충이처럼 스멀거리며 간지럽혔다.

기분 나쁘게 털이 잔뜩 돋아난 송충이가 살갗을 꾸물꾸물 기어가는 듯한 생리적인 혐오감에 몸이 부르르 떨렸다.

후우… 조금 거칠어진 숨을 코로 내쉬면서 살갗이 바들거린다.

그만큼 지나치게 꽉 묶어버린 매듭이 몸을 조금도 움직이지 못하게 만들고 있었다.

아마… 자신의 스킬을 원천봉쇄하려고 일부러 이렇게 사정 두지 않고 매듭을 바투 지었을 거라고 막연하게 짐작할 뿐이다.

하지만 그렇다면 그자는 도대체 어떻게, 자신이 정신집중을 해야 스킬을 사용할 수 있다는 걸 알아낸 거지?

의문에 의문이 꼬리를 문다. 머릿속이 마구 꼬여가는 기분에 헛구역질까지 나올 것 같았다… 어쩌면 헛구역질은 온몸에 죄여드는 결박 때문일 수도 있고.

덜컥…

어느 순간 주위의 진동이 멎었다.

상자가 덜그럭거릴 때마다 미묘하게 몸을 스며들던 자극적인 간질거림도 일단 가라앉아 안도의 한숨이 겨우 나왔다.

그렇다는 건 목적지에 도착한… 거려나.

“읏…!”

외마디 신음이 나왔다. 마치 엘리베이터가 갑자기 위쪽으로 훅 올라갈 때처럼 누군가가 밖에서 자신이 들어있는 상자를 들어 올린 모양이었다.

…의문과 의문이 물린 꼬리에 부정적인 생각까지 끼어들었다.

이것저것 다 집어치우고 그냥 자신을 인적 없는 외딴곳에서 몰래 죽일 생각인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들어 재갈을 꽉 물고 뒤로 돌려져 결박 채워진 손이 바들거렸다.

눈을 꽉 감고 숨을 내뱉으면서 일단 상자가 열리면 어떻게든 바로 뛰쳐나갈 수 있도록 몸을 뒤집으려 바둥거렸다. 열리기만 해 보라지.

…인정한다. 누가 들어도 허세였겠지만 그렇게 생각해야 마음이 그나마 꺾이지 않고 버텨줄 것 같았으니까.

“읍, 읍…”

끼익, 하고 상자 뚜껑이 열리자 틈새로 밀고 들어오는 빛에 눈이 찌푸려졌다.

한참을 어둠 속에 처박혀있다가 그물에 붙들린 물고기처럼 끌려 나온 터라 온몸이 저릿저릿했다.

네, 정말로 허세였습니다. 상자가열려봤자 굴비처럼 묶인 채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으으읍! 으읍!”

있는 힘껏 몸을 비틀어보았지만 양쪽에서 팔을 붙든 남자 둘의 힘을 당해내는 건 온몸이 묶여있지 않았어도 무리였을 테니까.

몸의 필요를 따라오지 못하는 숨을 코로 거칠게 내쉬면서 부르르 떨었다. …으. 꽤 오랫동안 갇혀있었던 터라 슬슬 그쪽…도 한계인데.

아니, 하다못해 재갈 정도는 풀어달라고! 버둥거려봐도 좌우에서 팔을 붙들고 질질 끌고가는 남자들은 요지부동이었다.

…새까만 로브로 온몸을 가리고 머리는 후드를 푹 눌러쓴 데다가 그 아래에는 가면까지 덧씌워 얼굴까지 철저히 가린 걸 보면 무슨 비밀결사나 사이비 종교단체같기도 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고.

이윽고 어느 문 앞에서 그들의 걸음이 멈췄다.

끌려왔을 뿐인데 슬슬 체력에 한계를 느끼는 와중 문이 열린 너머는… 어떤 의미에서 자신에게 매우 친숙한 곳이었다.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데, 이런 감옥 같은 어둡고 음침한 방.

조명이라곤 탁자에 세워둔 촛불과 벽에서 타고 있는 횃불 두어 개가 전부인 방 안.

그리고 문을 향해 등을 돌리고 있던 누군가가, 양손에 나눠 들고 있는 채찍을 팽팽하게 당겼다가 푸는 것을 본 그제야 어느 정도 이 상황이 이해가 갔다.

“오랜만이야, 로즈.”

그자에게 자신의 스킬에 대해 알려준 것도.

그자가 구태여 자신을 여기까지 끌고 온 것도.

‘그녀’가 배후에 있었다고 한다면 어느 정도 설명이 된다.

여자의 손짓에 좌우의 남자들이 가장 먼저 입에 물려놓았던 재갈을 풀어주었다… 막혀있던 숨이 트이면서 콜록콜록, 마른기침이 사방에 튀었다.

그대로 거칠어진 숨을 겨우겨우 정돈하고는 어느 정도 기침과 숨이 잦아들자 새디스틱한 가죽 의상으로 몸을 감싼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존경스럽기 그지없는’ 마담 윕…

이렇게 빨리 다시 보게 될 줄이야.

“마담… 참 번거로운 방법으로 초대를 하셨네요.”

“정말로. 이렇게까지 귀찮을 줄은 몰랐어. 몸값이 좀 오른 것 같더라? 로즈.”

윽, 하고 신음이 잇새에서 새었다.

부츠에 감싸인 발이 꽈아악… 머리 위를 가볍게 즈려밟은 채 꾸욱 힘주어 짓눌러서, 그러잖아도 결박 때문에 저릿저릿한 온몸에 비명마냥 삐걱거리는 두통이 퍼져갔다.

진짜 아픈데이거. 장난이 좀 심하잖아요.

잠시 감촉을 즐기듯 머리 위에서 비비듯이 지분거리는 발끝. 날카롭게 파고드는 아픔이 머리에 내리꽂혔다가 천천히 머리에서 발이 떼어져갔다.

“하아, 하아… 새삼스럽게 절 보고 싶어지셨을 리는…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요.”

“못 보던 사이 왕자랑 놀더니 말본새는 처음부터 다시 가르쳐야 할 것 같고 말야.”

이번엔 턱이다.

발끝이 턱 아래에 들이밀어지더니, 그대로 턱밑을 파고들곤 거의 차올릴 기세로 확 발끝을 들어 자신을 향해 얼굴을 들게 했다.

…못 보던 사이 악취미가 더 심해진 것은 아무래도 마담 쪽인 것 같은데. 학학학… 숨이 턱에 걸린 채 그녀를 올려다보니 어쩐지 조금 흡족해하는 표정이 떠올랐다.

“끅… 어, 차피… 일 끝나면, 어련히 가기 싫어도 돌아갈 걸, 왜 이렇게 수고로운 짓을 하시는 거, 에요….”

“그렇게 되지 않을 게 뻔했으니까.”

마담이 턱짓하자, 남자 둘이 아직 엎드린 채인 몸뚱이에서 손목의 결박을 칼로 잘라 끊었다.

빗나간 칼날이 맨살을 긁어 윽하고 조금 날카로운 아픔이 손등에 스며들었다. 살결을 타고 약간의 피가 새어 밧줄에 스며들었다.

밧줄이 끊겨나가 몸이 자유로워졌지만 온 관절이 뒤늦게 저리는 바람에 잠깐은 꼼짝할 수도 없을 것 같았다. 피가 한 바퀴 온몸을 도는 동안은 아마 그렇겠지.

마담은 칼끝이 얕게 스친 손등을 보곤 내 앞에 쪼그려 앉더니 그대로 손목을 확 잡아끌어선 후우… 어지러운 숨이 달싹거리며 새는 빨간 입술에서 혀를 내밀어 그 상처를 츄릅… 핥았다. 그녀의 입가가 씰룩이는 것이, 억눌렸던 감정이 솟구쳐 들끓는 모양이었다.

“너희 걸리버들은 하나같이 이쪽을 너무 순진하게 생각한단 말야…. 게다가 여기 사람을 굉장히 업신여기고 바보 취급하고 있어.”

“그런 적 없, 꺗…!”

마담의 손이 앞마리채를 쥐여잡고는 그대로 위쪽으로 잡아당겼다.

한동안 느낄 일이 없었던 익숙한 아픔에 눈꺼풀이 파들거렸다.

오랜만에 만나도 별로 반갑지도 기쁘지도, 하다못해 덜 아프지도 않은데…!

“그렇지 않다면 왕자의 제안에 그리 쉽게쉽게 응할 리가 없지? 왕실이라는 곳이 어떤 곳인지도 모르고, 일이 끝나면 돌아온다는 둥 태평한 말을 태연히 지껄이는 걸 보면 말야.”

짜악, 뺨에 빠르고 날카로운 아픔이 내달렸다.

…이건 좀 최근에 겪은 터라 익숙하긴 한데, 그렇다고 이런 아픔도 자주 만나고 싶은 건 딱히 아니라고.

학학학, 턱이 흔들릴 것 같은 찌릿거리는 아픔에 눈앞이 흐려졌다가 다시 분명해지기를 반복하고 이윽고 밀치듯이 그녀는 내 머리채를 붙잡은 손을 우악스럽게 휘두르며 놓아버렸다. 당연히, 다시 내 몸은 바닥을 나뒹구는 신세가 되었다.

“무슨 뜻… 인가요?”

“그 왕자가 널 쉽게 놔 줄 거라 생각해?”

가엾게 여기는 듯도, 한심하게 여기는 듯도 한 비웃음 비슷한 게 마담의 입가에 걸렸다.

“그 왕자는 계산이 빠른 녀석이지. 네 스킬이 얼마나 자신에게 편리한지 알게 되면 당연히 내게서 널 빌리는 것으론 만족할 리가 없어.”

짜아악, 채찍이 뽑혀져나와 바닥에 두드려졌다.

온몸을 흠칫하게 만드는 위협적인 소리는 레짐에서 들었던 것과는 담겨있는 감정이 달랐다.

요컨대 그녀 또한 지금, 이 상황에 매우 필사적으로 임하고 있었다. 무엇이 그렇게 절박해서.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될까. 널 아예 제 주머니칼로 쓰려고 하려나? 넌 엄연히 내 노예인데 말야…. 물론 너도 다리 벌릴 상대라면 왕자 쪽이 더 낫겠다고 희희낙락했겠지? 하지만… 어림도 없지. 내 걸 그렇게 눈 뻔히 뜨고 뺏기지 않으려고, 이렇게… 번거로운 일까지 꾸몄다는 걸 네가 알 리 없겠지!”

“도무지, 하아, 하아… 이해가 안 가는데요. ‘발스턴 경’이… 그래서 마담에게, 학… 넘어갔다고요?”

부어오른 뺨의 아픔 탓에 눈앞이 지끈거린 채 올려다보며 묻자, 마담은 진심으로 불쌍하다는 듯 한숨지었다. …저 반응에서 자신의 추측이 결국 옳았음을 확신할 수 있었다.

“나한테 널 빼돌릴 수 있게 해주겠다고 한 게 그 기사였는걸.”

“…역시. 이상하게 생각했어요… 마담이 아니라, 발스턴 경이 배후였던 거네요.”

하아, 하아… 숨을 몰아쉬면서도, 입 안에서 짭잘한 피의 맛이 혀에 퍼져가는 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마담이 아닌자기 자신에게, 스스로의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서.

그래야, 이 상황을 대처할 수단 하나둘 정도의 단서는 잡을 수 있을 게 아닌가.

“발스턴 경… 그는, 하아… 제 주인과는 생각이 달라. 그는 진심으로 루시탄을 왕으로 세우려고 하고 있어요. 그걸 위해, 마담에게… 접근한 거고. 날 방해하려고. 내 말… 맞나요?”

“로즈…”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양 마담이 눈을 가늘게 떴다.

목을 뚜둑 꺾어 머리를 살짝 기울이더니, 손에 든 채찍을 한번 촤악하고 바투 당겼다가 헐겁게 풀어 공포심을 조장했다.

본능적인 공포가 어깨를 살짝 떨게 만들었지만, 억지로 그 공포심을 마른침과 함께 삼키며 마담을 노려보았다.

“네 걱정부터 하지 그러니? ‘루시탄’ 걱정은 어차피 이제부터 조금도 할 필요가 없을 테니까. 하여튼… 어설프게 머리 굴리면 빨리 죽는다는 걸 걸리버들은 도통 배우질 못한단 말이지.”

이제부터 그걸 알게 될 거라며, 마담은 유쾌하다는 양 입가에 바들거리는 웃음을 가득히 깨물었다.

짜악…, 휘둘러진 채찍 끄트머리가 날카롭게 바닥을 두드렸다.

그것이 어떠한 신호였던 모양인지 마담의 양옆에 서 있던 로브의 사내들이 가면을 얼굴에서 떨어뜨렸고, 주저앉은 커다란 코와 길게 벌어진 입, 삐죽하게 튀어나온 송곳니와 푸르죽죽한 피부색이 엿보였다.

불안감밖에 들지 않은 분위기 속에서 눈이 바들바들 공포에 절어 떨렸다.

견뎌야 해, 로즈. 자신에게 그렇게 말하며 마음을 다잡아보지만…

“자, 그러면. 어디, 첫날처럼 조교를 시작해볼까?”

솔직히 자신은 별로 없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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