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커스텀 로즈-18화 (18/157)

〈 18화 〉 1 ­ 4 / 푸른 장미를 노래하던 성녀 로젤라이에게(4)

* * *

­ 4 ­

갈색 말 두 필이 끄는 마차가 교외 외곽의 어느 건물 앞에 멈춰섰다.

세간의 눈에 별로 띄고 싶지 않았던 모양이었나.

주변의 발걸음이 그다지 향하지 않을 곳에 숨기듯 세워진 건물치곤 외관은 제법 번듯하게 지어진 오래된 건물이었다.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는 하얀 담벼락을 지나위병 두 명이 지키고 있는 건물 입구에 마부는 이랴, 하고 말의 고삐를 잡아채며 마차를 세웠다.

마부석에서 내린 마부는 창을 든 위병에게 왕실에서 발급한 놋쇠 출입패를 보이곤 마차의 문을 열어 안에 탄 자에게 나오라 눈짓했다.

마차 안에서 내린 이는 위병들도 익히 아는 얼굴이었다.

짙은 와인색의 구불구불한 머리카락이 찰랑거렸다.

가슴께가 대담하게 파인 파격적인 디자인의 드레스, 그 치마의 드레이프를 우아하게 흔들며 여자는 위병을 향해 살짝 고갯짓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부채로 입가를 가렸지만 부채살 위로 드러난 신랄한 눈매는 알아보지 못할 리가 없겠지.

두 위병 중 지위가 높아보이는 콧수염을 기른 위병이 모자를 벗고 아는 체를 하는 걸 보면.

“안녕하십니까, 키르케 님.”

여자는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곤 대답 없이 드레스 자락을 장갑 낀 손으로 붙잡은 채 종종걸음으로 위병들을 통과했다.

마부는 모자를 벗고 여자의 등에 대고 인사한 뒤 마부석에 올라 말등에 채찍질을 후렸다.

마차는 곧장 멀어져갔고, 여자는 묘하게 서두르는 걸음걸이로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알트슈타인 왕립 장서관].

자못 정중한 글씨로 쓰인 현판 아래로 문을 열고 들어간 여자는 조금 긴장한 듯, 그러나 그 긴장한 기색을 드러내려 하지 않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사서 한 명 외에는 아무도 없는 로비.

사서는 한번 머리를 들어 얼굴을 확인한 뒤 가타부타 인사 한마디 없이 다시 제 업무에 파고들었다.

여자로서는 지금은 그런 불친절조차 다행이라고 여겨질 정도였지만.

쉴 새 없이 깃털 펜을 놀리는 데 바쁜 사서를 무심한 척 지나쳐서 계단으로 향했다.

일단 어떻게든 속여넘긴 것 같긴 한데. 주변에서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아 겨우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키르케… 가 아니라, 얼핏 본 그녀의 모습을 흉내 냈을 뿐이지만 어쨌든 이 장서관에서 일하는 자들을 속여넘기는 데는 충분했던 모양이다.

“자, 그럼 일단… 지하 1층이라고 했던가.”

루시탄은 제법 능숙하게 마부 노릇을 해 주면서 자신이 알고 있는 이 장서관의 구조를 귀띔해주었던가.

그의 말에 따르면 이 장서관은 지상 3층으로 되어있는 구조였지만, 왕실의 일원인 자신도 함부로 들어갈 수 없는 지하층도 있었다고 했다.

국왕이 흑마법사… 루시탄의 표현대로라면 ‘마녀’들을 위해 제공한 층이기에 사람들의 눈에 띄어선 곤란한 비밀스러운 연구 자료는 전부 지하층에 처박아놨을 거라고.

말하자면 이제부터 마녀의 가마솥 같은 곳에 발부터 들이미는 셈이고.

루시탄이 재밌어 죽어하는 기색으로 히죽거리는 꼴이 눈에 선했다.

긴장하지 않을 수가 없었지만, 가능한 소리 나지 않게 계단을 조심스레 내려가며 결심을 굳혔다.

될 대로 되라지. 무근본 배짱만은 누구한테도 안 진다고.

“그나저나 꽤 내려가네, 여기… 대체 어떤 자료를 보관해놨길래 이렇게 깊이 만들어놓은거야?”

아무도 대답하지 않을 소리를 소심하게 중얼거리면서 내려가다 보니 더는 내려갈 계단이 없는 밑바닥에 이윽고 발이 닿았다.

몇 번 더 발을 딛어보고 나서야 평탄한 바닥이 있다는 걸 깨닫고 손을 뻗어보면…

아, 손끝에 나무 문고리가 잡혔다. 그대로 밀자, 문이 바닥을 긁는 소리를 얕게 냈다.

만약 누군가가 있다면 태연한 척을 해야 하니까. 하나하나 움츠러들어선 할 수 있는 일도 못 한다고.

그렇게 속으로 다독거리면서 문을 열고 들어가면 익숙한 듯 익숙하지 않은 광경이 시야를 맞이했다.

나무로 된 서간에 빼곡하게 꽂혀있는 책들에서 오래 묵어 습기가 찬 책 냄새가 스며 나오고 있었다…

그다지 책장을 펼쳐보고 싶지 않게 만드는 그런 냄새가.

다행히, 이 지하층에는 자신 말고는 정말 아무도 없는 것 같았다. 겨우 안도감에 어깨에 잔뜩 들어갔던 힘을 풀고, 무엇부터 살펴야 할지 곰곰이 생각했다.

로젤라이에 대한 기록이라. 그렇게 한 번에 찾을 수 있게 되어있으려나.

“씁, 그럴 리가 없지….”

너무 오래 묵어서인지, 아니면 마법사들에게는 책을 찾는 특별한 비법이라도 있어서인지.

서간에 꽂힌 책들 가운데 제목을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표지가 멀쩡한 것은 거의 없었다….

이렇게 되면 책을 하나하나 펼쳐서 내용을 확인하는 수밖에 없나, 하고 생각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게 될 리가 없잖아.”

수없이 많이 늘어선 책장 속에서 제목도 없는데 그걸 어떻게 찾냐고.

마치 대학 시절 답도 없을 정도로 과제를 내주면서 C뿌리기를 시전하던 교수님을 원망하며 좀비처럼 도서관을 헤매던 때가 생각났다.

아, 지금 와서 생각하니 교수님. 좀… 아니 존나 원망스럽다고요.

삐익.

문득 지하에서 들릴 리가 없는 소리가 들렸다.

어쩐지 으스스한 기분에 어깨를 한번 움츠렸다가 고개를 들어보니… 지하에 어울리지도 않게 새 한 마리가 벽면을 장식하는 가고일(Gargoyle)에 앉아선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동그란 눈을 도록도록 굴려대면서.

“…뭐, 뭔데?”

어쩐지 도둑이 된 것 같은 기분. 아니, 반쯤은 맞긴 하지만.

못내 찔려하는 이쪽을 뭔가 의지를 가진 것마냥 대놓고 응시하면서 고개를 갸웃거리는 그… 까마귀인지 매인지 애매모호한 정체불명의 새를 올려다보면서 스스로가 조금 바보 같다고 생각하면서도 말을 걸었다.

새는 와인처럼 검붉은 깃털이 풍성하게 돋아난 날개를 펼치면서 삐익, 삐익. 경계음을 높였다.

마치 너는 누구냐! 라고 묻는 것 같았다. 아니, 커스터마이징은동물한테는 안 통하나, 혹시?! 이 소란에 누군가가 달려오면 큰일인데…!

“쉬이, 쉬이, 이 새대가리 자식아, 조용히 해!”

마치 과실에서 기르던 말티즈, 꼬랑지를 달래듯이 해보았지만 그게 새한테 먹혀들 리가 없잖아.

새는 가고일에서 펄쩍 뛰어내려 공중을 한바퀴 빙글 볼아 선회하고는 내 바로 옆의 책상에 텁 하고 내려앉았다.

도록도록 굴리면서 이쪽을 올려다보는 눈동자에 어쩐지 이성이나 지성 같은 것도 엿보였다…

설마 이 녀석, 평범한 새가 아니라 뭔가 자의식이 있는 그런 신비한 동물인가? 불사조?

“쉬이… 자, 조용히 해. 조용히 하면 나중에 고깃조각이라도 좀 얻어다가 갖다줄 테니까.”

제발 조용히 해라, 조용히 해 줘.

그렇게 속으로 몇 번이고 중얼거리면서 하릴없이 새 상대로 달래는 말을 하고 있으려니 스스로가 참 한심하게 느껴졌지만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다행히 자신의 달래기가 통하기라도 했는지, 새는 조그마한 부리를 몇 번 깔짝이고는 그 이상 부산스럽게 굴지는 않았다.

하아, 한 시름 넘겼네, 정말. 돌아버릴 것 같아.

“씨발,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닌데.”

새랑 재미나게 놀고 있을 때가 아니다. 한고비 넘겼으니 다시 또 한고비 넘겨야지.

손을 툭툭 털고 새에게서 몸을 돌리자, 등 뒤에서 푸드득하는 홰치는 소리가 났고, 갑작스럽게 머리에 툭 하고 자그마한 물체가 내려앉았다. 뭐, 누군지는 말할 것도 없지.

어디 라디오에서 들었던, 등산로에서 만났다는 도인 이야기를 떠올리면서 일단 손에 잡히는 서적을 쥐고 펼쳐보았다. …도무지 알아듣기 힘든, 마치 다른 학과의 전공서적, 그것도 원서를 읽는듯한 아득함이 눈앞을 흐리게 했다.

“이런 식이라면 책을 찾는 것보다 루시탄의 생일이 더 빠르게 오겠는데.”

“꾸?”

머리 위에서 새가 비둘기마냥 구루륵거리며 고개를 비트는 것이 어렴풋 보였다.

네 얘기 아냐, 쨔샤. 그리고 혹시 내 머리에 새똥 지리면 너 그대로 통구이로 만들어버릴 줄 알아.

“…야. 너 혹시 성녀 로젤라이에 대한 책이 어딨는지 알아?”

너무 답이 안 보인 나머지 이젠 새에게까지 SOS를 치다니. 이러려고 이세계에 왔나 하는 자괴감이 어깨를 짓눌렀지만,

삐익!

돌연 머리 위에서 탓 하고 뛰쳐오른 새가 날개를 퍼덕여서 한켠의 책장에 올라앉아서는 삑삑거리는 소리를 내는 게 들렸다. 어쩐지 우쭐대는 것 같은데, 저 새.

…설마?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여기는 마법이 아주 당연한 판타지 이세계. 무슨 일이 일어나도 놀랄 게 없다.

말 못 하는 새가 책을 찾아줘도 놀랄 게 전혀 없다고,

홀린 듯이 그 새가 삑삑거리는 소리를 내며 자리잡은 책장으로 다가갔다. 두껍디두꺼운 책과 책 사이, 틈새를 메우듯이 자리잡은 얇은 책에 시선이 갔다.

꼴깍, 하고 침을 삼키면서 그 책을 조심스럽게 뽑아냈다.

“…빙고.”

책장에 동글납작한 글씨체로 씌여진 ‘Roselei’.

누가 봐도 손으로 쓴 필적이다. 펼쳐보면 첫 장 첫머리에는 날짜와 날씨.

잭팟, 빙고, 당첨. 일기였다. 그것도 아마, 로젤라이 본인이 썼을 거라 생각되는.

정말 나중에 저 새한테 고깃조각이라도 하나 갖다줘야겠다.

“갑자기 이렇게 일이 술술 풀리다 보면 한 번씩 뒤통수를 존나 쎄게 얻어맞곤 하던데.”

나중에 일 터지고 들으면 분명 후회할 소리를 하며 입가에 힘이 풀려 히죽거렸다. 자, 그럼 ‘노래하는 성녀’ 로젤라이 씨. 당신이 이 일기에 무슨 내용을 적어놨는지 조금 훔쳐보…

삐이이익!

갑자기 책장 위에서 새가 길게 울었다. 자신을 경계하던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긴 울음. 순간 등 뒤에 오싹하는 냉기가 등 뒤에 스며들었다.

어디서, 어디서 이런 느낌을 받았었는데… 그래, '그자'였다.

뺨이 서늘하게 굳어지는 것을 느꼈다. 어떻게 해야 하지? 뭘 해야 하지?

입술을 깨문 채 눈을 질끈 감고, 일단 이 상황을 타개하는 데 필요한 단서, 손에 쥔 로젤라이의 일기를 어떻게 그자에게서 감출 것인지를 가장 먼저 생각했다.

뇌리를 스쳐 지나간 아이디어. 시험해볼 수 있는 시간은 지금뿐이다.

저벅저벅 하고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만약 자신이 생각하는 그자가 맞다면 자신이 그자에게 대항할 수단 같은 건… 전혀 없다.

삐이익! 삐이익!

새가 푸드득, 요란스레 홰를 치며 날아올랐다.

두세 칸 너머의 책장에서 누군가가 손을 휘젓는 모양인지 뭔가 탁탁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도무지 이유는 모르겠지만 저 새가 자신을 위해 1초라도 시간을 벌어주고 있다면… 어차피 도망갈 수 없다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뿐이었다.

커스텀 창 오픈, 작게 중얼거리면서 빨려 들어가는 풍경 속에서 흐릿하게 떠오르는 익숙한 날개를 향해 가능한 힘껏 손에 들었던 일기부터 집어던졌다.

이런 식으로 써 본 적은 없는데 일단 밑져야 본전이니까!

“웬즈데이!”

웬즈데이가 놀라선 날개를 펄럭이며 제 쪽으로 날아오는 일기를 받아내는 것을 보았다.

일단 됐어, 자신도 아주 잠시라면 이 커스텀 공간에 숨어서…

아이고, 어림도 없지.

마디가 단단한 커다란 손이 억세게 뻗어와 어깨를 붙잡았다.

의식이 완전히 그 안으로 넘어가기 직전 돌연 붙잡은 손이 내 몸을 바닥에 내팽개쳤다.

콤마 이하의 아주 짧은 순간에 불과하지만, 완전히 정신을 집중해야 하는 스킬 시전.

그 의표를 찌르면 스킬은 캔슬되고 만다.

맥없이 바닥에 쓰러진 채 윽, 하고 신음을 내려니 컥 하고 신음이 아닌 고통스러운 숨 막히는 질식음이 울렸다.

‘그’는 턱과 목을 손으로 꽉 쥔 채 내 몸을 팔 하나의 힘만으로 가볍게 들어올렸다.

안돼,

수, 숨이… 숨이 쉬어지질, 않아.

“컥, 칵… 학, 아, 끅….”

나, 죽는, 건가…?

또 죽고 싶지는, 않은데.

바닥에서 살짝 떠오른 다리가 허공에서 바둥거리는 감각에, 마치 밑바닥 없는 바다에 빠진 것 같은 부자유가 몸에 엄습했다.

안 돼, 죽기 싫어.

누가 좀 도와줘, 루시탄, 페리링. 누구라도 좋으니까…

“…윽?!”

그 신음은 자신이 낸 것이 아니었다.

나타날 곳이라곤 전혀 없는 지하 서고에, 있을 리 없는 검붉은 털의 개 한 마리가 그자의 다리를 물고 늘어지는 것이 흐릿한 시야에 어렴풋이 보였다.

그자는 표정을 일그러뜨리고는 발을 들어 개의 배를 걷어찼고, 개가 깽 하는 소리를 내며 저만치 밀려났다가그대로 벽에 부딪혀 바닥에 머리를 늘어뜨리는 것이 보였다.

“진정 번거로울 만큼 손이 많이 가게 하는군. 걸리버 창녀. 슬슬 진저리가 난다.”

그자의 손을 붙잡고 할퀴고 물고, 다리를 걷어차도 미동조차 없는 그자. 표정에조차 한 점 동요가 없는 불쾌감 외에 다른 게 없어서 한층 더 흉물스럽게 느껴졌다.

“대체, 왜… 당신, 이…. 끅, 학…!”

다시 목을 꽈아악, 무지막지하게 죄여오는 그 쇠집게 같은 손가락의 악력에 저항해 그자의 팔을 있는 힘을 다해 제 주먹으로 내려쳤다. 그 별 볼 일 없는 저항 자체가 불쾌하다는 양 그자가 눈썹을 까딱였고, 그대로 검을 휘두르듯, 검 대신 내 몸을 벽을 향해 휘둘렀다.

퍼억!

등부터 벽에 세차게 부딪혀 삐걱거리는 시큰한 감각을 마지막으로, 거기서 의식이 툭 끊겼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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