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화 〉 1 4 / 푸른 장미를 노래하던 성녀 로젤라이에게(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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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화끈거리는 열기가 먼저 뺨에 퍼지고, 그 뒤를 이어 찌릿한 열통이 스멀거리며 번져갔다.
손에 반지를 끼고 있었는지, 금속에 긁혀 조금 찢어진 살점에서 핏기가 맺혔다.
“아…?”
뭐지, 나 방금 맞은 건가? 왜?
따귀를 맞은 의미를 전혀 짐작할 수도 없어서 잠시 멍해져 있다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오래 묵은 송진이 끈적끈적하게 굳어진 것 같은 눈동자가 경멸을 품은 채 잠시 이쪽을 응시했다가, 거두어들인 그 시선을 침대에 누워있는 왕자를 향해 그대로 던졌다.
“왕자 전하? 또 침소에 여자를 들이셨군요, 이번엔 하찮은 시녀 따위에게 손을 대려 하셨나요? 부끄러움도 없으신가.”
“…키르케!”
루시탄도 구태여 분기를 숨기지 않았다. 그러잖아도 피로감에 절어있던 얼굴이 당혹과 황망함, 그리고 분기에 붉게 물들었다.
“이게 무슨 짓이냐!”
“네? 아… 지금 혹시, 왕자 전하. ‘지금 무슨 짓이냐’고 물으셨습니까? 어머, 그건 제가 꼭 전하께 여쭙고 싶은 말인걸요, 왕자 전하.”
후우, 하고 다소 가식적인 한숨까지 지은 여자… 키르케는 한 호흡을 쉬었다가 루시탄을 쏘아보았다. 조금 전까지 그 눈동자에서 이글거리던 감정은 어느새 자취를 감춘 후였고. 대신 엄격함이 자리하고 있었다.
“아, 이건 말이죠. 제가 전하를 대신해서 이 시녀를 체벌한 것뿐이랍니다. 모처럼 처신에는 주의해주시길 바라는 충정에서 말이에요. 왕실의 체통이라는 거, 중요하니까요?”
그를 대신한다… 참, 교묘한 표현이었다.
루시탄의 뺨을 대신하여 내 뺨을 때렸다는 것인지,
아니면 루시탄이 나를 체벌해야 했다는 의미인지.
루시탄도 잠시 쏘아보다가 한숨을 쉬고는 조금 걱정스럽다는 듯이 시선을 이쪽에 잠시 향했다가 눈썹을 찌푸렸다… 아마 뺨에 긁힌 자국을 본 게 아닐까.
“…키르케. 찾아온 용건이나 말해라.”
“당연히 전하의 교육 담당으로서 찾아뵌 것이죠. 오시자마자 여자부터 방에 들이시는 걸 보니 제 교육이나 조언에는 전혀 신경쓰지 않으셨다는 것만은 확실히 알았답니다… 아아, 슬퍼라.”
“네가 신경 쓸 일도 아니고, 네가 신경 쓸 상황도 아니었다.”
루시탄치곤 딱딱하게 대꾸하는 것을 보면서 조금 위화감을 느꼈다.
알게 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저렇게 상대를 불편하게 느낀다는 것을 드러내놓고 표현하는 녀석이었나? 물론 저 여자의 말투가 심히 재수없다는 건 부정할 수 없지만.
일단 풀죽은 메이드답게 행동하면서 생각했다. 으, 조금 뺨이 따끔거린다.
“게다가 왕자가 보는 앞에서 왕자의 시녀에게 손을 대다니 너무 불경하다고 생각하지 않나? 이 일은 헤카이트에게 정식으로 항의하겠어.”
“왕자 전하?”
여자, 키르케는 돌연 분한 듯 입술을 깨물고는 물결처럼 구불거리는 머리카락이 출렁이도록 이쪽을 향해 홱 고개를 돌렸다. 아무렇게나 내뻗은 손이 얻어맞았던 뺨 근처에서 멈추더니 핏기와 상처가 빨려들 듯이 그 손가락 한쪽 끝으로 옮겨갔다.
경멸 어린 눈으로 쏘아보며 새 상처가 생긴 손을 내리는 것을 보곤, 여전히 이 여자는 자기 행동에 대해서 잘못되었다는 인식 자체가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런 인간과 얽히는 건 아주, 아주 피곤한 일인데.
“…이걸로 되었는지요?”
예상대로, 키르케는 그저 왕자의 질책에 손을 움직였을 뿐 아무 가책도 느끼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저 ‘헤카이트’라는 이름이 나왔을 때 태도가 눈에 띄게 달라졌다는 것 정도.
“…이제 그만 용건이나 말하고 내 방에서 어서 나가.”
어차피 대화로 어떻게 되는 상대가 아니라고 루시탄도 그렇게 판단한 모양.
서 있던 제 몸을 다시 침대에 주저앉힌 채 눈썹을 까딱거렸다. 교육 담당이라는 것을 보면 아마 루시탄의 가정교사 같은 위치였던 모양인데… 보아하니, 페리링과는 어쩐지 느낌이 달라도 마법사인 것 같고.
마법사, 마법사라… 조금 흥미가 생겨서 슬쩍 곁눈질로 그 키르케라는 여자를 보았다.
처음에는 조금 정신이 얼떨떨해서 제대로 살피지 못했는데 그러고 보면 페리링이 착하고 귀여운 마법사라면 이쪽은 그야말로 못된 짓을 꾸미는 마녀 같은 이미지이긴 하니까.
“사흘 후가 왕자 전하의 탄신이시지요? 헤카이트 당주께서 왕자 전하께 꼭 성의를 보이고자 하셔서, 혹 어떠한 의향이나 요망이 있으신지를 제게 알아보고 오라 하셨습니다.”
“헤카이트… 하아. 당주의 성의는 고맙게 받아들이겠다고 전해라. 하지만 당장 도움을 청할 것은 없군. 그럴 때가 되면 내 쪽에서 얘기를 꺼내겠다고도.”
“네, 그렇게 전하도록 하죠.”
루시탄은 조금 더 불쾌한 듯 눈썹을 찌푸렸고, 그에 반해 키르케는 입가에 어딘지 만족스러운, 가면처럼 덧그린 듯한 음습한 웃음을 짓더니 뒷걸음질로 방을 나섰다. 그녀가 방을 나가자마자, 루시탄은 씩씩거리면서 가장 먼저 문부터 잠갔다.
“니이냐! 입구에 굵은 거로 소금 뿌려라! 그리고 내 허락 없이 아무도 내 방에 들어오지 못하게 해! 그것이 마법사든 마녀든 폐하시든!”
키르케라는 여자가 어지간히 싫은 모양이다.
괜스레 니이냐에게 화풀이 같은 고함을 지른 뒤 다시 제 침대에 누워버리는 루시탄을 향해 눈을 깜빡거리다가, 테이블 바구니에 놓인 사과를 집어 칼로 깎았다. 저럴 땐, 단 거라도 좀 먹어야 기분이 풀리게 마련이니.
“어지간히 싫어하는 모양인가봐?”
슬쩍 운을 한번 떼보았고, 예상한 대로 루시탄은 불쾌함을 전혀 숨기지 않은, 드물게 날을 세운 반응을 보였다.
“흑마법사들이야. 불편해.”
“술라 씨 같은 마법사랑은 달라?”
“다르지. 다르고말고.”
이쪽에 등을 보이고 돌아누워서 표정을 볼 수는 없었지만, 말하는 투나 목소리는 지금의 화제를 이어가는 것이 별로 내키질 않는 모양이었다.
흑마법사라고 하면 비밀스러운 집회 같은… 음지에서 암약한다는 이미지였는데, 여기에서는 당당하게 왕궁을 드나들고, 왕자의 교육 담당도 맡았다고 말하는 것을 보면 꼭 그렇지도 않은 모양.
세간의 인식과 실재하는 위치가 맞지 않는 경우는 종종 있지만, 그들에 대한 인식만은 자신이 가진 것과 루시탄의 불쾌감이 크게 어긋나진 않은 것 같았다.
“일단 저들도 공인된 학파의 마법사들인지라 아버지에게 여러 가지로 도움이 되고 있다는 건 인정해. 아버지도 이런저런 특혜를 주면서 대접하고 있고. 연구 목적으로 장서관에 빈번하게 드나드는 모양이고.”
“그럼 왜 그렇게 싫어하는 거야?”
“방금 그 여자 태도, 너도 봤잖아?”
이쪽으로 고개를 돌린 눈썹이 뒤집힌 팔 자를 그린 채 미간에 깊게 골이 패여 있었다. 사과 하나를 포크로 찍어 갖다 대니 루시탄은 입을 벌려 사과를 물고는 우물거렸다.
“내 싸대기 때린 거?”
“그건 뭐, 대충 넘어간다 치더라도.”
한 대 때린다, 너 이 왕자 자식아.
“내가 왕세자 자리를 받을지도 모른다는 냄새를 어떻게 맡았는지 벌써부터 나한테 줄을 대려고 하는 게 역시 찜찜하단 말야.”
왕세자 자리를 어떻게 하면 받지 않을 수 있을지 고심하는 루시탄으로서는, 자신에게 줄을 대려 서성거리는 이들에게 좋은 감정이 들 리는 없었다.
하지만 그건 인지상정인 게 아닌가? 훗날 왕이 될 것이 유력한 왕자라면 누구나 눈도장을 찍고 싶을 것이다.
루시탄은 입에 문 사과조각을 조금씩 갉으면서 눈썹을 까딱거렸다.
“대체 어디서 이야기가 새어나갔는지 모르겠네.”
루시탄의 중얼거림에서 세 사람의 얼굴이 떠올랐다.
술라. 발스턴. 니이냐.
자신이 아는 루시탄의 주변인물은 이 셋인데.
술라는 정치적 역학관계에 대해 도통 관심이 없을 것 같았고, 발스턴은 척 보기에도 충직한 기사였기에 주군인 루시탄의 의중을 거스를 것으로 생각하기는 어려웠다.
니이냐는… 루시탄의 시녀이긴 하지만, 일개 시녀인 그녀가 일국의 왕세자 자리의 향배 같은 중대한 문제에 대해 알고 있을까? 하고 묻는다면, 역시 고개를 갸우뚱하게 된다.
어쩌면 난 자신이 생각한 이상으로 골치 아픈 일에 연루되고 만 게 아닐까?
한숨을 내쉬면서 일단 자신이 여기에 있는 이유에 대해 다시 곰곰이 되짚어 생각했다.
루시탄은 왕위를 잇길 원하지 않는다.
왕세자의 자리를 받지 않기 위해서는, 현 왕세자인, 루시탄의 형이 안고 있는 문제를 해결해야 하고
루시탄의 형, 미하도르와 연관된 인물인 로젤라이에 대해 알아내야 한다.
로젤라이에 대한 기록은 장서관에 전부 엄중히 보관되어 있고
그 장서관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어? 잠깐.”
방금 루시탄이 뭐라고 했었더라?
천천히, 루시탄이 했던 말을 곱씹으면서 퍼즐이 한 피스, 딱 필요한 위치에 짜 맞춰진 듯한 기분에 입가에 히죽 웃음을 지었다.
“흐응. 좋은 생각이 났어. 따귀 맞은 값도 받아낼 겸 말야.”
“…너 그런 표정도 지을 줄 알았냐?”
루시탄이 이죽거리는 건 일단 적당히 받아넘겼다. 좀 사악한 표정이라도 지었나보지.
이래 봬도 단맛 쓴맛 매운맛 다 보고 살았다고. 여기 떨어져서 얼마 전까지 창녀 노릇까지 하는 동안 남은 건 악밖에 없단 말야.
…뭐, 창녀 노릇을 하던 것을 ‘얼마 전’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게 아직은 익숙하게 다가오지 않긴 했지만. 게다가 이 일이 끝나면 좋든싫든 돌아가야 할 것이고.
그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루시탄이 채근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계획이나 얘기해봐. 나도 좀 알아야지”
“얘기하는 것보단 이쪽이 더 빠를 거야. 잠깐.”
후우, 하고 숨을 들이마시면서 눈을 감았다.
커스텀 창 오픈. 주변이 빨려드는 시야 속에서, 자신만이 있는 어둠 속에 선 채 웬즈데이가 나타나길 기다렸다.
조그맣게 포르르 펄럭이는 익숙한 요정 날개.
빛알갱이를 뿌리며 나타난 웬즈데이와 가볍게 인사를 나눴다. 어쩐지 꽤 오랜만에 불러낸 것 같은걸.
[에… 그런 일이 있으셨군요? 어쩐지 한동안 절 찾지 않으셔서 장미 씨가 절 잊어버렸을 거라 생각했다구요.]
“에이, 설마. 너라도 없으면 내가 어떻게 여기서 해나가겠니?”
불만스레 볼을 부풀리는 웬즈데이를 달래주었다.
뭐, 걸리버에게 스킬이란 목숨줄과도 같은 것이니까.
웬즈데이에게 자신이 변장할 대상에 대해 적당히 말해주자 웬즈데이는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열심히 손에 든 완드를 흔들어대었다.
몇 분 후.
심혈을 기울여 커스터마이징한 자신의 모습을 루시탄에게 보이자, 루시탄은 잠깐 흠칫거리며 놀랐다가, 눈썹을 찌푸렸다가, 입가에 아까의 자신처럼 사악하게도 보이는 웃음을 가득 입가에 품어보였다.
그리고 실로 만족스럽다는 양, 엄지를 척. 내보였다.
이쪽도 엄지를 마주 내보였다. 아마 자신도 똑같은 웃음을 짓고 있을 것이라 확신하면서.
비록 할로윈은 아니지만…
작전명 트릭 오어 트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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