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화 〉 1 3 / 내가 본 왕자 중 최악의 왕자 루시탄에게(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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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그로부터 며칠 후.
나는 시골 항구 레짐도, ‘존경해 마지않는’은… 개뿔,‘빌어처먹을 정도로 엿 같은’ 마담 윕의 창관도 아닌 운디네 해(?)의 물 위에 있었다.
조금 더 정확하게는 운디네 해의 해류를 따라 대륙 곳곳의 항구에 기항하는 동항로 회사의 화물선에 타고 있었다.
약간의 심사숙고가 따랐던 모양이지만 마담 윕은 결국 왕자의 제안을 수용했다.
나를 잠시 제 2 왕자, 루시탄에게 대여해주면 후 왕도의 바이체슈테른 항구에 가게를 낼 수 있게 해 준다는 조건.
돈도 돈인 데다 동항로 회사의 입김, 거기에 왕자 본인의 요청이라 결국 거절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마담 윕은 분명히 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내 신병을 잠시 대여해주는 것뿐이고, 여전히 자신의 소유권은 마담 윕 본인에게 있다고.
루시탄 또한 거기에 대해서 별말을 붙이지 않은 탓에, 자신이 마치 체스 플레이어 두 명 사이에 낀 졸 같은 기분이 되는 것은 별로 유쾌하지만은 않았지만…
뭐 아무려면 어쩌랴.
일단 일이 끝나기 전에는 적어도 마담 윕의 채찍을 맞지 않아도 되는 것만도 감지덕지.
지금은 이 얼마 안 되는 자유를 만끽하기로 정했다.
“로즈, 기분 좋아 보이네요.”
“그야 당연하지. 당분간 마담 얼굴 안 보는 것만으로도 살 것 같아.”
무엇보다 의외인 것은, 마담이 페리링을 붙여줬다는 것이다.
말로는 자신의 호위 겸 감시라고 했지만… 그럼 레짐에서의 일은 어떻게 하고?
“그쪽은 가게를 모두 정리하는 대로 왕도로 옮길 거라 바빠서 한동안 제가 할 일은 없을 거래요.
물론 있으면 도울 일이야 있겠지만요.
왕자 전하의 호위라고 하던가, 그 기사님이 동항로 회사의 선원들을 지원해준다고 했고요. 뭣보다…”
자신의 물음에 답해주던 페리링이 뒤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정확히는 갑판 아래의 선실 쪽을 향해서였다.
안경알 안쪽의 눈이 조금 흥미로 반짝거렸다.
“술라 님은 정말 대단한 마법사세요. 며칠 정도 간간이 얘기를 나눴을 뿐이지만 궁정 대마법사가 되려면 그 정도는 해야 하나, 싶더라구요.
대마법사라고 불릴 정도라서 그런지, 아무 마법도 쓰지 않으셨는데 마치 마나가 그분의 몸에 피처럼 돌고 있는 게 느껴질 정도였어요.”
“그거 대단한 거야?”
“대단하죠. …아, 로즈한테는 잘 와닿지 않는 느낌이긴 하겠네요. 이걸 어떻게 말해야 하나…”
잠시 곰곰이 생각하는 모양이지만, 아무래도 이 마법사 아가씨의 어휘로는대마법사가 얼마나 대단한지 문외한인 자신이 이해할 수 있게 잘 설명하기는 어려운 모양이었다.
뭐, 대충 그 술라라는 마법사가 대단하다는 건 어렴풋이나마 이해했지만 말야.
“그보다 멀미 방지 주문 고마워, 페리링.”
“에이, 별말씀을요.”
하지만 아무리 술라가 훌륭한 마법사라고 해도 지금 이 배에서 가장 사랑받는 마법사는 단연 페리링이었다.
선원들에게는 역시 회색 일색의 복장을 고수하는 영감님보다는 예쁘장한 소녀 마법사 쪽이 어필하는 바가 있던 것일 거고.
“이렇게 큰 배는 처음 타 봐서 걱정했는데 덕분에 편히 가고 있잖아. 페리링 덕이지.”
요렇게 예쁜 페리링을 예뻐하지 않을 수도 없을 거고.
마법사 모자 위지만 머리를 손으로 쓰다듬어주니 페리링도 기쁜 듯이 예쁘게 웃었다.
배에 타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선원들에게도 일일이 멀미 방지 주문을 걸어주었다는 소문이 돌자베테랑 선원들까지도 멀미를 호소하기 시작했다던가.
착한 페리링은 꾀병인지도 묻지 않고 열심히 멀미 방지 주문을 걸어줬었더란다.
“사실 그 주문도 술라 님이 살짝 귀띔해주셨어요. 로즈 씨가 처음이라 뱃멀미에 고생 좀 하실지도 모르니 알아두라고.”
“어라, 그거 좀 의외네.”
첫인상은 마치 마법 외에 다른 세상사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이 부처님처럼 초탈한 듯한 영감님인 줄 알았는데,의외로 그런 부분에서는 배려심을 발휘할 줄 아는 모양이었다.
페리링이 좋게 평가하는 걸 보면, 아무래도 나쁜 마법사는 아니다 싶긴 했지만.
“그러나 힌트를 준 것만으로 주문을 익힐 수 있는 것은 결코 흔한 재능이 아니라네.”
등 뒤에서 무겁게 울려오는 깊이 있는 목소리.
기척조차 느끼지 못한 탓에 흠칫 놀랐다가 천천히 뒤돌아보았다. 페리링이 반색했다.
“술라 님!”
“선원들에게 물어보니 그대들이 여기에 있다고 하여 왔다네.”
느릿느릿하고 고풍스러운 어조.
마치 이루 말할 수 없이 거대한 뱀이 스르륵 하고 바닥을 기어가는 것 같은 묵직한 존재감에 침을 자기도 모르게 꿀꺽하고 삼켰다.
며칠 전 발스턴 경의 무언의 위압감에 한번 호된 꼴을 당하고 나서는, 루시탄의 주위에 있는 이들이 어떤 이들인지를 새삼 의식하게 되고 말았다.
아, 이렇게 움츠러드는 건 별로 나답지 않은데.
늙은 마법사 술라의 눈이 이쪽을 향했다.
여전히 불투명한 회색 눈동자는, 앞이 보이는 것인지 아닌지 전혀 짐작할 수가 없었다.
적어도 행동하는 데 부자연스러운 구석이 있는 것 같진 않았는데, 역시 마법사쯤 되면 다들 그런 건가?
“제게 무슨 하실 말씀이라도?”
“전하께서 자네의 신변 보호에 각별하게 마음을 쓰라고 당부하신 터라서 말이네. 그래서 이따금 이렇게 얼굴을 마주하고 확인하는 편이 훨씬 그 분부를 더 충실하게 이행할 수 있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다네.”
다행히 아직까지는 별로 불편한 곳은 없는 것 같군, 하고 술라는 고개를 만족스레 끄덕인 다음 페리링에게로 시선을 옮겨갔다.
페리링은, 그렇잖아도 말하고 싶어서 입이 근질근질거리던 모양이었다.
“술라 님, 내주신 과제는 잘 진척되고 있어요. 조만간 좋은 결과를 보여드릴 수 있도록 할게요.”
“과제?”
뭐지, 둘 사이에 내가 모르는 뭔가가 있습니까?
눈을 동그랗게 뜨고 페리링과 술라를 번갈아보니 술라는 이쪽의 시선을 눈치채고 입가에 살짝 웃음 비슷한 것을 띄웠다.
표정이 전혀 변하지 않아서 웃음이라곤 모르는 줄 알았는데.
“과제라고 말하면 지나치게 거창하군. 그저 목표로 삼을 만한 이야기를 들려주었을 뿐이네.
자네는 재기 넘치는 젊은 마법사이니 조만간 흥미로울만한 새로운 이야기를 들려주어야겠지.
예를 들면, 무엇일까.”
흐음, 하고 코와 턱에 길게 자라난, 나무뿌리 같은 수염을 깡마른 손으로 살살 쓰다듬으면서술라는 느릿느릿하게 숨을 내쉬다가 자신의 이야기를 기대하고 있는 페리링을 힐끔 내려다보았다.
어쩐지 움직이는 탁한 회색 눈동자에 표정 같은 게 읽혔다. 귀여운 손녀를 곯려줄 생각을 하는 할아버지 같은?
“…일단 들려주었던 이야기를 마저 해결한 다음으로 미루도록 하지.”
“대체 페리링에게 무슨 이야기를 한 거예요?”
놀리는 맛이 퐁퐁 솟아나는 귀여운 페리링이지만, 그건 자신이 놀려먹을 때 한정이다.
다른 사람이 놀려먹게 그냥 놔둘 순 없지. 끙 하고 눈에 띄게 실망하던 페리링이 지팡이를 붙잡곤 안경을 손가락으로 밀어올렸다.
“로즈 씨의 이야기를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변신 마법으로 이야기가 옮겨갔어요.
술라 님의 변신술은 용으로도 변신할 수 있는 경지에 이르렀다고 하셨죠.”
“헤에… 그럼 페리링은?”
그러고 보니 들은 바가 있었다.
루시탄이 그랬던가. 궁정 마법사인 술라는 용으로 변신해서 용과 맞서는 것마저 가능하다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스킬에 의지해야 한다고 해서, 그게 신기했던 기억이 난다.
페리링은 음, 하고 머릿속의 주문서를 뒤지는 모양이었다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이제껏 제 전문 분야가 아니라서 등한시하고 있었거든요. 기껏해야 아주 잠시 작은 쥐나 비둘기로 변신시키는 것밖엔 못 해요.”
“그것도 나름대로 대단한 거 아냐? 언제 한 번 보여줘.”
그 뭐냐.
질량 보존의 법칙이라든가, 그런 게 당연한 세상에서 살았던 터라, 마법이라고 하면 모든 것이 신기할 뿐이다.
사람을 손짓 한 번으로 쥐나 비둘기로 변신시키는 게 대단하지 않으면 뭐가 대단하다는 거냐고.
“음… 네. 기회가 닿으면 꼭 그렇게 할게요.”
페리링은 살짝 웃음을 띠며 고개를 끄덕였다. 한 번 페리링의 모자 안으로 손을 넣어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사이,선원들의 고함이 갑작스럽게 높이 울려 퍼졌다.
나와, 페리링과, 술라의 시선이 한 곳을 향했다.
아, 저기가…
며칠 동안의 항해 중, 어느 수평선을 향해 시선을 돌려도 보이는 거라곤 망망대해밖에 없었던 저 너머에 새로운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왕자의 말은… 허풍뿐인 것이 아니었다.
수평선과 맞닿은 저 멀리 희미하게 보이는 항구의 거대함은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갈매기가 날개를 접고, 파도조차 질려할 것 같은 크기의 범선들이 돛을 접은 채 수십 척은 거뜬히 항구에 몸을 의지해 항해의 여독을 풀고 있었다.
만약 자신이 놀랐다는 것을 안다면, 그 왕자는 필시 의기양양하게 거들먹거리겠지.
그런 얼굴은 보여주고 싶지 않았지만, 그래도… 저 항구의 규모가 시골 항구 레짐과는 비교할 수도 없을 정도라는 것만은 고래와 새우를 비교하는 것만큼이나 확연했다.
“정박 준비!”
선원들이 바쁘게 움직였다. 돛이 천천히 돛대로부터 말려올라갔고, 노군들도 노를 접는 듯 물살을 제치며 빠르게 나아가던 상선이 천천히 속도를 줄여갔다.
이 배가 완전히 멈추고 나면, 이제부터는 완전히 다른 이야기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것일까.
어쩐지 조금 긴장감과 두근거림을 동시에 느끼면서, 뱃전에서 저 멀리서부터 점점 가까워지는 항구를 눈에 담았다.
저 멀리 풍경이 마치,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만 같았다.
바이체슈테른 항구에, 그리고,
왕도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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