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화 〉 1 3 / 내가 본 왕자 중 최악의 왕자 루시탄에게(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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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아, 바이체슈테른 항(?) 말이지? 그야말로… 왕도의 젖줄이나 다름없는 곳이고말고.”
왁자하게 요란스러운 웃음소리가 로비에 넓게 퍼졌다.
거만하게 웃음기를 띤 소년의 목소리와 그 주위로 까르르 간드러진 웃음소리가 어우러져 앙상블처럼 겹쳐 울렸다.
덕분에 이쪽의 머릿속에도, 일이 마구 꼬여가는 소리가 마구마구 울려대고 있었고.
대체, 저기서, 뭘, 하고, 있는, 거야, 저, 재수 없는, 왕자 새끼는?
“고래도 놀라 도망갈 만큼 커다란 상선들이 하루에도 수십 척은 넘게 드나들고
하역하는 짐에 붙는 세금만 해도 어지간한 귀족은 평생 만져볼까 말까 할 정도야.
그뿐인가?선원들을 상대로 온갖 장사가 벌어지는데 새 가게를 열었다 하면
말 그대로 술 퍼마신 다음 날 토악질을 해도 뱃속에서 은을 쏟아낸다고 할 정도로 돈이 잘 벌려서…”
로비에는 짐작한 대로, 왕자가 내려와 있었다.
마치 제집 안방인 양다리를 쭉 펴고, 양쪽 옆구리에는 창녀를 낀 채 제 것인 양 굴고 있다.
그 거만한 태도로 고래같은 상선들에 대해 떠벌리는 꼴이 어이가 없어, 뭐라고 꼭 한 마디 쏘아붙여 줘야겠다고 부아가 치밀어올랐다.
“왕자 전…!”
모여든 구경꾼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그를 부르려는 한 마디는 어깨를 붙잡는 억센 손에 의해 막혔다.
단단하게 단련된 손아귀 힘에 뒤를 돌아보자, 왕자의 호위를 맡는 중년의 기사가 무뚝뚝한 눈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 그러니까 이 사람 이름이…
“잠시 얘기 좀 하지.”
발스턴 경, 이라고 했던가. 자신의 손님으로 와서 하룻밤을 보냈을 때보다 훨씬 사무적인 태도였다.
그 태도의 변화에 기묘한 위화감을 느끼면서도 네, 하고 대답하고는 힐끔,여전히 왕도의 항구에서 흘러넘치는 금화의 이야기를 신나서 떠드는 왕자를 뒤돌아보았다.
그가 지갑에서 누렇게 빛나는 금화를 팁 삼아서 구경꾼들에게 뿌리는 것이 보였다.
저러다가 이 얘기가 캔슬되면 쪽팔려서 어쩌려고 저러나.
기사는 엿듣는 걱정이 없는 조용한 빈방을 요구했고, 그에 따라 한구석의 적당해 보이는 방으로 안내했다.
적당한 값을 치르는 상인들이 쓰곤 하는 고급스럽지는 않은 방이었지만 그는 방의 상태는 개의치 않는 것 같았다.
그는 비치된 의자에 앉아서 흠, 하고 숨을 한번 내쉬었다.
내쉬는 콧김에 콧수염이 바르르 떨리는 데 시선이 가서, 하마터면 웃을 뻔했다… 조심해야지, 조심.
쩔그럭거리는 소리를 내는 가죽 주머니가 테이블에 놓였다.
발스턴 경과 그 주머니를 번갈아 바라보며, 테이블 아래에서 손가락이 꼼지락거렸다.
“이건 화대가 아니다. 네가 전하에 대해 입을 함부로 놀리지 않게 하기 위한 누름돌이라고 해 두지.”
안주머니에서 짧은 단검과 손수건이 뽑혀 나왔다.
예리하게 날이 선 단검을 손수건으로 닦으며 그는 말줄을 이어갔다.
그 단검의 칼날만큼 날카롭게 벼려진 눈매가 이쪽을 향하면지난번처럼 점잖았던 손님과는 다른 사람이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위압감이 어깨를 무겁게 짓눌렀다.
“전하께서 너에게 어떤 말씀을 내리셨는지는 추궁하지 않겠으나…”
감정을 내리눌러 죽인 목소리는 날카롭고, 싸늘했고, 동시에 담담하며 단단했다.
허리춤에 찬 칼자루를 일부러 보이듯 외투를 젖혔다가 도로 여미면서, 그는 한 호흡 말을 쉬었다.
그 행동 하나하나에… 이쪽을 긴장시키려는 의도가 여실히 보였다.
당연히, 온몸의 털에 오싹한 느낌이 스쳐 지나가면서 살짝 호흡이 가빠왔다. 뭐…지, 이 느낌은?
이런 거, 처음이다. 마치 고양이 앞의 쥐가 된 것 같은, 그런 느낌.
아니, 아니다.
호랑이 앞에 놓인 암퇘지가 된 것 같은 느낌에 가슴이 살짝 오르내렸다.
머리가 조금 어질어질하게 핑 돌기 시작하고,보이지 않는 손이 숨통을 억죄는 것 같은 기묘한 감각에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말해두겠다. 전하와 밤을 보낸 일에 대해 함부로 입을 놀리는 일도, 또 전하와 필요 이상으로 가까워지는 일도 없도록 해라.”
분명 그… 위압감이라고 해야 할 느낌은 눈앞의 기사에게서 비롯된 것이 틀림없었다.
기도를 지나는 산소가 느릿한 것이 몹시 답답했고 반대로 폐에서 빠져나가려는 이산화탄소가 느릿한 것이 몹시 갑갑했다.
주, 죽을 것 같, 아… 눈앞이 조금 흐려졌다. 이건 정말 위험해.
“그분은, 걸리버이면서 창녀인 너와는 전혀 다른 세계에 사시는 존귀한 분이시다.
모쪼록 네 존재가 전하의 전정(??)에 아주 조그마한 걸림돌이라도 되는 일은 결코 없길 바란다.”
가슴을 부여잡고, 발을 살짝 구르면서 숨을 깔딱거렸다.
이쪽의 불가해한 반응 하나하나를 놓치지 않겠다는 양 눈을 날카롭게 뜨고 노려보던 그.
이윽고 그의 기백이 사그라들고, 막혀있던 숨통이 탁 풀리는 것을 느꼈다.
하아, 하아, 하아… 그제야 뺨에서 땀이 흘러내리는 감각이 느껴졌다.
막혔던 숨이 바쁘게 트여서 부르르, 잔뜩 긴장했던 다리 사이에서 허벅지가 애처롭게 떨렸다…
조금만 더 이런 상태가 계속되었으면, 그땐 정말로 다른 의미로 큰일날 뻔했던 상황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 걸림돌을 치우는 것 또한 내 충의이므로. 무슨 말인지 알겠나?”
고개를 끄덕끄덕, 얌전하게 그의 말을 수긍했다. 아무리 자신이라도 그 말에 대설 배짱은 없었다.
목숨은 소중하지 않은가, 그것도 한 번 죽은 다음 다시 살아난 목숨이라면 더더욱.
하찮다는 듯 이쪽을 조금 경멸하는 눈으로 본 기사는,품에서 같은 가죽 주머니 하나를 더 꺼내 먼저 올려두었던 주머니 옆에 던졌다.
“이건 조금 전 일을 사과하는 의미로 주는 것이다. 받아둬라.허나 내 말을 허투루 여긴다면 이후에 네가 받게 될 것은 사과가 아니라 내 검이 될 것인즉.”
그는 의자에서 일어섰다. 그가 등을 돌려 방을 나가고, 잠시 두 개의 가죽 주머니를 향해 시선을 두고 있던 눈에서…
물기가 고여 흘러넘치려는 것을 황급하게 소매로 북북 비볐다.
씨발, 뭐가 서럽다고. 뭐가 분하다고 울기까지 하려고 해, 윤장미… 아니, 로즈. 정신 차리라고.
손등에 묻어나는 울음을 주저앉히는 대신 하아… 하고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가 토하고는 이를 악물었다.
짝!
양 뺨이 얼얼해질 정도로 세게, 자기 손으로 뺨을 두들겼다. 정신을 깨우는 아픔이 오히려 시원할 정도로 상쾌했다.
그대로 잠시 어깨를 떨어내는 것으로 스멀스멀 머릿속에 기어오르려던 분기를 마저 털어냈다.
좋아, 잘 삼켜냈다. 이걸로 괜찮아. 억울할 것도, 서러울 것도, 분할 것도 없다고.
“…좋아.”
표정도 잘 풀었고. 뱃속에 여전히 울화통이 들끓는 것 같지만 이제 평소대로 돌아온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게 충심이라는 건지 뭔진 잘 모르겠지만, 어차피 불만을 말할 수 있는 건도 아니니까.
복도로 통하는 문을 열었다.
그리고 의외라고 할지 예상대로라고 할지. 방 밖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사람의 겸연쩍어하는 눈과 마주쳤다.
지금은 별로… 만나고 싶지 않았는데.
왕자 주제에 왜 엿듣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고.
“…뭐하고 계세요?”
“여. 발스턴 경과는 좋은 얘길 나눴나?”
여, 는 무슨. 보자마자 본론이냐고.
로비에서 창녀들과 신나게 재잘거리며 너스레를 떨 때는 언제고 어느 틈에 빠져나와선.
어디부터 듣고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굳이 호위기사의 충심을 깎아내릴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냥 조금 이죽거리고 말아야지.
“뭐… 왕자 전하를 많이 걱정하는 것 같더라고요.”
“워낙에 융통성이 없는 인사지. 마음고생 했겠군.”
아니라곤 못 하겠고, 그 또한 그 이상 캐묻지는 않았다.
이쪽은 나가려고 했는데, 그가 들어오는 바람에 엉거주춤하고 물러서고는 기사가 앉았던 의자에 주저앉는 것까지 보았다.
“포주 설득은 잘 했나? 아무리 기다려도 보고가 없어서 투자자로서 불안해서.”
“일단은… 긍정적인 방향으로 생각하려나 봐요.”
마담과 나눴던 대화를 적당히 간추려서 보고하자, 안락의자에 몸을 좀 더 깊게 기대곤 짧게 그는 침음했다.
끙… 하고 앓는 소리를 내는 게 마담의 미적지근한 반응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동항로 회사 얘길 했는데도 반응이 별로 탐탁지 않았던 반응이라, 이 말이지?
그렇다는 건 돈 버는 데는 그다지 관심이 없거나, 아니면 왕도에 뭔가 구린 게 있을 가능성이 크겠군.
어느 쪽이든… 일이 그다지 재미없게 흘러가는데.”
마담답지 않게 자신을 염려하는 듯한 말도 보태긴 했지만 그걸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모르겠다.
사실 왕자와 마담 사이에 낀 장기말 같은 꼴이 된 것 같아서 그다지 유쾌하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한 가지 잊고 있었군. 중요한 일이었는데.”
잠시 곰곰이 생각하던 그는 뭔가를 떠올렸는지 아, 하고 소리를 냈다.
그의 눈이 이쪽을 향했다. …저런 표정을 지을 때는 그다지 이쪽에 유리한 내용이 아니라는 것이 자신의 직감이었다.
게다가 그, 발스턴 경인가 하는 기사에게 조금 험한 꼴을 당했던 직후라서 좀, 눈을 그렇게 뜨고 이쪽을 보는 건 삼갔으면 좋겠는데.
“내 일을 도와준다면 어떻게 셈을 치를지를 아직 교섭하지 않았잖아.”
“네? 거래라는 건 진심이었어요?”
“…넌 대체 날 어떤 인간으로 생각하고 있는 거냐?”
안하무인, 방약무인, 안면몰수, 철면피?
사실 냉정히 생각해보면 그렇게 저평가할 이유가 없었음에도 자신 안에서 그에 대한 평가는 매우 박했다… 자신도, 이유는 잘 모르겠다.
“내 지론인데, 셈을 치를 때는 반짝이는 것보다 더 믿을 수 있는 게 없어.
무엇보다 일에 대한 대가로 내주기에는 그보다 더 공평한 게 없지.
덧없고 공허한 약속보다는 그쪽이 더 가치가 있지 않나. 그렇지?”
거기에 수다쟁이도 꼭 포함해야 하겠군.
그래도 맞는 말임은 틀림없다…. 지키지도 못할 약속보다는 돈 쪽이 훨씬 확실하지 않은가.
이런 말도 있다지.
존만아, 돈으로 할 수 없는 일은 없단다. 있다면 네 돈이 부족한 거겠지. 라고.
“왕자 전하께서 후하게 셈을 치러주시길 바랄 수밖에 없겠는데요.”
조금 농을 섞어 그리 대답하니, 왕자는 어째 조금 뚱한 얼굴을 했다.
무엇이 마음에 안 들기에? 고개를 갸웃거리니, 왕자는 툭, 한 마디 내뱉었다.
“당신이라고 불렀잖아. 나.”
“네?”
“당신, 이라고 부르라고. 죽 그렇게 불러놓고는 인제 와서 뭘 새삼스럽게.”
“아, 네….”
그래도 사람들 앞에서 그렇게 불렀다간 당장 발스턴 경이 내 목을 뎅겅 자르려 들 테니,사람이 없는 곳에서는 원하시는 대로 부르겠다고 하자그는 선선히 납득한 모양이었다.
“이제 남은 건 포주의 결정을 기다리는 것뿐이군.”
지루해 죽겠다는 양 기지개를 켜면서 그는 몸을 일으켰다. 마담의 결정이 오래 걸리진 않을 것이다.
언감생심, 왕자를 기다리게 할 수는 없는 노릇일테니까.
“일단 오늘은 일정이 있으니 이만 가보겠어. 지부 방문이 잡혀 있으니,
혹시 포주를 만날 일이 있거든 늦어도 내일 아침까지는 결정을 달라고 전해.”
“네.”
“아, 그리고.”
무엇인가 까먹었다가 생각해냈다는 양,
그가 이를 드러내고 씩 웃었다. 안하무인이고, 방약무인이고, 안면몰수한데다, 철면피인 그런 웃음이었다.
“밤에 시간 비워놓고.”
…내 그럴 줄 알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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